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 文]
집단기억, 역사의식, 역사교육
梁 豪 煥
1. 서언
2. 집단기억의 등장
3. 기억과 역사의 접점으로서의 역사의식
4. 집단기억 역사의식과 역사학습의 의미
5. 결론
기억은 역사와 함께 과거를 알 수 있는 주요한 통로이다. 최근의 기억에 관한 논의에서 역사와 기억의 관계는 이미 국내외 여러 편의 논문에서 상세히 다루어진 바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과 역사학습의 국면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식민지배에 따른 희생과 피해 문제에 대해 망각을 먼저 가르칠 수는 없을 것이다. 망각이란 이미 기억하고 있는 것, 학습한 것을 극복하는 것인데, 학교에서는 가르치지도 않은 것을 잊으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교 역사 학습의 구실이자 가능성은 학생들이 자신의 과거상을 성찰할 수 있도록, 자신이 어떤 ‘거리’에서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학교가 국가와 사회라는 공적 권위에 의해 부과된 소위 집단기억을 형성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면, 이러한 기회의 가치는 더욱 소중하다.
이 글에서 나는 역사의식을 접점으로 해서 기억과 역사를 아우를 수 있는 논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어떻게 역사학습에서 기억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역사의식을 집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사회현실 및 과거의 이야기나 이미지를 포함한 다양한 역사적 표현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구성원 형성해가는 것이라고 보고자 하였다. 특히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이 기억을 포함하여 과거를 아는 방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그간 역사적 사고와 관련하여 논의가 부족했던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역사가의 사고(과정)를 학생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지식은 그 전달 과정에서 생산자(사료 속의 행위자, 기록자)에서 소비자(학생)에 이르기까지 어떤 의미에서든 역사를 실행하는 단계가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최종 소비자인 학생 역시 과거에 대한 역사적 표현을 수용할 때 나름대로 여러 가지 해석과 판단을 하게 된다. 역사지식의 전달과정과 관계의 속성을 파악하려는 노력 속에서 학생들은 과거의 이야기나 이미지가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과 매체의 성격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황과 위치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역사지식이 어떻게 감정이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가, 또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떠한가에 대해, 즉 스스로 어떠한 거리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역사에 대해 생각하는 그 순간 역사가가 된다는 것, 역사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歷史敎材의 撰述에서 用語選定의 問題
李 景 植
1. 序 言
2. 歷史用語의 吟味와 國史의 處地
3. 韓國歷史學과 用語選定의 傾向
4. 事例로 본 用語論議의 虛實
5. 結 語
역사서술에서 사건발생 당시 혹은 그 이후에 민인들이 사용한 표현이나 명칭을 자신의 학문성향이나 정치이념 혹은 종교교리에 몰입된 가운데 객관성 보편성 과학성의 名儀下에 새로운 어휘로 바꾸어 표기하려고 할 때 손실은 엄청나게 크고 이득은 없다. 현재식 표현이나 추상술어가 우리의 역사전통에 뿌리를 두고 형성된 사상이나 이론의 소산이 못되고 행여 다른 나라 남의 이론이나 시각을 차용한 수준에서 조성되고 이를 자기의 것으로 혼동한 데서 나온 것일 경우에는 啓蒙選民의 사명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기 십상이고 아울러 그것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애정으로 等値하여 역사서술에 이용될 때, 이와 바탕은 비슷하나 이해각도가 다른 이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나면 매우 격렬하여진다. 그리하여 역사의 사실·진실이 용어 하나로 좌우되는 듯한 지경에 이른다. 겹쳐서 이런 지경에서는 해당 표현이 그 사건과 행위를 가치상의 上下, 윤리상의 貴賤으로 또는 인식상의 正否로 가르는 尺度로 화하여 사건의 사실과 성질을 정당하게 인식하는 것보다는 자기 가치의 관철여부를 판정하려는 행위로 오해를 일으킬 정도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사건 중에는 시간이 더 지나 그것을 차분히 바라볼 안목과 담담히 정리할 능력이 생길 때를 기다리거나 혹은 통일 후에나 적절한 의미를 갖는 명칭으로 정돈될 것이 적지 않다. 지루하더라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거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역사 연구가, 역사 교육자로서 심사숙고하여 연구와 사고의 폭을 넓히고 새롭게 하는 자세와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 우리 역사의 眞面을 반듯하게 풍성하게 서술하기 위해서는 渾身의 힘을 다한 단단하고 치밀한 연구와 깊고 넉넉한 사색에서 나오는 그러한 용어가 개발되고 정의되고 사용되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형세에선 우리의 문화정취가 폭넓고 세련되게 나타나는 어휘나 용어가 가꾸어지고 늘어가기는커녕, 있는 용어마저 버리고 급속히 잊혀진다. 빈약한 단어, 생경한 造語, 계통 없는 낱말, 편파성 짙은 표현으로 우리 역사를 풍부하게 묘사하기는 힘들다. 이런 풍토에선 횡행하는 것은 辯士이고 극성하는 것은 說客이다. 사유의 輕薄, 입론의 浮虛는 갈수록 그리고 급속히 왕성해져 갈 뿐이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의 역사인식이 전통과 단절이 깊어져 그 폭이 矮小해지면서 오래도록 사용하여 온 그리고 수많은 어휘들이 갈수록 생소하고 거북하게 되어왔고 또 되고 있다. 기층사회의 분해, 민인대중의 安着根据 해체는 이를 한층 촉발하고 있으며 이에 追隨하는 학문은 유치하고 단순한 그리고 천박한 流行語를 선호하는 까닭이다. 서술자도 그렇고 읽는 이, 배우는 이, 가르치는 이 거개가 이 渦中에 있다. 이러한 형세는 학문과 교육의 진정한 발전에 먹구름이며 그만큼 우리 문화 및 그 이해의 폭을 좁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혹 있을 수 있는 발상, 가령 중고등학교 ‘국사’의 경우 당대의 용어가 생소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친숙한 용어로 바꾸거나 새로 풀어서 써야한다는 착상 자체가 그대로 교육용 역사서의 서술에 지침이나 지표가 될 수는 없다.
역사 특히 通史類의 개설이나 교과서에선 善行仁德義理志操風流浩然 懲惡勸善 등등 보편가치가 함께 녹아있어야 역사의 임무는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이 이른 바 科學的 關係的 인식 요컨대 中庸的 파악과 모순되는 게 아님은 물론이다. 궁극에 역사의 발전논리, 일반법칙, 보편성과 일반성은 어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써 표현되는 사실·사건·행위의 전개과정 속에 있는 까닭이다.
2007 개정 교육과정의 10학년역사교과서 구성을 위한 단원 개발 원리 - 일본과 영국 사례의 분석을 통한 비교 검토 -
兪 敬 兒
1. 머리말
2. 10학년 역사의 성격과 내용 구성
3. 세계사를 반영해 자국사 내용을 구성한 외국 사례 분석과 10학년 역사에의 시사
4. 10학년『역사 교과서의 단원 개발을 위한 기본 원리의 제안
5. 맺음말
2007년 2월 고시된 새로운 교육과정에서 역사 관련 내용구성이 변화해,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 10학년(고등학교 1학년)에 역사과목(이하, 10학년 역사로 표기)이 신설되었다. 10학년 역사는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한다, 세계사의 흐름 위에서 한국사를 주체적으로 파악하게 한다. 즉, 세계사적인 관점을 포함하여 자국사를 이해 가능하도록 구성한다는 2가지의 특징을 갖도록 기대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이러한 과목의 특징을 살린 교과서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을 가진 역사교과서는 교육과정상 처음으로 도입되는 까닭에, ‘세계사적 관점을 포함하여 자국사를 이해한다’라는 조건을 갖춘 교과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런 까닭에 교과서 개발에 앞서 먼저 새로운 교육과정이 표방하고 있는 ‘세계사적 관점을 포함하여 자국사를 이해한다’라는 입장이 가진 내용구성 원리가 무엇인가를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는 다음의 2가지를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첫째, 개정 교육과정의 내용을 분석해 교육과정이 밝히고 있는 10학년 「역사」의 ‘세계사적인 관점을 포함하여 자국사를 이해한다’라는 입장을 내용구성 원리라는 측면에서 해명한다. 둘째, 위에서 해명된 구성 원리를 기본으로 하면서, 시사를 얻기 위해 분석했던 일본과 영국의 역사교과서의 내용구성 원리를 정리하고, 이를 참고로 10학년역사 교과서의 내용구성을 위한 단원 개발 원리를 제안한다.
대만사, 중국사, 세계사: 2004~2008년 대만의 고등학교 역사과정 개혁 분석
金 裕 利
1. 머리말
2. 동심원방안을 채용한 고중의 역사과정 개혁
3. 94잠강, 95잠강의 내용과 98신강요의 특징
3. 94잠강, 95잠강의 내용과 98신강요의 특징
4. 맺음말 : 정권교체와 98신강요의 향방
대만의 역사교육은 1990년대 후반 중학교용認識臺灣(歷史篇)교과서의 출간 이후 커다란 변화의 와중에 있다. 인식대만교과서는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사용되다가 2005년부터는 역사, 지리, 공민이 통합된 사회교과서로 대체되었다. 고등학교의 역사교육과정은 2005년부터 기존의 ‘本國史(중국사)와 세계사’ 체제에서, ‘대만사, 중국사, 세계사’ 체제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2006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에서 歷史 제1책 대만사 교과서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중화민국 건국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2008년 1월에는 이러한 역사과정 개혁을 마무리하여 高級中學歷史課程綱要(신강요)를 확정 반포하였다. 고등학교 역사과정 개혁과 대만사 교과서의 사용은 지난 8년간 民進黨 정권하에서 성장한 ‘대만주체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또한 자국사로서 ‘탈중국화’한 대만사를 강조하는 杜正勝의 ‘同心圓방안’에 기초하고 있다. 杜正勝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4년동안 교육부장으로 재임하면서 역사과정개혁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역사과정 개혁이 이뤄지는 동안 국민당계 반대파의 비판 논쟁은 계속되었다. 결국 국민당이 재집권하고 교육부장이 경질되자마자 2008년 6월 교육부는 신강요의 실시시기를 1년 연기하여 99학년도(2010년)부터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현재 고등학교 역사과정 개혁과 대만사 교과서에 대한 논쟁은 民進黨에서 國民黨으로의 정권교체와 관련하여 반대 주장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또한 중국은 대만의 역사과정 개혁이 ‘하나의 중국’을 위한 조국통일론에 위배된다고 비난해왔는데, 양안협력을 주요정책으로 내걸은 대만의 국민당정부가 신강요를 변동없이 실시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1862년 농민항쟁기 파견관리 李參鉉(1807~1872)의 활동
宋 讚 燮
1. 머리말
2. 선무의 길 : 설득과 좌절
3. 안핵의 길 : 처벌과 愼刑
4. 삼정의 인식 : 원인과 대책
5. 맺음말
역사에서 인물은 한 시대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시대를 추동해 나가는 역할을 한다. 역사는 인간을 소유하고 활용하는 '유일한 연구실'이다. 한 시대가 어떻게 움직이고 작동했는지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주요 행위자, 역사적 인물을 추적하면서 된다. 우리는 중요한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통해 더욱 효과적인 역사교육을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농민운동사의 자료적 한계를 직접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지배층, 특히 당시 농민들을 가까이 접했던 파견 관리를 통해 메워나가려는 시도로서 이루어졌다.
1862년 농민항쟁은 조선후기 최대의 사건이다. 이 시기에 관한 연구로서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활동을 당연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실제 사건을 일으킨 농민층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해서 연구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 당시 지배층은 사건의 진압 또는 해결을 위해 나섰는데, 그 가운데는 이 일어났던 지역에 직접 암행어사, 선무사, 안핵사로 파견되었던 인물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항쟁을 접하였다. 특히 이삼현은 이 사건의 가장 중심지였던 경상도에 선무사로 갔으며 항쟁이 잦아지던 후반기에는 함흥 안핵사로 다녀와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본 논문에서는 이삼현의 여러 저작을 통해 농민항쟁의 실상을 살펴보고, 그가 내세운 대책안을 평가해 보았다. 먼저 선무사로서 이삼현은 효유의 명령을 받고 내려와서 한 달간 다니면서 현지 실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역마다 고을민들의 어려운 실상과 분노가 컸기 때문에 거의 사안마다 임기응변으로 모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속에서 농민들의 요구에 맞서 국가의 권위와 자신의 논리를 수용하도록 주장하였다.
안핵사로서 함흥농민항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가 주모자들을 추고하면서 보여준 법인식은 상당히 전진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충분히 의심이 가지만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는 처벌을 완화하고 있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관용을 베풀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는 개인의 도덕성 때문이 아니라 항쟁을 지켜보면서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다.
이런 과정 속에 농민항쟁과 삼정에 대한 그의 주장도 여러 가지 글을 통해서 토로하였는데, 社倉制와 量田 등 원칙적인 주장도 많이 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정부에서 삼정이정청으로 제시한 罷還歸結이라는 대책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이는 환곡을 많이 탕감하지만, 恒留穀이라는 별도의 곡종을 설치하였으며 환곡의 이자 대신 결세의 부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민생과 民國에 대한 견해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같은 관심도 농민항쟁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대한제국기 국민교육의 추진과 굴절
具 姬 眞
1. 서언
2. 한말 공립소학교 설립과 興學을 통한 국민교육 모색
3. 을사늑약 후 興學의 한계와 교육자치의 추구
4. 통감부의 ‘공립소학교’ 말살과정과 교육자치의 굴절
5. 결어
지금까지 한국근대교육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왔는데, 갑오개혁은 신학제의 채택으로 주목된 반면에 대한제국前半期의 교육은 간과되거나 新學制가 저지된 것으로 비판받아왔다. 근래에 우리전통에 기반 하여 근대교육의 수립과정을 정리하려는 시각이 정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들이 시작되어 공립소학교를 중심으로 대략적인 학교의 설립현황과 재정, 교육이념, 교육과정 등이 밝혀졌다. 그러나 공립소학교의 현황에 대해서는 좀 더 정밀하게 규명되어야하며, 학교의 설립과 운영방식에서도 대한제국이 역사전통 위에서 국민교육제도를 수립해가는 특징과 성격이 밝혀져야 한다.
대한제국은 흥학정책으로 官學과 私學을 세워 국가적 교육체제를 만들어왔던 전통에 기반 해서 국민교육체제를 수립해갔다. 정부가 주도하여 관립소학교를 설립하고 興學 정책을 통해 지방의 공사립소학교설립을 지원하였다. 지방민들은 공사립소학교를 자치적으로 설립해가다가, 교육을 국가운영의 근본으로하여 국민의 의기를 함양하는 총학의 정신은 계승하면서도 운영면에서는 지방관과 유지자에게만 의존하는 흥학이라는 방식의 한계를 모든 민인들이 참여하고 부담하는 교육자치를 제도화해서 극복하려했다. 日帝는 국민의 ‘義氣’양성을 중시하고 ‘자치’전통이 강한 한국교육을 말살하고 식민교육을 이식하려했다.
본고는 대한제국기 국민교육체제의 수립과 굴절을 ‘흥학’에서 ‘교육자치’와 ‘의무교육’으로의 전환과정을 통해 규명하며 우리역사에서 근대교육체제로의 전환원리를 밝히려고 했다. 흥학전통은 교육을 국가운영의 근본으로 하며, 강한 선비들의 기개(士氣)를 국가의 元氣로 삼아 도리와 의리를 중시한다는 정신적 측면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관학과 사학으로 다수의 학교를 설립하여 전국적인 교육체제를 만든다는 학교설립의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본고는 학교설립과 운영에서의 전환과 굴절을 다루었으며, 흥학의 정신적인 측면인 교육이념과 내용에서의 변화와 굴절은 다음의 과제로 남긴다.
대한제국기 신설 宮의 지주 경영
朴 性 俊
1. 머리말
2. 신설 宮의 지주 경영 강화
3. 작인층의 동향과 경작기간
4. 맺음말
대한제국기 신설 宮인 경선궁영친왕궁의 지주 경영을 보면, 대체적으로 지주 경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영친왕궁은 여수군에서 有勢家의 작인에 대한 간여를 배제하기 위해 궁감과 마름 외에 각 洞마다 首作人을 두어 작인에 대한 통제관리를 강화하였고, 경선궁은 다른 군에 비해 지대 미수률이 높고, 결세 부담이 있었던 낙안군에서 집조에서 타조로 지대 징수 방식을 변경하며 지주 경영을 강화하였다.
이 외 지대 징수량을 인상하며 지주 경영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내장원이 책정한 지대량과 신설 궁이 징수한 지대량을 비교해 보면, 일률적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내장원이 책정한 도조량보다 신설 궁이 징수한 지대량이 많았다. 영친왕궁과 경선궁은 작인 관리지대 징수 방식의 변경지대 징수량의 증가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지주 경영을 강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주 경영의 강화는 일정한 생산력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강진군과 해남군에서는 격년으로 재해가 들었지만, 지대 징수량두락당 지대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증가와 감소를 반복하며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거나 증가하는 방향이었다. 재해를 입은 토지가 舊陳으로 묵은 토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해 피해를 회복하며 정상적으로 경작할 수 있는 생산력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주 경영을 통해 산출된 신설 궁의 두락당 지대량은 당시 일반 지주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작인층 분포를 보면 여수군과 강진군이 가장 대비되었는데, 여수군은 0-2두락을 경작한 작인이 45%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았는데, 강진군은 0-2두락을 경작한 작인이 6.7%였고 일부 상층농이 토지 10.4%를 경작해 작인층의 분포에 차이를 보였다.
작인의 분포가 군별로 차이를 보이지만, 작인이 주로 집중된 면적은 여수낙안군은 0-5두락, 강진해남군은 3-8두락으로 하층농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경작 규모에 작인이 집중된 것은 당시 작인이 집약 농법에 기초해 토지를 경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집약 농법에 기초해 토지를 경작한 작인층의 변동 양상을 보면 상중하층농간의 큰 변동은 없었지만, 대체적으로 경작 면적을 확대하여 상승하려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작인들이 경작 면적을 확대하며 중상층농으로 상승하려는 동향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의 농업경영이 어느 정도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인의 존속률과 경작기간을 보면, 존속률은 70-80%를 유지하며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개별 작인의 경작 기간은 평균 2.5년으로 짧았지만, 이는 분석 대상 기간이 짧은 것에 기인한 것으로 1900-1907년을 전후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이들의 경작 기간은 더 길어질 것이다. 대한제국기 신설 궁의 장토를 경작한 작인층의 존속률과 경작기간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인층을 바탕으로 신설 궁은 지주 경영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장애 요소도 있었다. 대한제국은 결세를 징수하면서 결총제에 기반하여 災結을 지급했지만, 그 규모는 매우 축소되었고 舊災는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지주는 陳田無邙結에 부과된 결세를 납부해야 했고, 작인은 災로 처리된 토지만큼 災結을 지급받지 못한 채 결세를 납부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기존 지주제 연구는 조선왕조 궁방과 일반 지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대한제국기 신설 궁의 지주경영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대한제국기 신설 궁의 지주경영을 분석한 이 연구는 대한제국기 지주경영의 일면을 새롭게 파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說 林]
‘한국 근현대사 논쟁’과 10학년역사교과서 편찬
池 秀 傑
[書 評]
김용섭 著,
東아시아 역사 속의 한국문명의 전환 ― 충격, 대응, 통합의 문명으로
徐 毅 植
[彙 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