序 文 - I
企劃論文: 역사교육의 목적을 묻는다: 가치 교육의 이론과 방법 모색
역사교육에서 가치 문제 논의 방식의 재검토
- 왜 역사교육에서 가치를 가르치는가? -
金 玟 政 - 1
한국의 역사교육에서 가치문제는 국가 교육과정 개정과 역사교육의 목적 결정 시 핵심 쟁점이었다. 역사교육의 목적과 내용에서 '가치'의 의미와 다양한 지점을 강조하는 배경과 논의를 검토하여 역사교육에서 가치문제를 가르칠 때 어떤 내용과 방법으로 가르쳐야 하는지 논의하는 데 토대로 삼고자 한다. 연구 결과 다양한 차원에서 사용되는 가치의 용례를 ‘가치를 가르치는’ 접근과 ‘가치에 대해서 가르치는’ 접근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가치를 직접 가르치기보다 역사적 사고와 결합하여 가치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과, 과거에 대해 판단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가치 체계를 객관화하여 보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역사교육에서 가치를 다루는 방식 저변에 기초한 쟁점을 ‘고려시대 수업에서 가치를 논의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대별되는 연구 흐름 위에 위치시켜 확인하였다. 역사교육에서 가치의 결정은 단순히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역사적 사고와 결합하여 가치에 대해 사고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역사학의 본질적 가치를 중심으로 역사교육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전근대 역사교육과 '가치'교육
- 경제적 관점을 중심으로 -
兪 眩 在 - 41
한국사에서 ‘가치’교육의 등장과 함께 현대사의 비중이 늘어났고 전근대사는 교과서에서 차지하는 분량이 점차 줄고 있다. 전근대사에는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가치’가 부족한 것이 표면적인 이유이다. 이에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다양한 주제를 교과서에 수록하면서 ‘가치’교육을 실시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전근대사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주요한 근거이자 중요한 자료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학생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오늘날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물론 전근대사를 지금과 같은 형태로 학생들에게 전달해서는 많은 문제가 있다. 현재적인 관점을 과거에 그대로 투영하여 과거를 해석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과거를 해석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제기하였고, 특히 ‘상품 화폐경제’라는 관점을 어떻게 해석할지 생각해 보며 전근대사를 ‘가치’교육에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 보았다.
역사인류학에서 바라본 가치의 문제
- 물신주의 개념을 중심으로 -
李 成 宰 - 67
물신주의는 자연 혹은 물질에 대한 숭배, 경외, 존경, 그리고 찬양의 신앙 체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믿음은 문화, 지리적 위치, 종교적 배경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가치 판단 역시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은 물신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찾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과연 물신주의를 없앨 수 있는 것인지, 물신주의가 그렇게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보는 관점에 따라 물신주의는 현대 사회에서 매우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개념이 될 수도 있다.
첫째로, 물신주의는 자연 혹은 물질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갖게 한다. 이는 현재 환경 보호와 지속 가능한 경제를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이념이다. 둘째로, 물신주의는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이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개인의 일탈적인 행동보다는 공동체의 이익과 상호 협력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이런 이유로 물신은 종종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셋째로, 물신주의는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물질에도 영적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해주는 역할을 한다. 대단히 정신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를 당한 아프리카 노예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 전체의 붕괴로 인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노예들은 물신을 통해 삶의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르셀 모스의 주장처럼 선물에 깃든 영적 힘은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시켜주며, 모리스 고들리에의 주장에서 살펴봤듯이 신성재에 대한 상상은 사회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論 文
역사학습을 위한 역사적 상상의 구조와 형식
金 漢 宗 - 103
본 연구의 목적은 언어 네트워크 분석 방법과 소셜 빅데이터 분석 방법을 활용하여 신조어 관련 연구의 동향을 분석하고 소셜미디어 사용자들의 신조어에 관한 인식을 탐색하는 데 있다. 분석 도구는 넷마이너 4.4. 프로그램을 활용하였다. 연구 방법은 첫째, 학위논문과 학술논문 중 신조어 관련 연구 396편을 수집하여 연구 동향을 분석하였다. 둘째, 소셜미디어 유튜브를 중심으로 최근 1년간 신조어와 관련된 100개의 영상에 게시된 문서와 댓글 8,333개의 문서를 수집하여 중심성 및 토픽모델링 분석을 하였다.
연구 결과는 첫째, 신조어 연구자들이 가장 높은 관심을 보인 핵심어는 ‘한국어’이며, 2011년 이후부터는 국어 교육 분야보다 한국어 교육 분야에서 신조어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둘째, 신조어 유형은 한자어, 고유어, 혼합어보다 외래어가 가장 높은 중심성을 나타내었고, 신조어 형성 방식은 차용, 합성, 축약․파생의 순서로 나타났다. 셋째, 신조어 관련 최근 연구에서는 ‘의미’, ‘문화’, ‘사회’, ‘형성’ 등의 단어가 중심성이 높게 나타났다. 넷째, 2011년부터 ‘소셜’, ‘미디어’의 단어가 출현하면서 신조어와 관련된 연구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다섯째, 최근 1년간 소셜미디어 공간에서 가장 많이 출현한 명사는 ‘시리즈’이고, 형용사는 ‘재미있다’, ‘젊다’ 등의 긍정적인 단어들로 나타났다. 그러나 신조어 관련 연구에서 ‘인터넷’, ‘문법’, ‘파괴’, ‘현상’ 등의 부정적인 단어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생성하였고, 소셜미디어 분석 결과에서도 ‘한글’과 ‘파괴’라는 부정적인 단어가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원의 인식으로 본 역사과 임용시험 문항에서 '현장 적합성' 강화의 필요성과 방향
兪 得 順 - 133
임용시험의 목적은 학교 현장에 필요한 교사를 선발하는 데 있으므로, 임용시험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평가 요소는 ‘학교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이며, 이를 측정할 수 있는 문항이 출제될 필요가 있다. 몇 차례에 걸쳐 역사과 임용시험 문항의 유형이나 체제가 바뀌며 형식적인 개선은 이루어졌으나 평가 요소, 즉 내용적 측면의 변화는 부족하였다. 또한 출제 원칙으로 제시된 <평가 영역 및 평가 내용 요소>에도 현장 적합성의 반영은 미흡하였다. 이에 임용시험 문항에 현장 적합성을 강화할 필요성을 알아보고, 현장 교원과의 면담을 통해 그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해 보았다.
사전 인터뷰를 거쳐 본 면담에 참여한 교원은 임용시험을 거쳐 국・공립학교에 근무하면서 10년 이상의 교육경력을 가졌고, 교생 지도를 연속적・체계적으로 운영하는 학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이들과 연구 주제에 관해 면담을 진행하며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학교에서 필요한 교사의 능력은 수업의 구성・설계 능력, 교과 지식을 토대로 한 교수내용지식, 평가 도구 개발과 피드백 제공 능력 등이며, 이를 임용시험 문항의 평가 요소로 반영하여 현장 적합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둘째, 출제 원칙으로 제시된 <평가 영역 및 평가 내용 요소>를 수정・보완할 필요가 있다. 셋째, 채점관의 역량 강화와 인력 활용을 통해 임용시험 채점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본고에서 다룬 임용시험 문항의 개선은 교사 양성과정의 현장 적합성 강화와도 맞물려 있다. 또한 임용시험을 통해 우수한 교사를 선발하는 것만큼, 시험을 통과한 교사들이 안정적으로 현장에 적응하고 교육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의 개선과 환경의 정비도 필요할 것이다.
고려시대 기우제 거행과 용신신앙
崔 俸 準 - 173
이 글의 목적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된 기우제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고려시대에 거행된 용신 기우제를 통해 기우제에 고려시대의 사상적 특징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확인하는 데 있다.
전근대 국가에 가뭄은 농업생산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재해였다. 기우제에 龍神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다. 용은 水神으로서 구름을 움직여 비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믿어져왔다. 기우제에 대한 연구는 주로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고려시대는 관련 기록이 부족하여 연구가 더욱 부진하였다. 비록 관련 기록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용신 기우제는 고려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의례라 할 수 있다.
용신 기우제는 용의 형상을 만들어 세워두고 기우제를 지내는 像龍, 蜥蜴 등 용을 대신하는 동물을 이용하는 代龍, 물 속에 잠자고 있는 용을 일깨우기 위해 연못 등에 온갖 물건을 투척하는 潛龍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 태종대에 정비된 기우제에서는 위의 3가지 방법이 모두 거론되지만, 고려시대의 기록에 潛龍 기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5세기에 편찬된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고려시대에도 잠룡 기우가 지방사회에서 널리 거행되었다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용신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기우제에는 유교와 불교, 도교 등이 매우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사상적 다원성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조선전기 서울의 학문 계보와 회현동
李 東 麟 - 207
이 글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까지 100년 동안 서울 남부(南部) 회현동(會賢洞)에서 전개된 강학 전통을 고찰한 것이다. 바로 ‘김굉필-유우-이중호’로 이어지는 학문 계보를 규명한 것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에 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다만 김굉필과 서울의 관계성은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거주했고 지역기반도 서울경기에 있었다. 그 역시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며 결혼 전까지 19년을 정릉동에서 살았다. 서울 남부참봉에 제수되어 회현동 일대에서 강학을 시작했을 때 그의 문인도 대부분 서울에 살았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조광조가 가장 유명하지만, 서울의 강학활동을 통해 그의 학문을 계승한 문인은 서봉(西峯) 유우(柳藕, 1473∼1537)이다. 유우 역시 남산(南山) 자락의 회현동에서 문인 교육에 종사했다. 문인들은 그가 김굉필의 학문을 계승했다는 이유로 배움을 청했고 단순히 숙사(塾師)가 아닌 선정(先正)으로 존경했다. 그들의 거주지 또한 회현동이었다.
유우의 문인 가운데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 1512∼1554)도 회현동에서 사숙을 열고 강학했다. 동시대에 동명이인 이중호가 존재했고 현대까지 양자가 혼동되고 있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우선 양자가 서로 다른 인물임을 변증하고 그 이유를 고찰했다.
16세기 이중호의 학문은 <소학>과 예학(禮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금서가 되었던 <소학>을 제일 먼저 가르쳤고, 본인도 일상생활에서 <소학>을 철저히 실천했다. 많은 문인 중에는 소론(少論)과 근기남인(近畿南人)의 원류에 해당하는 인물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에 이중호 문인은 조선후기 학파 및 정파의 분기를 계기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통감부 시기 한국 중앙은행 신설 구상
- 일제 동아시아 금융정책의 형성 경로를 중심으로 -
曺 銘 根 - 249
1878년 조선에 진출한 제일은행은 무역금융 → 해관세 취급 → 은행권 발행이라는 단계를 거치며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민간 사립은행인 제일은행을 앞세운 금융침탈의 경로는 이후 일제 동아시아 금융정책의 원형이 되었다. 반면 일본은 청의 이권 획득을 목표로 일청은행 설립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일청은행은 광범위한 사업 수행을 목적으로 했으나 이를 실현시켜 줄 자금 조달 방안은 구비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이는 서양 열강에 비해 열등했던 일본 자본주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감부는 한국 통치권을 장악한 직후인 1907년 8월 제일은행을 대신할 중앙은행 신설안으로 「대한은행법」(1차안)과 이듬해 2월에 「대한은행조례」(2차안)를 마련하였다. 대한은행은 정부가 자본금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관민합작은행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대한은행 중역 중 30~40%는 조선인에게 할당하도록 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인의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한국은행 설립시 이 조항은 삭제되었다. 애초에는 중앙은행 업무만 전담하는 것으로 하였으나 이후 상업금융을 겸영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909년 11월 한국은행(1911년 조선은행으로 개칭)은 통감부의 「대한은행조례」를 대체로 계승하여 설립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은행권 발행제도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이는 기존 제일은행권 발행 제도를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의 발권제도는 대만과 달리 금이 아닌 일본은행권이 정화준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통감부의 신설 중앙은행 설립 과정은 일제 동아시아 금융정책의 형성 경로와 진화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唐 太宗 '明君 傳說'의 形成과 傳承
- 中國 歷代 君主의 評價와 模倣 -
金 成 奎 - 283
당 이후 중국의 많은 황제가 당 태종을 자주 인용해 회고하고 평가한 것은 그에게 다른 군주가 갖지 못한 매력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하의 말을 경청해 ‘從諫如流’했다는 그의 자세는, 納諫을 군주의 최고 덕목으로 오랫동안 이야기되어온 동아시아 사회에서 호감을 주는 가장 큰 요소였다. 현실적으로 納諫이 중요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고 있던 군주들은 당 태종이 그것을 가장 잘 지켜낸 모범적 존재라 칭송하고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인식과 평가는 史實보다 과장된 점이 있는 것이 事實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조를 거듭하며 당 태종의 이야기는 ‘전설’화하여 특히 황제 중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명의 신종이 특별한 사정을 배경으로 태종을 강도 있게 비판한 것을 예외로 하면 이민족 왕조인 청의 건륭제가 강한 비판을 제출한 정도이다.
태종은 그 옆을 지킨 위징에 의해 한층 매력적으로 비추어졌다. 태종의 ‘納諫’ 은 위징의 ‘勸諫’을 빼고 생각하기 어려우며 위징은 이로써 명군에게 필요한 ‘名臣’의 대명사로 인식되기 시작했지만, 태종 역시 그러한 인물을 발굴해 기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군주였다. 이 점에서 후대 군주들 간에 ‘태종-위징 모델’을 ‘善政’을 실현할 하나의 模式으로 바라보고 모방하려는 움직임이 유행처럼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현상은 오대와 송의 군주에게 특히 큰 관심을 모았지만, 사실 당 태종 역시 춘추의 패자 ‘桓公-管仲 모델’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위징을 두고 ‘忘君事讎’했다거나 그 諫言이 名聲을 탐낸 불순한 동기에서 나왔다는 비판이 나타났지만, 桓公이 管仲을 빼고 말하기 힘든 것처럼 당 태종의 명성도 위징의 역할 없이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 태종의 약점이 ‘修己’ 쪽에 있으며, 그가 받은 대부분의 비판이 이곳으로 집중된 것이 사실이다. ‘倫理虧欠’, ‘閨門慚德’ 등은 큰 결점으로 지적되어 그가 거둔 ‘功業’을 상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역대 군주에게 당 태종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며 한 차원 높은 ‘堯舜’을 지향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로 제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목표를 위해 실제로 진지하게 노력했던 군주의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추상적이며 실체조차 분명치 않은 ‘요순’이라는 목표와 그를 향해 접근하려 해도 확립되지 않은 애매한 방법론은 군주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웠을 것이다. 차라리 당 태종은 도덕적 모순은 있더라도 비교적 가까운 시점에 실존한 구체적 인물로, 『정요』 등에 제시된 그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그 실천 방법도 들을 수 있던 점에서 친근감이 더 컸다고 보인다.
보다 객관적 입장에 있던 異民族 왕조는 당 태종 평가에서 ‘계승과 비판’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함께 보였다. ‘계승’은 漢族 사회에서 확립한 기존의 평가를 중국의 안정적 지배라는 측면에서 존중한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맥락을 고려해 이민족 왕조의 당 태종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金 世宗의 예리하고 분석적인 비판이나, 淸의 乾隆帝처럼 전면적인 비판이 출현한 배경에는 漢族의 ‘明君’을 넘어서려는 정복자 이민족 왕조의 경쟁 심리 등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대만 美在華敎育基金會의 조직과 학술교류상의 문화냉전, 1957~1967
蔡 藝 珍 - 321
본고는 1957년에 대만에서 설립된 미재화교육기금회(United States Educational Foundation in the Republic of China, USEF/C)의 조직과 학술교류활동을 고찰하였다. 미국 정부로부터의 재원이 집중적으로 조달되었던 1967년까지를 분석시기로 삼았다. 기존연구가 미국방문 ‘중국인프로그램(Chinese Program)’을 통한 미국적 가치의 홍보와 확산에 주목해 ‘문화냉전’의 한 측면만을 파악했다면, 본고는 대만방문 ‘미국인프로그램(American Program)’을 통해 미국인에게 중국문화의 진정한 계승자·대표자는 공산중국이 아니라 ‘자유중국’임을 각인시키는 문화냉전의 다른 측면을 밝혔다.
‘풀브라이트 법(Fulbright Act)’에 따라 1947년에 난징 미재화교육기금회가 최초로 설립되었다.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퇴각함에 따라 학술교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1952년에 미국과 소련의 냉전대립이 고조되는 가운데 공산당의 선전에 대항하기 위해 제정된 ‘스미스문트 법(Smith-Munt Act)’을 토대로 1957년에 대만 미재화교육기금회가 재설립되었다. 대만은 경제·군사원조 뿐만 아니라 교육·문화원조 또한 미국에 의존적이었으므로, 기금회를 통해 연구자들의 미국 방문기회를 넓힐 수 있었다. 이 때 미국 정부는 대만의 ‘미국공보원(USIS)’과 기금회의 협력을 통해 미국의 자유주의적 가치를 전파하는 것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기금회 조직은 중화민국과 미국의 외교부 및 정보기관의 주도 아래 성립되었다. 이사회는 미국 대사가 최종적으로 임명한 중국인과 미국인 각 4명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대만 미국 공보원의 문화담당 공보원이 이사회의 일원으로써 기금회 설립과 운영 프로그램 기획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기금회의 지원을 받은 연구자들은 기본적으로 학술 네트워크의 형성에 기여했지만, 국가 간 유대를 강화하고자 하는 국가적 목표 위에서 문화대사로서의 역할도 강조되었다.
대만에 방문한 미국인 연구자의 활동은 크게 중국학 중심의 전공분야별 파견과 전공을 초월한 ‘중국문명연구소(Summer Institute in Chinese Civilization)’ 세미나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주로 대만의 대학 및 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대만 중심의 중국학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후자는 유서 깊은 전통 ‘중국문명’과 현대 중국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대만을 연결시키는데 초점이 있었다. 기금회는 미국인 연구자들이 대만의 국가기념행사를 참관하는 것과 중앙연구원, 고궁박물관, 산업시설, 토지개혁 센터 등의 현지답사를 추진함으로써 대만의 정통성과 발전상을 강조하였다. 그중에서도 군사지역이었던 금문도 답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냉전기의 금문도가 미국의 원조를 끌어들이는 연결고리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각 분야의 연구자들은 대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대학 캠퍼스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커뮤니티에서 강연·세미나를 개최함으로써 대만과 미국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전통문명 담론을 활용하여 중화민국의 정통성 및 대표성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대만과 미국 정부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미재화교육기금회를 통한 학술교류는 대만의 과학기술발전을 도모하고 중국학 연구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지적토대를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공산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자유중국’ 대만이 진정한 ‘중국’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과정이었다. 중국문명은 동아시아 지역에 공유된 것이기에 그 계승자와 주도자가 누구냐 하는 냉전적 경쟁은 양안 관계를 넘어 미국과 동아시아에도 극히 중요한 지역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본고는 미국표준의 가치관이 세계적 차원에서 확산이라는 관점이 주로 부각된 기존의 학술교류사의 시각을 보완하고, 미재화교육기금회를 통한 미국인의 대만방문을 중국 전통문화의 역사적 계승성을 둘러싼 지역적 차원에서 분석하여 문화냉전의 새로운 측면을 고찰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를 둔다.
批評論文
역사교육인가 민주시민교육인가
林 起 煥 - 359
이 글은 근래에 역사교육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역사교육의 목적이 '민주시민 양성'에 있다는, 즉 역사교육은 민주시민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역사 없는 역사교육"이 될 개연성이 높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역사교육이 민주시민 양성에 기여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는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는 없겠다. 따라서, 논점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의 역사교육으로 그러한 목표를 실천하느냐이다. 근자에 운위되는 "민주시민교육으로서의 역사교육"이란 주장들은 마치 다른 방식의 역사교육은 민주시민 양성과 무관한 역사교육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민주시민교육으로서 역사교육을 주장하는 역사교육 연구자들은 새로운 역사서사를 구성하는 길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본다. 역사서사의 구성이 역사교육 연구자들이 감당할 몫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연구자와 협업과 연대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실천은 이루어지지 못한 듯하다. 새로운 대안 역사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역사교육의 새로운 전환 모색은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 민주시민교육의 가치를 목표로 하는 역사교육의 길로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점에서 역사교육이 민주시민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역사교육의 새로운 방향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이 아니라 오히려 소극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역사학계와의 연대를 소홀히 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역사서사의 구성이라는 역사교육의 기본에 도전하지 않고 이를 회피하는 방식을 선택한 결과라고 비판하고 싶다.
書 評
정상우, 『만선사, 그 형상과 지속』, 사회평론아카데미, 2022
만선사, 일본의 또 다른 식민주의 역사학 기획
鄭 駿 永 - 385
彙 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