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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23輯(2012.9.)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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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文]
●국외 역사교육의 ‘역사의식’ 연구동향과 그 시사점 (尹鍾弼 · 朴賢淑)
1. 머리말
2. 역사의식의 이론화
3. 역사의식 연구의 지평 확대
4. 맺음말

학생들은 역사를 왜 배우는가? 교사는 역사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어떠한 힘을 길러 줄 수 있는가? 등은 역사교육의 목적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 동안 그 위상이나 강조의 정도는 달랐지만, 역사의식은 역사교육의 목적으로서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식에 대해 국내 역사교육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초기의 연구는 1950년대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에 기초하여 역사의식의 내용을 발달시킨 일본학자들의 연구가 바탕이 되었다. 1990년 이전까지 국내 역사의식 연구에서는 사이토 히로시(斉藤博)가 정리한 ‘금석상위의식, 변천의식, 인과관계의식, 시대구조의식, 역사발전의식’이라는역사의식 발달단계가 주로 논의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역사의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다가, 2000년대 후반에 다시 역사의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역사의식에 대한 이론적 논의와 현장의 조사연구는 역사의식의 내용을 규정하고 이에 따른 학생들의 역사의식 발달수준을 가늠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사회과 통합논의나 역사학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과 같은 역사교육이 당면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생산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한편, 역사교육의 목적 설정과 관련하여 역사적 사고력 또한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역사적 사고력에 대한 논의는 1970년대에도 있었지만, 역사적 사고력이 역사교육의 목적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은 제 7차 교육과정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역사적 사고력’은 역사교육의 목적으로, 그리고 역사교육의 고유인지이론의 근거로서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고의 고유성 문제 등에 있어 역사적 사고력 역시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역사교육의 목적으로서 역사적 사고력이 갖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방향들이 모색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역사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연의 문제로 돌아와서 ‘역사의식’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역사의식’ 이론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국외의 연구동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 그로부터 국내 역사교육에 주는 시사점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국외 역사교육에서는 2004년에 피터 세이셔스(Peter Seixas)가 편집한 역사의식 이론화(Theorizing Historical Consciousness)가 출판되면서 역사의식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역사의식은 역사교육 연구자 사이에서 여전히 ‘역사 교수법의 주요한 범주’로 평가받고 있다.
국외의 역사의식 연구동향을 살펴보는 것은 국내의 역사의식 연구가 따라가야 할 하나의 모델로서 외국의 이론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국외의 역사의식 연구 또한 그 나라의 역사교육 환경 속에서 나온 산출물이며, 그 나름의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의식 연구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 국외의 역사교육 연구동향을 검토하는 것은 국내 역사의식 연구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새로운 논의의 場을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국사교육에서 조선시대사의 편제와 내용구성 (朴 平 植)
1. 서언
2. 현행 교육과정의 조선시대사 편제와 내용
3. 2011 개정 교육과정의 조선시대사 내용체계
4. 국사교육의 체계화와 조선시대사 내용 구성 문제
5. 결어

이 논문은 최근 거듭된 교육과정의 개편 과정에서 국사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조선시대사의 편제와 내용구성 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한 연구이다.
현행 2010 역사과 교육과정은 2007년 교육과정을 졸속으로 개편하여 마련되면서, 고등학교 ‘한국사’ 과목의 전근대사 영역 특히 조선시대사 교육의 부실을 가져왔고, 이는 이 교육과정의 내용체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개관단원으로 설정된 조선시대사가 근․현대사 영역이나 중학교의 전근대사 영역과 전혀 내용적으로 연계되지 않는 기형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2011 역사과 교육과정은 현행 2010 역사과 교육과정의 문제점을 그 편제와 내용구성 부문에서 상당 부분 조정 보완하는 형태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 교육과정 역시 그 내용체계에서 여전히 몇 가지의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다. 초등학교 국사교육에서 대폭 축소된 생활사 요소 문제, 계열성 차원에서 신분사 내용요소의 배치 문제, 고등학교 조선시대사 내용체계의 경제사 비중 축소 문제 등이 그것이다.
앞으로 초․중․고의 국사교육은 기본적으로 역사를 역사로서 교수하기 위해, 곧 인과의 체계 속에서 우리 역사를 ‘발전’의 논리로 구조화하는 형태로 그 내용요소를 구성하여야 하며, 이는 조선시대사의 내용체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같은 국사교육의 학교 급별 교수내용의 구체적 선정과 체계화를 위해서는 관련 국사학계와 역사교육 학자들 사이의 공조를 통한 방안 마련이 절실하다.


●캘리포니아 역사 표준시험에 대한 주 정부와 교사들의 상이한 시각 (金 裕 利)
1. 머리말
2. 역사 표준시험의 연혁과 내용
3. 주 정부의 역사 표준시험 활용
4. 역사 표준시험에 대한 교사들의 반응
5. 맺음말

한국에서 흔히 ‘일제고사’라고불리는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가 실시된 지 4년이 지났지만, 해마다 그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일제고사가 교사들의 교수학습 및 평가 방법의 개선이나 학생들의 학습능력 향상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하며, 오히려 시험 대비를 위해 교육과정이 파행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나아가 시험 결과의 공개에 따른 학교 및 교육청의 서열화나, 일제고사 대신 현장학습을 허가한 교사들에 대한 징계와 복직 등은 교육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다.
일제고사에 대한 문제제기는 주로 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최근 2012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일제고사를 ‘경쟁교육의 첨병’으로 규정하고, 일제고사 폐지를 위한 직접 행동을 결의하였다. 때마침 미국에서 학업성취도 평가를 위한 표준화된 시험(standardized testing)에 대한 반발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그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고조되었다. 혹자는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가, 아동의 낙오를 방지한다는 ‘No Child Left Behind(이하 NCLB)’ 법에 따른 주 단위의 표준화된 시험을 모방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NCLB 법에 따른 주 단위의 표준화된 시험은 각 주별로 제정된 표준서의 내용을 학생들이 얼마나 잘 학습하였는지 확인하기 위한 학업성취도 평가로서, 흔히 ‘표준서에 기반한 시험(Standards-based Testing, 이하 표준시험)’으로 불린다. 올해로 시행 10년째를 맞은 NCLB 법과 그에 따른 주 단위 표준시험은, 학교 및 교육구에 대한 성적책임제 시행의 주요 지표로 활용됨으로써 그 동안 커다란 논쟁의 와중에 있었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NCLB 법의 주요 내용과 그에 따른 주 단위 표준시험(영어, 수학, 과학)의 실시상황을 고찰한 바 있다. 특히 역사의 경우는 NCLB 법에 규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전역의 약 40% 지역에서 역사 표준시험이 실시되어 왔음을 확인하고 그 이유를 규명해 보았다.
본고에서는 캘리포니아의 주 단위 표준시험인 ‘캘리포니아 표준시험(California Standards Tests, CST)’을사례로 하여, 주 정부의 실시의도, 시험내용 및 결과의 활용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표준시험에 관한 정부 측의 기본 시각은 학교에 대한 성적책임제 시행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에 대한 교사들의 반응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역사 표준시험에 초점을 맞춰 캘리포니아 표준시험의 실시 및 활용 상황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역사 교사들의 시각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캘리포니아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역사중심의 사회과학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험의 명칭은 ‘캘리포니아 역사-사회과학 표준시험’이지만, 사회과학에 대한 내용은 없고, 역사에 대한 내용만 테스트하고 있다. 또 캘리포니아는 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15년 이상 꾸준히 역사 표준시험을 시행해왔기 때문에, 시험 문항의 내용뿐 아니라 준비과정과 시행결과 등 평가의 전 과정을 잘 보여준다. 2002년 NCLB 법의 시행 이후의 달라진 내용도 알 수 있다. 그 밖에 필자가 현재 캘리포니아에 체류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 교사들에 대한 인터뷰나 설문조사가 용이하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이다.
본고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캘리포니아 역사 표준시험의 연혁과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표준시험의 시행목적과 내용구성을 확인하고, 기출문항을 분석하여 주 정부가 요구하는 역사이해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지, 어떤 측면이 주로 강조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3장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정부가 역사 표준시험의 결과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NCLB 법 시행이후, 주 수준의 성적책임제와 연방차원의 성적책임제라는 이중구조 하에서 역사 표준시험의 결과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고찰할 것이다. 4장에서는 역사 표준시험에 대한 중등학교 역사 교사들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교사들은 역사 표준시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성적책임제와 관련하여 표준시험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또 시험의 결과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캘리포니아 소재 중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역사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의 내용을 활용할 것이다.
미국 정부가 주 단위 표준시험을 통해 학생의 성취도를 평가하고 그 결과를 공개하여 학교에 대한 성적책임제를 시행하고 있는 이유는, 학교에 대한 압력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통해 지역별 학교별로 학력을 평가하고 그 책임을 물음으로써 교육개혁을 이룩하겠다는 발상은 한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따라서 한국보다 앞서, 한국보다 강력하게 학업성취도 평가와 성적책임제를 연계시키고 있는 미국의 상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목민심서 연구: 통치기술의 관점에서 읽기 (김 선 경)
1. 머리말
2. 목민학의 위상
3. 통치기술
4. 새로운 정치 이념의 단서
5. 맺음말

목민심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고전의 하나이지만, 과연 고전으로서의 힘을 발휘하고 있을까? 목민심서의 고전으로서의 생명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목민심서를 독해하여 현재적 의미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본인은 목민심서를 조선후기 목민학의 전통 속에서 읽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목민심서를 조선후기 실천적 지적 활동의 흐름 가운데서 포착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글에서 주체, 글쓰기 방식, 체제, 구성요소 등의 측면에서 목민심서는 조선후기 목민학의 전통을 잇고 있음을 밝혔다. 하지만 정작 목민학의 성격을 깊이 있게 해명하는 가운데 목민심서의 위치를 설정하지는 못하였다.
목민학은 18세기 전반에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여 18세기 말, 19세기 전반에 활짝 꽃을 피웠다. 목민학을 지방관을 통치 주체로 설정하여 전개된 ‘지방 통치 이념 및 실천에 관한 지식 학술체계’로볼 때, 왜 이 시기 조선 사회에서 이와 같은 지방 통치학이 꽃을 피운 것일까? 이는 당시 조선 사회가 당면한 문제와 이에 대한 당대인의 문제 인식의 틀, 학문 관습 및 지식체계와 관련이 있을 것인데, 목민학 연구나 조선후기 경세학 일반에 관한 연구가 좀 더 심화하여야 제대로 답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목민학의 전통 속에서 읽는 것이 목민심서 읽기의 하나의 방법이라면, 목민심서를 깊이 있게 읽음으로써 목민학의 성격을 해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글은 목민심서 읽기의 또 다른 방법으로서 목민심서에 담긴 지방 통치기술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통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지만, 여기서는 푸코(Michel Foucault)가 제시한 통치성(governmentality)의 개념을 참조하여 사용하였다. 통치성은 푸코가 1977~78년 콜레쥬드프랑스에서 행한 강의에서 제기한 개념이다. 그는 ‘통치성’을 “이러한 지극히 복잡하지만 아주 특수한 형태의 권력을 행사케 해주는 제도·절차·분석·고찰·계측·전술의 총체”, 즉 통치기술(art of government)의 복합체로 규정하였다.
푸코가 말한 통치성 개념을 참조하여 목민심서의 통치기술을 분석할 때 갖게 되는 장점은, 정약용이 조선후기 지방관에게 구사하도록 권유하였던 다양한 ‘제도·절차·분석·고찰·계측·전술’을 통치기술로서 식별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그가 상정하고 있는 통치성의 시대성에 대한 고민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또 목민심서 속의 통치기술을 19세기 전반 조선 지방 사회라는 제한된 공간을 넘어서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함으로써, 목민심서를 오늘날의 문맥에서 읽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목민심서는 지방 통치의 장, 또는 통치 공간을 매우 두텁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두텁고 세밀한 묘사를 통해서 다른 목민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통치 계층 이외의 사람들의 시선과 말, 행위를 등장시킨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내가 민간에 있어서 잘 아는데’, ‘내가 민간에 20년을 있으면서 보았는데’와 같은 말을 자주 하였다. 그는 자신이 민간에 오래 있으면서 보게 된 풍경을 목민학에 적극 끌어들였다. 그가 민간에 오래 있음으로써 보게 된 풍경 속에는 吏·民의 시선, 언어, 행위, 욕망이 담겨 있었다. 정약용은 통치 계층 중심으로만 구성되었던 목민학의 세계에 吏·民의 시선, 언어, 행위, 욕망, 삶을 끌어들였다. 목민서는 원래 수령의 지방 통치를 위한 지침서로서 저자와 독자, 텍스트 내의 행위 주체가 같은 통치 계층이다. 따라서 지방 통치를 바라보는 통치 계층의 단일한 시선만이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제 지방 통치 공간에 수령 이외의 주체를 등장시킬 때, 곧 통치대상인 吏·民이 주시하고 말하고 행위를 하고 욕망하고 삶을 영위하는 존재로서 지방 통치 공간에 등장할 때, 목민학은 통치기술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준비를 갖추었다. 비로소 통치는 지배 예속을 넘어서 ‘인간들의 행위를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계산된 합리적 활동’으로서 구성될 수 있게 되었다.
목민심서에는 지방관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지방 사회의 구성원들, 즉 향리, 관예, 군졸, 향임, 면임, 토호, 대소민, 부민 등이 생동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지방관의 통치 대상이면서, 동시에 통치 과정을 담당하고, 궁극적으로는 통치 효과를 발현하고 누리며 평가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을 움직이는 방법은 형벌과 강압만이 아니라 그들의 願望에 소구하는 다양한 기술이 있다.
그들의 願望을 북돋고 疾苦를 보살피는 방식의 통치기술은 사회 제구성원이 원망의 주체이며 삶의 주체라는 점을 적극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야기하기 어렵다. 목민심서가 쓰인 19세기 초는 조선 사회에서 민이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주장하기 시작하는 시대이다. 이 주체 전환의 시기가 정약용의 목민학에는 어떻게 반영되어 있을까? 이 주체 전환의 시기에 정약용은 ‘吏民’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들의 주체화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려 하였는가? 지방 통치에서 ‘民’의 願望을 실현하고 疾苦를 보살피기 위해, ‘인구’와 事物을 어떻게 연계하여 배치하려고 하였는가?
이글의 목표는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제안한 통치기술을 해명하고, 또 이들 통치기술의 복합체를 ‘통치성’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할 때 정약용이 상정하였던 통치성은 어떤 시대성을 갖는 것일까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설정이 목민심서를 새롭게 이해하고, 나아가서 정약용의 목민학을 오늘날의 맥락으로 불러와 활용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경세학 내에서 목민학의 위치가 어떠할지 간략히 짚어보고, 3장에서는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제안하는 통치기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4장에서는 목민심서에 민을 주체로 하는 새로운 정치이념의 단초가 나타나는지 그 가능성을 타진한다.


●方言에서 外國語로: 근대 중국의 외국어 인식과 교육 (柳 鏞 泰)
1. 머리말
2. 외국어 호칭: 鬼話, 方言, 外國語
3. 외국어 학습의 동기: 돈벌이냐 관직이냐
4. 외국어 과잉교육 논쟁: 부강이냐 망국이냐
5. 맺음말

이 글은 근대 중국의 외국어 인식과 교육을 세 시기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여기서 외국어는 주로 영어이며 불어, 독어, 러시아어, 일본어가 포함된다. 1기(1840-1861)에는 국가가해 외국어 교육을 금지하였고 2기(1862-1901)에는 특수목적의 학교에서 제한적으로 가르쳤으며, 3기(1902-1949)에는 중등학교에서 필수과목으로 가르쳤다.
외국어를 누가 어떻게 얼마나 배울 것인지는 학습자의 처지와 필요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특수목적의 제한된 교육시기가 40년이나 되는 것은 근대외교에 소극적인 청조의 태도와 과거시험을 우선하는 사회풍조 때문이다. 3기에는 광범한 사회적 저항을 야기할 정도로 갑작스런 沒入政策을 취했다. 그러한 변화의 動因은 무엇보다 근대화, 곧 근대국가 체제 형성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정도와 연관돼 있었다.
같은 외국어 교육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중국의 自强과 富强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국 전통문화를 훼손하고 나아가 망국을 초래할 사악한 무기로 간주되었다. 양자 사이에 외국어 과잉교육(조기교육, 필수과목화, 일반과목도 영어로 강의)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서구문물 수용에 적극적인 개혁파들도 조기교육에 반대하여 ‘先中文 後西文’의 원칙을 내세웠다. 그럼에도 대외위기의 지속적 고조는 외국어 교육에 沒入하려는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중국인의 외국어에 대한 호칭은 1기에는 鬼話/番話였다가 2기에는 方言으로 바뀌었고 3기에 들어와서도 신해혁명 이후 비로소 외국어로 바뀌었다. 方言意識의 상대적 지속은 우선 사상의식면에서 中華와 대비된 四方의 언어를 방언이라 부르던 중화주의적 천하관이 작용한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언어생활 면에서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언어학적으로 볼 때 서로 다른 언어라 할 만큼 이질적인 복수의 언어가 중화제국의 팽창에 의해 한 국가 안에 포함된 제국적 현실 때문이다. 19세기 중엽 한국⋅일본에서도 서양어를 夷語/蠻語로 간주한 점은 마찬가지이나 방언으로 인식한 예는 없다는 점에서 이는 중국의 특징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이 언어적 제국의식의 이면에서 20세기 벽두부터 그와 상반된 듯 보이는 사회심리가 생겨났다. 외국어의 조기교육과 필수화에서 나아가 중문교사보다 영문교사에게 급료를 더 주고 일반과목도 영어로 강의하는 과잉교육을 낳았다. 이런 현상이 하필 ‘中華民國’과 ‘中華民族’처럼 국명/민족명에 ‘中華’를 앞세우기 시작한 시점에 등장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女國民’과 ‘國民之母’사이에서: 근대중국, 여자사범학교의 성립과 그 의미
(千 聖 林)
1. 문제제기
2. “책 읽는 여자는 유용하다”—여자사범교육론의 배경
3. 여자사범학교의 탄생
4. 맺음말

본고에서는 비록 중등교육 수준이기는 했지만 여성의 최고학부로서 탄생한 청말 여자사범학교를 대상으로 왜 여자교육이 사범교육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 즉 그 성립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교육 내용, 시대적 변천 등을 간략히 살펴본다. 지면상 기존의 연구에서 충분히 언급된 제도화 과정 및 장정의 내용은 간단히 처리할 것이며 시기적으로는 청말민초에 비중이 두어질 것이다. 이를 통해 여자사범교육이 중국근대교육사에서 차지하는 의미, 나아가 근현대 중국에서 여성과 국가의 관계맺기 방식 등을 구명해본다. 지난 10여 년 동안 국내외적으로 동아시아 국민국가형성에서 여성의 역할과 관련해 현모양처주의, 女國民사조, 國民之母, 여권 개념 등을 고찰한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연구자들 대부분이 현모양처주의와 국민지모 사조를 여국민사조 및 여권사조와 대립시켜 각각 보수와 진보 혹은 개혁파와 혁명파의 여성관으로 명확히 구분하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그 경계는 모호했다. 이 논문에서 살펴 볼 여자사범교육의 목표와 졸업 후 학생의 진로는 그러한 경계짓기의 문제점을 보여줄 것이다.


●‘로마공화정의 교사’ 리비우스와 역사의 모범사례(exemplum)
- 브루투스와 아우구스투스를 중심으로 - (金 悳 洙)
1. 서론
2. 로마사 서술의 시대적 배경
3. 하나의 모범사례(exemplum), 공화정의 창건자 브루투스
4. 또 하나의 모범사례(exemplum), 원수정의 창건자 아우구스투스
5. 결론

리비우스(Titus Livius, 기원전 59~기원후 17)의 연구자 중에 하나인 R. S. Conway (1864~1933)는 “로마의 국가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다른 누구보다도 리비우스에게 기인한다”라고 말한다.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에 정착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로물루스의 로마 건국 이후 자신이 살던 아우구스투스시대까지의 로마 역사를 쓴 리비우스가 후대에 끼친 영향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744년의 역사를 142권에 담은 로마사는 로마 시대 작품들 중에서 가장 방대한 책이다.
로마 공화정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가 리비우스는 기원전 59년에 당시 로마의 속주였던 북이탈리아의 도시 파타비움(Patavium, 이탈리아어로는 파도바)에서 출생했으며 40대 이전에는 고향 도시에서 교육받고 활동하다가 기원전 30년대에 로마에 왔고, 그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로마에서 보내며 로마사를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화정기의 역사 서술은, 폴리비오스, 카이사르, 살루스티우스 등에서 잘 보이듯이, 정무관직이나 군사 경험이 있는 정치 엘리트들의 몫이었고, 정치 군사 분야에서의 경험이 역사 서술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원로원의원을 지낸 적도, 군대를 지휘한 경험도 없었다. 또한 라틴 문학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와 같은 그 시대의 대문호들과 교류를 했다는 일화도 남아있지 않다. 후원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적으로 집필에 몰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재산은 있었던 것 같다. 로마사가 소수의 안목이 있는 독자들에게 암송되기는 했을 것이지만 그 책이 간행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그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는 기록도 없다. 요컨대 리비우스는 당시의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무명의 속주 출신 역사가의 한 사람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자세한 내막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리비우스가 아우구스투스 황가와 개인적 교분이 있었고, 나중에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Claudius, 기원전 10~기원후 54)를 가르치면서 역사를 쓰도록 고무했다는 것이다. 또한 폼페이우스에 대해서 리비우스가 아주 칭찬을 많이 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폼페이우스 지지자’라고 평가되면서도 결코 양자 사이에 우정이 손상되지는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특이한 경력을 가진 리비우스가 후대에 ‘로마공화정사의 경전(the canonical account of the Republic)’이된 대작 로마사를 쓰고 타키투스와 함께 로마 역사가를 대표하는 자리에 오르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리비우스의 생애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기였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로마사의 저술 동기와 그 의의를 평가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리비우스가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기원후 14)와 개인적 교분까지 있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와 그가 만들어 가던 신체제에 대해 리비우스의 평가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현대의 로마사가들은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는 당시 막 출범한 아우구스투스 체제의 선전자/지지자인가? 아니면 이미 파괴된 공화정 체제를 그리워하며 그것의 회복을 꿈꾸는 공화주의자인가? 이 양자 택일적인 질문은 19세기 중엽에 히폴리트 테인이 리비우스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 티투스 리비우스(Tite-Live, 1858)를 발표한 이래 최근까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의 견해를 요약하면 리비우스를 아우구스투스의 신체제를 찬양하며 일인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H. Bornecque, E. Burck, L. R. Taylor, R. Syme, J. Luce)와 몰락한 공화정을 아쉬워하며 아우구스투스에게 비판적인 공화주의자로 보는 견해(W. Weissenborn, H. Taine, M. Laistner, W. Hoffmann, P. Walsh, H. Peterson, A. L. Penna, R. von Haeling, M. Toher, E. Badien, J. Glucker, C. Kraus)로 대별된다. 물론 리비우스를 정치적으로 양 진영 어디에도 위치시킬 수 없다는 의견(Ladislaus Bolxhazy, Timothy Moore, Robert Ogilvie)도 있고, 양 진영의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관되게 유지된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루스(T. J. Luce)는 1977년 연구에서 리비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도덕 개혁, 평화의 실현, 신전들의 복원 등을 근거로 아우구스투스 지지 성향을 보였고, 그와 함께 개혁을 추진할 지도자들을 고대했다고 말했지만 13년 후의 연구에서는 리비우스가 아우구스투스를 공화정기의 위대한 로마인들 중에 최후의 최고의 명사로 믿었다고 보기는 의심스럽다고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사와 그 논거들을 모두 검토한 리들리(R. T. Ridley)가 잘 지적했듯이11)현존하는 35권의 로마사(기원전 291~220년까지의 기록이 소실되고, 그 뒤 기원전 167년까지의 내용이 담겨있다)는 전체의 1/4의 분량에 지나지 않고, 더욱이 기원전 1세기 후반과 특히 아우구스투스 당대 역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단편적인 후대의 진술을 가지고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체제에 대한 리비우스의 평가를 단언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리비우스가 처했던 당대의 정치상황 속에서 리비우스의 저술 배경과 의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수사학 학교 신설조치의 사회교육적 배경 (安 熙 惇)
1. 서언
2. 수사학 학교 신설과 재정 운영 방향
3. 신설조치의 교육적 배경
4. 제정 초기 수사학 교육의 사회적 역할
5. 결어

로마 제정기 교육 문제에 대한 로마 정부의 조치 중에서 주목이 되는 것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국고에서 봉급을 받는 수사학 교사직을 로마시에 두도록 한 조치이다. 교육과정의 구성과 진행 등 학교 운영에 국가가 통제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국가 재정에 의하여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국립대학’이 등장한 셈이다. 이 조치는 로마 당국이 교육 문제에 본격 개입한 첫 번째 조치라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른바 ‘네 황제의 해’라고 불린 기원후 69년에 벌어진 내란에서 최종 승자가 되어 새로운 황가를 열었다. 플라비우스 황가는 원수정체의 발전 과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국면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무엇보다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에 비교할 만한 ‘권위(auctoritas)’를 지니지 못하였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워놓은 가문의 ‘권위’와는 무관하였고 그 신분도 귀족이 아니라 미미한 기사신분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는 집권한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세워놓은 원수정체의 기본 틀을 계승하면서도, ‘人治’에서 ‘시스템’에 의한 통치 쪽으로 한걸음 다가서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69년 말에 제정된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권에 관한 법’은 그 대표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교육 문제는 각 가정에서 알아서 할 개인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공화정 후기 로마에 포로로 끌려온 폴리비오스가 로마 국가가 교육 문제에 무관심하다고 놀라면서 지적한 점과 폴리비오스의 지적을 반박하면서 조상의 교육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키케로의 태도는 이점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수사학 학교 신설조치 전후의 맥락을 살펴보면 로마 제정 초기 교육의 실상과 수사학 교육의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 조치에 대하여 마루는 “비록 로마시로 한정이 되어 있고, 그리스어 수사학 교사 일인과 라틴어 수사학 교사 일인 등 두 명의 교사직으로 한정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독창성을 인정할 만한 조치”라고 평가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로마 제정 초기 교육과 사회의 상호 관련성을 염두에 두면서 본 조치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겠다.


[批評論文]
●역사과 성취기준·성취수준 개발의 원리-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성취기준·성취수준 개발 연구를 중심으로- (朴振東·朴珠鉉·申恒秀)
1. 머리말
2. 성취기준 개발의 배경과 방향
3. 성취기준과 성취수준의 개발 원리
4. 행동 동사에 따른 성취수준 구분
5. 맺음말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 교육과정이 2011년 8월에 개정된 후, 이에 따라 교과서 개발과 적용이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역사과의 경우 새 교과서가 중학교에서는 2013학년도부터, 고등학교에서는 2014학년도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또한 중·고등학교 평가방식에서도 혁신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즉, 성취평가제가 도입되어 기존의 상대적 서열 중심의 규준참조평가에서 학생들이 성취해야 할 목표 중심의 준거참조평가로 바뀌고 있다.
종전에도 교육과정이 개정되면 국가수준의 성취기준 연구 개발이 후속되었지만, 성취평가제가 시행되면서 이전에 비해서 현장 적용성을 높이는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2011년 10월부터 2012년 8월까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교육과학기술부의 위탁을 받아 초·중·고등학교 성취기준과 성취수준, 예시평가도구를 개발하였으며, 이에 역사과도 연구를 수행하고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번 연구는 성취평가제의 시행을 위한 기초 자료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이전의 연구와 분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개발 범위는 초등학교 5~6학년군의 역사 내용, 중학교 역사, 고등학교 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 과목 등 역사과 교육과정 전체를 대상으로 성취기준과 성취수준, 예시평가도구를 개발하였다. 총론팀 주도의 개발 지침 및 일정의 진행,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선택과목을 일괄한 점, 학기 단위의 성취수준 예시,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2012년 연구학교 대상 현장 적합성 검토 시행 등이 종전 연구에 비해서 확장된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이번 연구에서 역사과 성취기준과 성취수준을 개발하면서 적용한 원리를 정리해서 역사교육 현장에서 성취기준과 성취수준을 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는 데 있다. 또한 이후 역사과 교육과정과 성취기준 개발에 필요한 기초 연구로 제시하려고 한다.


●미래세대를 위한 역사교육 - 2011년 한국사 교육과정 논쟁의 실상과 허상-
(池 秀 傑)
1. 머리말
2. Liberal Democracy와 자유민주주의
3. 한국현대사 서술체계와 ‘1948년 건국론’
4. 식민지 근대화 혹은 이식 근대론의 문제점
5. 맺음말

그동안 우리 사회의 ‘보수’들은 이른바 기억투쟁(역사투쟁) 과정에서 늘 수세를 면치 못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는 4월과 5월만 되면 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기억투쟁을 막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과거사 정리(진실 규명) 요구가 거세지자 보수진영의 이데올르그들은 기억투쟁에 대한 기존의 태도를 전면 수정했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 보인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수립 주체들의 반민족성, 반민주성, 반민중성 문제를 다룬 해방전후사의 인식 1-6(한길사, 1979-1989)은 ‘진보’들의 새로운 ‘집단(저항)기억 만들기 운동’의 교재로 활용하곤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 규정하며 집권에 성공한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집권과 동시에 공세적인 기억투쟁을 가속화했는데, 2005년 1월 교과서포럼이 창립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교과서포럼 측은 2006년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을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2008년에는 금성사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좌파적 역사인식을 담은 불온한 교과서’라 규정하면서 이른바 ‘대안교과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학계나 보수언론의 반발이 만만치 않자 2011년에는 일부 역사학자들을 영입하여 한국현대사학회를 창립한 뒤, 한국사 교육과정 개정논의에 개입하여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켰다.
교과서포럼이나 한국현대사학회가 근현대사 서술문제에 집요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교과서 발행제도(국정 혹은 검인정제)를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과서에 서술된 역사는 법률에 의해 보호되는 ‘국가 공인’의 지식이자 집단기억이기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교육과정을 미처 시행하기도 전인 2009년에 2007년에 만들어진 역사 관련 교육과정을 대폭적으로 개정하더니 2011년에는 여러 가지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역사 관련 교육과정(교육과학기술부 고시 제2011-361호)을 개정했다. 당시 정부는 국사편찬위원회 산하에 ‘역사교육과정개발정책연구위원회(위원장 오수창)’가 조직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위원장 이배용 국가브랜드위원장)’라는 옥상옥을 만듦으로써 교육과정 개정 논의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런 와중에서 한국현대사학회 측은 거의 ‘작전’ 차원의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다.
한국현대사학회가 2011년 한국사 교육과정에 무엇을 반영하고자 했는가는 이들이 △ 역사교육과정개발정책연구위원회 위원장 앞으로 보낸 「2011 역사교육과정 개정안에 대한 ‘한국현대사학회’의 건의안(2011년 7월 4일)」과 △ 교육과학기술부 명의로 국사편찬위원회에 발송된 「역사 교육과정 개정 시안」 △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의 「역사교육과정 개정(안) 수정 요구에 대한 검토의견」(2011년 7월 28일) 등에 자세하다. 첫 번째 문건의 요지는 △ “대한민국사를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과 발전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고, 또한 대한민국 국민의 시각에서 서술”해 달라는 것 △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명시해” 달라는 것 △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론과 더불어 “대한민국이 UN의 지원과 국제적 승인 하에 성립·출범하였음도 분명하게 배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 문건은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식 근대론)’을 포함한 다양한 수정 요구들을 ‘개정안’에 직접 첨삭·가필하는 형태로 새로운 시안을 작성한 것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수호론’, ‘1948년 건국론’,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 등이었다. 위의 세 가지 쟁점은 한국 근현대사의 기본 코드나 컨셉을 결정하는 주요한 논제이므로, 이에 대한 자신의 학문적 소신을 밝히는 것은 학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논쟁을 생산적으로 이끌어가려면 교수내용지식(pedagogical content knowledge)이나 교육과정 지식(curricular knowledge)은물론이고 한국사 교육과정의 서사틀이나 내용체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앞서 정리한 건의들을 교육과정에 반영하려면 일부 내용요소들만을 끼워넣기 식으로 수정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이들의 건의사항을 수용하는 경우 한국사 교육과정은 앞뒤가 맞지 않는 자가당착적인 서술이 많아지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수호론’, ‘1948년 건국론’, ‘식민지 근대화론’ 등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이러저러한 근거를 제시하며 논증하는 데 있지 않다. 교육과정이나 교과서는 자신의 학문적 소신과 성과를 담는 일반 저서와는 그 성격과 목적은 물론이고 서술방식 자체도 다르다. 이 글에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한 점은 첫째, 교육과정(교과서) 논쟁을 그에 걸맞게 진행시키려면 한국사 교육과정의 성격이나 목표, 내용체계나 내용요소 등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 둘째, 이런 노력이 결여되는 경우 의도와는 다르게 누더기식 교과서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셋째 생산적인 교육과정 논쟁을 위해서는 교육과정이나 교과내용지식 전문가와 현장교사들의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것 등이다.


●淸日戰爭 前後 일제의 戰爭 捏造와 일본 언론의 煽動 (金 泰 雄)
1. 序 言
2. 메이지 정부의 言論統制와 戰爭捏造
3. 일본 언론의 戰爭報道와 國民煽動
4. 餘 言

일본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제국주의로 성장하였다. 그 절정은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宣傳·煽動이 전쟁 수행의 핵심 수단으로서 지대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우선 메이지 정부는 전쟁을 날조하여 자국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대외 선전에도 열을 올려 영·미 등 서구 열강의 묵인 내지는 지원을 끌어냈다. 한편, 일본 언론 매체들은 메이지 정부의 요구에 맞추어 적극적으로 선전 활동에 가담하였다. 나아가 이들 언론 매체는 정부의 날조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고 자국 국민들을 호전 분위기로 몰아갔다.
日本 朝野의 이러한 전쟁 선전과 국민 선동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그 전형을 이루었다. 물론 청일전쟁 이전에도 메이지 정부와 언론 매체는 선전·선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처럼 거국적이고 일사불란한 가운데 호전 분위기를 이어가지는 못하였다. 반면에 러일전쟁에서는 정부가 일일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언론 스스로가 전쟁 선전과 국민 선동에 더욱더 열을 올릴 정도로 이미 자국민들에게 國家主義를 내면화하고 侵略主義를 정당화하는 작업의 선봉에 서 있었다.
이 글은 메이지 정부가 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어떻게 사실을 날조하고 언론을 통제하여 그들의 침략 목표를 실현하려 했는가를 추적하는 한편, 일본 언론 매체들은 어떻게 국가의 하위체계에 포섭되면서 메이지 정부의 선전도구로 전락하였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천황제 국가와 언론 매체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이다. 특히 이러한 선전 내용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僞史가 오늘날 일본사 교과서 서술에 영향을 끼쳐 동아시아 각국 국민들의 역사 인식에 경종을 울림으로써 역사 갈등의 소지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실상과 소재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이 글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여러 나라 관련 연구자들의 고민어린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큼을 밝힌다.


[書 評]
양호환 著,『역사교육의 입론과 구상』, 책과함께, 2012
(朴 珠 鉉)


[書 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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