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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22輯(2012.6.)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216

[論 文]
●百濟의 ‘率’系 官制 (金 正 賢)
1. 序言
2. ‘率’系 官名의 屬性
3. ‘率’系 官制의 始置
4. ‘率’系 官制의 運營
5. 結語

백제의 ‘率’系 관명은 고구려의 對盧, 신라의 大等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토착적 公務者를 국가의 신료로서 재편하는 가운데 마련된 관명이었다. 여기에는 종래 백제의 영역 기반이던 진국삼한의 ‘臣智’類에서 이어지는 전통이 계승되어 있었다. 그러나 종래의 臣智가 진왕에 臣屬하면서도 다소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독자성을 유지하던 것과 달리, 率의 경우는 集權化된 국가권력에 一元的으로 편제되어 실질적 官僚로서 기능하던 관명이었다. 그러한 성향은 먼저 좌평에게서 뚜렷이 나타났다. 좌평은 당초 ‘率’系 관제의 하나로 편제된 것으로서, 고조선 이후 북방 선진 사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相’類의 관직이었다. 고구려의 國相과 마찬가지로 이는 종래 ‘輔’類 官名을 계승하여 성립하였으며 그 職能面에 있어서도 국가의 업무를 일체 관장하고 있었다. 북방 사회에서 고조선의 相이나 부여의 大使는 모두 이러한 전통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率’系 관명은 좌평과 같은 역사적 상황에서 마련되었으나 초기에는 특정한 職任을 띠지 않고 관등처럼 운영되던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王權과 좌평 운영상의 변화에 맞물려 점차 좌평이 保持하던 직임을 대신하고 명실상부 국가와 왕의 臣僚ㆍ官僚로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백제 관명의 속성과 운영을 이해하고 보면, 백제가 古尒王代에 관제를 재편하고 律令을 마련할 수 있었던 배경을 알 수 있다. 곧 백제의 건국 주도 세력이 고조선 해체기까지 면면히 이어지던 북방계 사회의 역사 경험을 갖고 남하하였던 데다, 그 이전에 이미 남하하여 先住하고 있던 辰國 세력의 역사 경험 역시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이 그 까닭이었다. 고이왕대의 관제 개편은, 세력하의 수장층을 集權的 왕권을 전제로 幕僚化하는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의의가 있다. 더욱이 이것이 部制의 해체와 맞물려 있었다는 것은 이제 종래의 수장층은 국가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성립기반을 담보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국왕은 檐魯制의 확대 등을 통해 점차 이들 세력을 압박해갔으며 결국 ‘率’系 관명을 소지한 수장세력은 국가의 官僚로 완전히 바뀌어갔고, 그들의 세력기반이던 下戶 民들은 국왕의 齊民的 통치체제 속으로, 국왕을 정점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率’系 관제의 성립은 고대국가가 보다 集權性을 띠고 한 단계 一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국왕 잔치의 양상 및 왕권 (韓 政 洙)
1. 머리말
2. 공민왕 대 국왕 잔치 양상
3. 우왕~공양왕 대 국왕 잔치 양상
4. 국왕 잔치와 왕권
5. 맺음말

고려시대 국왕 잔치1)는팔관·연등회 및 원구의, 절일, 사신환영, 책봉 등 嘉慶을 맞아 군주가 군자, 백성과 함께 嘉會를 열어 和樂하는 자리였다. 이러한 국왕 잔치는 宴·曲宴·置酒·享 등의 君臣和樂과 酺·饗 등의 與民同樂의 자리로 분류되었다. 즉 왕조사회에서의 국왕 잔치는 결국 君臣의 의리와 장유의 질서를 도모하면서 和樂하는 자리로서 의미가 컸다. 말하자면 군신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국가질서 유지와 백성 교화의 자리로 주목되었으며, 왕권의 추이와도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2) 그런데 공민왕~공양왕 대에 이르기까지 14세기 후반기는 점차 원 간섭에서 벗어나는 시기이자 독자적 국가운영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시기였다. 부마제후국의 구조를 넘어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주목할 것은 사대부의 居敬窮理의 수양론과 함께 국왕에 대해 帝佛의 회복, 王覇兼用論과 君主聖學論이 제기되어 군주관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시기 원명교체기 속 국제질서와 영토 문제 및 홍건적과 왜구의 침탈 문제, 토지 탈점에 수반된 대농장 확대 문제, 잦은 반란에 따른 왕권의 약화 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속에서 더욱 부각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국왕 잔치의 자리도 변화가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국왕의 위상에 따라 잔치의 종류와 대상 등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왕 잔치에는 변질될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다. 국왕의 풍류와 시문에 대한 개인적 好惡, 정치에 대한 이해 양상, 집정자와 권신 등에 의한 국왕 지위 약화, 원과의 관계, 불교 관련 행사의 반영 등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면으로 인해 때로 국왕 잔치는 權門과 內官, 女謁 등과 연결되어 정치운영의 폐단 양상을 보여주거나 宴樂과 安逸 등 정치문란의 원인, 과다한 비용 소비로 인한 국가재정 약화의 원인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14세기 후반의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과연 국왕 잔치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공민왕~공양왕 대에 걸쳐 잔치의 양상을 정리함으로써 어떤 형태의 잔치가 주로 설행되었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국왕 잔치의 경우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 종류에 따라 잔치의 명칭을 달리하였고 이는 왕권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분석 자료를 토대로 이 시기 국왕 잔치에 나타난 문제와 함께 왕권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이는 결국 고려 말 국정운영과 왕권에 대한 다른 측면에서의 접근이라 할 수 있으며, 새로운 형태의 국왕 잔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본다.


●1833~34년 전라도 지역의 살옥 사건과 심리: 『완영일록』의 분석 (김 선 경)
1. 머리말
2. 완영일록의 사법기록
3. 관찰사의 살옥 심리
4. 관찰사의 사법기능
5. 맺음말

1833~34년 전라도 지역에서는 많은 살옥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 사건에 대한 정보는 당시 전라도 관찰사 서유구가 작성한 완영일록을 통해서 접할 수 있다. 완영일록은 서유구가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매일매일의 공무 가운데 중요한 사항을 기록해 놓은 일종의 관아 일기이다. 완영일록에는 살옥을 비롯한 사법 관련 기사가 매우 풍부하다. 다만 사건 기록을 모두 수록한 것이 아니라 지방군현의 보고를 받고 관찰사가 내린 지시나 관찰사가 중앙에 올린 보고만을 기록하여, 관찰사 서유구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한 사건 심리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1833년 4월부터 1834년 12월까지 서유구가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 중이던 1년 9개월간 전라도에서는 어떤 살옥이 발생했는가? 사건 심리가 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살옥은 발생한 것이 아니라 각 주체 즉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과 사법 기관에 의해서 구성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살옥이란 용어 자체가 살인 사건을 지칭하는 동시에 ‘살인 사건의 옥사’, 즉 ‘살인의 심리·재판’을 지칭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살옥의 구성에는 사법기관들과 관련자가 개입한다. 피해를 입고 입히는 사건의 당사자, 고발인, 증인, 이웃, 마을 사람, 사법 당국 등 살옥은 이들 각 주체의 감정, 행위, 판단이 사건에 개입되면서 구성된다. 그들의 감정과 행위, 판단은 일정한 의미구조에 기대고 있다. 사회구성원이나 사법기관은 자신이 체득하고 있는 의미구조 속에서 당면한 문제와 사건을 해석하고, 반응하고,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고 이익을 추구하며 사회질서를 유지한다. 전체 사회의 관점에서는 각 주체가 그들에게 할당된 사법적 기능을 적절히 수행하며 사법적 의미구조를 재생산해 낼 때 체제 안정이 유지될 것이다. 그동안의 판례연구 경향은 크게 보아서 첫째, 일정 시기의 사례를 대상으로 사건 유형을 통계 내어 그 시대의 사회적 갈등이나 범죄의 경향성을 밝힌 연구,1)둘째, 특정 성격의 사례들을 대상으로 사건 구성과 재판 과정을 자세히 분석하여 당대의 법 관념, 사회적 관계망,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연구,2)셋째, 사례 분석을 통해 사법제도를 해명하려는 연구로 나눌 수 있다.3)본인은 이들 경향이 복합된 연구, 즉 사건, 주체, 구조를 동시에 시야에 넣는 연구방법을 시도할 때 구조에 구속되면서도 사건 구성을 통해서 발언하는 주체의 행위를 포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판례연구를 통해서 사회의 각 주체가 사건을 구성하면서 사법적 의미구조를 원용하고 비틀며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포착하는 것이 본인의 기본적인 관심사이다. 본 연구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살옥 판례는 19세기 전반 전라도 관찰사 서유구가 심리를 관장한 사건들로서, 그가 해석하고 판단한 사건 심리 기록이다. 자료의 특성상, 살옥을 구성하는 다양한 주체 가운데서도 특히 살옥 심리를 주관하고 지휘하는 도 관찰사의 활동과 역할을 살펴보기 쉬우며, 다른 주체들의 행위도 관찰사의 활동과 연계하여 드러난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본 연구의 목표는 관찰사의 살옥 심리 과정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구성원들이 기대하는, 그리고 서유구가 담당하고자 한 관찰사의 사법기능을 해명하는 것으로 한정하였다. 이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우선 2장에서는 살옥을 포함한 완영일록의 사법 관련 기사를 개괄함으로써, 서유구가 전라도 관찰사로서 수행한 사법 활동 전반을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본다. 3장에서는 살옥을 심리 유형에 따라 소개함으로써, 여러 층위의 살옥이 가져오는 사회적 파장에 관찰사라는 사법 당국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파악한다. 4장에서는 개인들이 살옥을 구성하면서 기대하고 예견한 살옥 심리와 당시 전라도 관찰사 서유구가 실제로 담당한 사법적 역할을 살펴봄으로써 19세기 조선의 사법체계 속에서 관찰사에게 할당된 사법기능을 추론한다.


●일제 강점 말기 황국신민교육과 학교 경영 (金 正 仁)
1. 머리말
2. 황국신민교육의 형성 과정
3. 식민지형 국민교육으로서의 황국신민교육
4. 황국신민교육의 학교 경영 사례
5. 맺음말

이제껏 일제 강점 말기 황국신민교육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전시체제하의 총후보국을 위해 급조된 교육정책으로만 평가되어왔다. 본 연구는 황국신민교육이 일본 근대 교육의 기원으로부터, 가까이는 1930년대 이래 조선교육계의 흐름을 체계화․종합화하여 탄생한 식민지형 국민교육이라는 위상을 부여하고 이를 논증하고 있다. 황국신민교육이 공민교육과 일본주의 교육의 신민교육적인 요소에 군국주의 교육적 요소를 접목시켜 체계화한 식민지형 국민교육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본고는 황국신민교육이 구체적으로 학교 경영에 적용된 사례를 분석하고 있다. 황국신민교육이 공민교육과 일본주의교육에 입각한 학교 경영의 계보 위에 군국주의 교육적 요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학교 경영 체제를 재편하여 학교 문화 전반에 변화를 강제했다는 사실을 규명하고 있다. 이처럼 1930년대 이후 초등교육이 양적으로 국민교육화되는 과정과 맞물려 질적으로도 일본적 국민상의 구현이 강제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해방 이후 소학교로 개칭한 일본과 달리,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과연 일본인화를 위한 국민교육이었던 황국신민교육을 제대로 청산했는가의 문제를 반드시 짚어 볼 것을 요구한다. 황국신민교육과 이에 따른 학교 경영에서 역사교육은 국민과의 일환으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왔으므로 황국신민교육의 성격과 학교 경영을 분석한 본 연구가 이 시기 역사교육의 배경 전반을 이해하는 데 다소나마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五臺山圖』의 티벳 전파와 내륙아시아 불교세계 속에서 五臺山의 위상 (金 成 修)
1. 吐蕃은 왜 五臺山圖를 요청했을까?
2. 내륙아시아 불교 세계와 五臺山
3. 五臺山으로 가는 길: 河曲을 둘러싼 8세기 후반 唐吐蕃(푀첸보) 관계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문수와 관련된 중원의 주요 불교 성지로서 오대산의 성장 과정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五臺山圖가 제작되어 오대산 신앙의 확산과 함께 여러 지역으로 전래되었음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해석처럼 五臺山圖의 전래가 곧 ‘中華 문명의 주변 확산’으로 이해되는 데는 문제가 있으며, 이는 내륙아시아 불교 세계라는 보다 너른 시야 속에서 오대산을 바라봄으로써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를테면, 동몽골에서 고비를 넘어 남몽골과 중원을 넘나들며 16국과 북위를 건설했던 선비계 군주들은 하서 회랑과 장안, 평성, 낙양 등을 연결하는 황하의 상하류 지역에서 불교의 꽃을 피웠다. 여기에서 황하의 상류 지역은 몽골 초원과 청해, 티벳 고원으로 교통로가 직접 연결되는 곳이었으므로 하서회랑의 남북에 위치한 티벳과 몽골계 민족에게 불교가 전파되는 경로가 되기도 했다. 하서회랑을 통해 수입된 불교는 南朝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기도 하고, 海路를 통해 남조로 유입된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면서 상호 발전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선비계가 수용한 불교는 북방의 초원 지역과도 소통하며 유목 사회의 불교 전파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6∼9세기 몽골 초원의 패권을 장악했던 투르크(=突厥)나 위구르(=回鶻)의 경우에도 선비계 정권과 교류했음이 확인된다.


●인쇄술 도입기 파리의 서적상 앙투안 베라르와 역사서적 출판 (李 慧 旼)
1. 머리말
2. 15세기 후반 프랑스의 인쇄본 출판
3. 앙투안 베라르의 출판 전략
4. 베라르의 역사서적 출판
5. 맺음말

역사서적은 당대 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재해석 방법이나 역사 인식의 분석을 비롯해서, 이들의 현실 인식 및 현실에 대한 대응까지도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르네상스기의 ‘역사문화’에 대해서 기존의 사학사적인 연구에서는 주로 인문주의자들의 역사서술에만 주로 관심을 두어왔지만, 앙투안 베라르와 같은 인쇄술 도입기의 서적상인이 출판한 역사서적의 면모를 살펴봄으로써 15세기 후반의 ‘역사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초기 인쇄본 시대에 책을 구입하는 고객의 수는 필사본 시대에 비해서 50~100배 혹은 그 이상 증가하였다. 베라르는 이러한 고객들을 상대로 역사서적이나 문학작품등을 고급판과 염가판으로 분리하여 출판함으로써, 고객의 재력과 취향에 따라 책을 ‘개인화’시켜서 출판하였다. 이는 인쇄술이라는 근대적인 기술과 개별적인 주문생산을 하는 필사본의 생산논리가 결합된 형태의 출판방식이었다. 한편, 프랑스에서 역사서적 출판은 1490년대 이후에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이탈리아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라르가 출판한 역사서적들은 샤를 8세와 루이 12세의 이탈리아 원정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출판되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이탈리아를 환기시키는 고대사에 대한 관심과 자국의 역사(프랑스사)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샤를 8세의 ‘십자군’ 담론을 반영하는 이교도에 대한 전쟁사 등도 주요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앙투안 베라르가 출판한 역사서적에는 초기 인쇄본 자체가 그러한 것처럼 중세적인 문화와 근대적인 문화가 상호 교차하고 있다.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 스마트 혁명”에 의해 책과 텍스트에 대한 개념이 급속하게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책 문화의 전통과 기술적인 혁신이 동시에 공존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던 ‘초기 인쇄본’ 시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미국 노예서사의 자유 변주곡 (李 英 孝)
1. 머리말
2. 신앙과 동화의 서사
3. 저항과 분노의 서사
4. 절제와 설득의 서사
5. 맺음말

노예서사는 노예들이 “직접 체험자의 서사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서술”한 행위이며, 미국 흑인이 생산해 낸 최초의 독특한 문학 양식이다. 자서전을 쓰는 것은 독립적인 자기 정의 행위였으며 공적으로 자신을 자유인으로 공포하는 행위였다. 그것은 백인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기독교는 노예서사에서 자유와 정의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는 종교적 언어와 상징을 제공했고, 개종 경험과 교인들과의 연대는 노예들의 정신적 구원과 현실적 생존의 유용한 매개체이기도 했다. 이 글은 더글러스 자서전 이전의 19세기 초 미국 노예서사에 초점을 맞추어 특히 화이트(1810), 그라임스(1825), 프린스(1831), 그리고 로퍼(1837)의 자전기록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19세기 초의 개심서사는 백인사회와 제도 안에서의 신앙과 동화를 그리면서도 단순한 신앙찬가에 그치지 않고 흑인 설교자의 길을 추구하거나 독립된 흑인 교단을 설립하려는 노력을 기록했다. 노예도 백인과 같은 ‘구원의 대상’임을 밝히며 노예의 사회정치적 구원을 암시했다. 최초의 도망노예 서사인 그라임스의 자전 기록은 다른 노예 서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주관적인 감정 표현으로 절망과 분노, 도망과 폭력, 기독교 가르침의 위반과 같은 행위를 과감하게 기술했다. 이전 노예서사에서 정직하고 예의바른 과거노예의 이미지는, 감독관이나 주인의 명령과 체벌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며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으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양심적인 후회와 반성은 없으며, 그렇다고 도망노예를 노예제의 폭압에 맞서 승리한 ‘영웅’의 상징으로 그리는 낭만적 신화를 만들지도 않았다. 이후 프린스와 로퍼의 자전 기록은 ‘분노’와 ‘폭력’의 노예가 아닌 ‘온건’과 ‘절제’의 미덕을 보이는 도망 노예를 그린다. 노예로서 겪은 고통과 슬픔에 대한 토로 등 사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자제하고 사실과 상황의 전달에 주력한다. 미국 노예제반대 활동가들의 도움으로 출간된 이후 노예서사들도 독자 설득을 위한 전략 하에 노예제의 제도적 추악성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미국 노예서사의 시대별 특징과 흐름에 대한 이해는 중고등학교 역사교실에서 미국 역사 특히 노예제에 대한 학생들의 학습을 돕는데 유용할 것이다. 노예들이 직접 남긴 자전기록을 사료로 활용하여 노예들이 겪은 노예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전달함으로써 학생들이 노예제의 실상을 간접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書 評]
이영석 著,『공장의 역사: 근대 영국사회와 생산, 언어, 정치』, 푸른역사, 2012
(李 來 珠)

[彙 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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