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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24輯(2012.12.)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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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企劃論文: 국사교육의 안정화와 역사교육의 향방]
●현행 초등학교 사회과 역사 영역 내용 구성의 문제점
- 내용 분량과 생활사 서술의 문제를 중심으로 - (崔 柄 澤)
1. 머리말
2. 개정 교육과정에 나타난 학습 분량과 수준의 문제
3. 생활사 학습의 유의미성 문제
4. 맺음말

주지하는 바와 같이 초등학교 역사교육은 사회과 내에 편제된 하나의 영역으로 취급되고 있다. 역사교육이 사회과라는 교과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은 역사과 내용에 대한 학습자들의 학습 기회를 결과적으로 협소하게 만든다는 등의 점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지리, 일반사회 영역과 함께 사회과에 속해있기는 하지만 이들 각 영역이 내용상으로 완전한 통합을 이루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해방 직후 사회과라는 교과가 출발할 당시부터 논란이 된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 초등학교 학생들은 5학년 1학기와 2학기에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기존에는 6학년에서 한 학기 정도 역사를 다루도록 되어 있었으나 2007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5학년 1~2학기에 걸쳐 역사를 접하도록 바뀐 것이다.
2007 개정 교육과정이 발표될 당시에는 “학년별 교육 내용의 중복을 최소화하고 학습 분량을 적정화한다”는 취지 아래에서 학습 내용을 일부 조정하겠다는 언급이 있었다. 이 교육과정으로 정치사의 비중이 커지고 문화와 인물, 생활사 등 다각도로 역사를 학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한 학년 동안 배워야 할 학습량이 늘어나면서 학교 현장에서는 학생들이 역사 공부를 부담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최근 발표된 2009 개정 교육과정은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경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내용 구성을 개정할 것, 생활사와 문화사 중심의 교육과정 편성을 통해 흥미를 유발할 것이라는 등 그 대략의 방침을 제시하였다. 이하에서는 향후 초등학교 역사 학습 내용의 개선을 모색한다는 취지에서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만들어진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간단히 살피는 식으로 글을 전개하도록 하겠다.

●중학교 국사교육의 의미와 내용구성(金 漢 宗)
1. 머리말
2. 중학교 국사교육에 대한 비판의 검토
3. 중학교 국사교육 내용구성 연구
4. 중학교 국사교육의 방향
5. 맺음말

이 글은 중학교 국사교육의 의미를 살펴보고, 내용구성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중학교 국사교육을 둘러싼 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첫째는 국사교육의 내용선정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초․중․고등학교 중 중학교 단계에서 국사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열화의 문제였다. 중학교 국사교육은 이 두 가지 측면 모두 많은 비판을 받았다. 지나치게 많은 내용요소로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가중시켜 국사교육을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초․중․고등학교에서 비슷한 범위의 내용을 통사형식으로 되풀이하였다는 것이다. 교육과정이 개정될 때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향의 개편이 이루어졌음을 표방하였지만,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중학교 국사교육을 주제로 하는 연구들도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국사교육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은 채 구체적인 내용구성 자체만 언급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국사교육은 학생들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르는 국사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국사교육의 내용은 ‘실증’으로서 역사가 아니라 ‘의미’로서 역사가 되어야 한다. 중학교 국사교육을 정치사 중심의 통사로 구성한다는 방향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서 정치사는 ‘정치’라는 분야에만 한정된 좁은 의미의 개념이 아니라, 정치현상을 중심으로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정치사가 되어야 한다. 초․중․고등학교 국사교육이 비슷한 내용을 같은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현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중학교보다는 초등학교 국사교육을 통사 형태에서 탈피하여 주제나 토픽, 일화 중심으로 구성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중학교 국사교육의 내용은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중심으로 하는 내러티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사를 별도로 포함시키지 말고, 역사 흐름 속에서 정치적 변화와 관련지어 다루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 흐름의 단절을 피하고, 지나치게 많은 내용 요소 때문에 학생들이 역사 공부를 기피하는 현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또한 사료를 비롯한 각종 자료들도 역사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본문과 유기적으로 관련지어 서술해야 한다. 국가교육과정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나아가서는 대학교나 사회교육에서 접할 수 있는 한국사를 바탕으로 국사교육의 체계와 내용구성의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단원구성이나 구체적인 내용요소를 하나하나 제시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내용조직 속에서 학교급별이나 학년별로 다루어야 할 주제나 토픽, 또는 내용범주 정도를 제시하는 데 그쳐야 한다.

●2009 개정 역사 교육과정을 둘러싼 의사결정 구조의 亂脈과 개발 과정의 虛實
(金 泰 雄)
1. 序言
2. 역사 교육과정 意思決定의 構造와 亂脈相
3. ‘2009 개정 역사 敎育課程’ 개발 과정의 虛實
4. ‘2009 개정 역사 敎育課程’ 의사결정의 파행
5. 結語: 의사결정 구조의 개선 방향

2009 개정 시기에 개정된 교육과정 중 2011년 8월 9일에 고시된 ‘역사’ 교육과정은 여타 교과(목) 교육과정의 개정에 비해 언론계와 학계, 교육현장, 정치권으로부터 관련 위원회의 출범 이래 告示에 이르기까지 유달리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단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둘러싼 대립·갈등으로 인해 과거에 보였던 관심의 수준을 넘어 관련 위원회 운영의 파행, 위원들의 사퇴 및 각 단체의 성명전이 속출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이러한 대립·갈등을 배태한 원인의 근저에는 교육과정 개정 논의에 참여한 위원들 사이의 상이한 현실인식 및 역사관의 차이, 이해 관계의 대립 등이 깔려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러한 사태의 직접적인인 계기는 ‘사회과 교육과정심의회’까지 통과한 개정안의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한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로 줄임)의 결정 행위였다. 이는 의사결정구조의 본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반면에 이 와중에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던 ‘역사교육의 정상화’라는 과제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대신에 ‘민주주의냐 자유민주주의냐’라는 의제만 덩그러니 남아 학계와 정치권, 교육계·학계의 내부 갈등으로 번져갔으며 이 속에서 역사교육현장은 몹시 흔들렸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궁극적으로 ‘역사’ 교육과정의 권위와 신뢰를 더욱더 추락시켰을 뿐더러 현장에서 묵묵히 열심히 가르치는 역사교사들의 우려와 불안을 증폭시켰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의 절차와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어낸 제도적·사회적 요인을 과거 교육과정 제정 맥락 속에서 찬찬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갈등을 초래한 요인으로 한국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재래하는 이데올로기 공방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의사 결정 과정을 둘러싼 집단 간의 갈등에 못지않게 교육과정 최종 결정권이 교과부 장관에게 전부 위임되어 있다고 하는 제도적 요인과 함께 2003년에 도입된 수시개정체제의 문제점에서 비롯되었음을 직시해야 한다. 요컨대 본고에서는 2003년 수시개정체제의 도입 이후 교육과정 제정 절차 및 의사결정 구조의 난맥상이 ‘역사’ 교육과정을 둘러싼 이념·이해 갈등과 맞물려 교육 과정 제정에 미친 영향을 다루는 한편 2009 개정 역사 교육과정의 개발 과정을 통해 교육과정 의사결정의 허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끝으로 의사결정 구조의 이러한 난맥상에 비추어 이를 조금이나마 시정할 수 있는 개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論 文]

●역사 교육과정의 개정과 계열성 적용의 난맥(辛 素 然)
1. 서언
2. 역사 교육과정의 개정과 내용 선정 원칙
3. 역사 교육과정 내용 선정의 혼란 및 개선 방안
4. 결어

지금까지 역사 교육과정은 수업부담을 줄임으로써 학생들의 이해와 흥미를 돕는 교과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궁극적으로는 역사 교육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역사과목의 사회과 통합을 지향하는 흐름 속에서 이러한 이상적인 역사교육을 실현하기는 어려웠다. 국가․사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역사교육의 위상은 오히려 점차 약화되었다. 역사 교육과정의 계열성은 이러한 역사 교육의 이러한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으로 여겨졌다. 계열성은 본래 2차 교육과정의 개정총론에서 문서화되었다. 유사 과목 간에 단순하게 반복되는 학습 내용은 지양하고 교육의 일관성과 체계성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3차 국사 교육과정에서 계열성의 성격은 변화하였다. 국사 과목이 독립되자 학교 급별로 교육 내용의 반복을 피하여 과목 독립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함이었다. 이후 ‘초등학교는 생활사, 중학교는 정치사, 고등학교는 문화사 및 사상사’라는 내용 조직이 절대 원칙이 되었다. 7차 개정 교육과정 이후 역사교육의 계열성은 수준별 수업과 객관적인 성취기준 및 평가를 위해 더욱 중요해졌다. 계열성에 대한 이론적 체계는 더욱 견고해졌으며 2009개정 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교육과정 개정의 절대 기준이 되었다. 그렇지만 수십 년 간 교육과정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역사 과목의 처지는 개선되지 않았으며 계열성이 결여되었다는 지적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원인은 역사라는 학문적인 성격을 간과한 채 무리한 계열성을 주장한데 있었다. 과목 자체의 내용 선정 원칙은 필요하였으나 내용의 반복을 극도로 지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계열성은 학교 급별 교육 내용의 차별성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역사는 인간 생활의 총체로서 분절적이고 차별적으로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나 역사 교육과정의 개정 때마다 이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 결과 계열성을 구현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는 오히려 역사 교육과정의 개정 자체를 혼란스럽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무조건적인 내용의 차별화가 오히려 원칙 없는 편제개편과 학습량의 증가를 가져온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계열성의 본질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역사라는 학문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금껏 역사 과목에 대해서는 교과 내용의 반복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학문적 성격상 역사과목에서 내용의 중첩과 반복 학습은 마땅하다. 이러한 인식 하에 국가 수준 교육과정에서 학교 급별로 핵심적인 내용 요소를 제시한 후 지역 교육청과 학교에서 이를 토대로 자율적인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방안을 제안해보았다. 역사의 전체 범위에서 내용 요소를 선별하고 각각을 주제로 하여 완결된 단원을 구성하는 학습 방법이다. 구체적으로는 고등학교 단계의 최종적인 핵심 내용 요소를 기준으로 중학교, 초등학교의 순서로 상위 수준의 내용 요소를 배제해가는 방식이다. 내용 요소를 주제별로 구성하는 이러한 방식은 역사의 전체 범위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안들을 교육 내용으로 포괄하는데 가장 효율적이다. 또한 개별단원의 형태이므로 삭제형식을 통해 학교 급별로 수준에 맞는 교육 내용의 조직이 가능하다. 최종 단계에서 숙지해야할 내용을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학습 분량의 무분별한 확대를 막을 수 있다. 물론 이 방안은 지금까지의 내용 선정 원칙과는 현저히 다르다는 점에서 생소하다. 그러나 역사라는 학문의 성격을 이해하고 보다 유연하게 교육 내용을 선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역사 교육에 요구되었던 부담들이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역사교사 양성교육에서 ‘역사교육사’의 필요성과 내용 구성 방향
- 조선 후기 내용 구성을 중심으로 - (方 智 嫄)
1. 여는 글
2. ‘역사교육사’의 교육적 가치와 내용 구성 방향
3. ‘역사교육사’ 교재 구성 사례–조선 후기를 중심으로
4. 맺는 글

오늘날, 교육의 효율성과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교사에게 요구하는 업무 수행 능력은 매우 다양하다. 자신이 가르치는 교과에 대한 학문적 깊이는 기본에 속한다. 교과 수업이나 생활 지도를 위해 학생들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 지식과 적용 능력, 교육 행정적 의사결정 및 조직 관리 능력, 교육 현상에 대한 연구 능력,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학생 개개인을 배려하고 성장을 도우려는 희생적 자세 등을 요구한다. 이 모든 능력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은 역시 수업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각 교과의 교사교육 과정은 ‘수업 전문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역량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역사 교과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역사교사 양성 관련 연구들은 역사 수업 및 교재 제작 관련 교과목(예: 역사교과교재연구지도) 운영과 지도 방안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 때 ‘수업 전문가’의 자질에는 교육과정과 교과서 내용을 재구성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뿐 아니라 교사로서의 자기 발달을 추구하며 스스로 적합한 교수 스타일을 창출하는 능력도 포함된다. 한편, 최근에는 교육 현상의 정치사회적 성격에 주목하면서 교사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교육 개혁에서의 적극적 역할을 기대하기도 한다. 교사 스스로가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고 교육 개혁의 전망을 고민하면서 자신을 그 주체로 인식하려면 담당하는 교육 활동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갖추어야 한다. 자신이 담당하는 교과의 교육 활동이 교육 전체의 이념이나 목적의 영향을 받으며 각종 정책과 제도적 조건 속에서 이루진다는 점, 모든 교육 현상은 사회 현상의 일부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 등을 파악해야 한다. 학교 교육 활동에 영향을 주는 내적 외적 요인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교육 활동이 ‘실제로 수행되는 과정’ 및 그 정치사회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때, 교사들은 학교 안팎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교육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 교사양성 과정의 교직과목 중에 ‘교육사회학’, ‘교육철학 및 교육사’를 개설하고, 교과교육 영역의 ‘교과교육론’ 교수요목에 ‘교과교육의 역사적 배경’ 항목을 포함시킨 것은 이러한 필요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교육 전반의 역사적 흐름, 교과 교육의 역사적 배경과 추이에 대한 이해는 역사교사에게 더욱 중요하다. 역사교육은 전근대부터 오늘날까지 제도 교육의 주요 부분으로서 사회 구성원의 정체성 형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특히 근대 역사교육은 국민 형성을 위한 공교육 체제의 근간이었다. 사회 구성원의 정체성은 현존하는 사회 체제 유지는 물론 해당 사회가 추구하는 미래의 모습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시대나 국가를 막론하고 지배 세력은 역사교육을 적절히 이용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교사는 역사교육을 둘러싼 이러한 정치사회적 변수들을 직시하면서 당면한 역사교육의 현실을 학생들의 삶과 미래, 바람직한 사회 변화의 방향과 관련하여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역사교육론’ 등 교과교육 과목의 교육 내용 또는 교수요목에 ‘역사교육의 역사(이하 역사교육사)’가 가능한 한 체계적으로 포함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예비교사를 위한 역사교육사 교육 내용에 대한 본격적인 글은 찾기 어렵지만, 역사교육 연구에서 교육사 분야의 성과가 꾸준히 축적되어 왔고, 역사학의 여러 분야에서도 ‘역사교육사’ 구성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되는 연구 성과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여건에 비추어 볼 때, 예비 역사교사들을 위한 ‘역사교육사’ 구성 방안을 좀 더 적극적으로 마련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필요성을 기반으로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룸으로써 관련 연구의 진전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첫째, 역사교사 양성 과정의 교육 내용으로서 ‘역사교육사’의 교육적 가치를 논의하고, 이를 기초로 역사교육사 교육 내용의 범위와 구성 방향을 제안한다. 둘째, 현재 ‘역사교육사’ 교재로 활용되는 역사교육 개론서 내용을 교재 구성의 차원에서 검토하고 문제점을 정리한다. 셋째, 앞서 제안한 역사교육사 내용 구성 방향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역사교육사 교재 구성 사례를 제안한다.

●영화를 활용한 역사교육
- 「불을 찾아서」(1981)에 나타난 인류의 진화와 영화적 상상력을 중심으로 -
(崔 溶 讚)
1. 문제의식
2. 생물적 진화의 재구성과 역사의 경합
3. 진화하는 인간의 재발견과 시각적 구성
4. 불(火)의 상징성과 문화적 진화, 그리고 영상적 재현
5. 맺음말

이 글의 목적은 영화 「불을 찾아서」에 나타난 선사시대에 관한 상상된 이야기 속에서 영화를 활용한 역사교육이 다루어야 할 구체적인 학습 내용을 선별해 내는 데 놓여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이 영화가 선사시대에 관한 역사교육을 위한 적합한 도구인지의 여부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이 목적은 무엇보다도 영화에 나타난 상상된 과거의 독특한 재현 방식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달성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영화사가 로버트 로젠스톤(Robert A. Rosenstone)의 문제의식은 대단히 유효하다. 그는 역사 영화가 역사학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바를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역사의 경합, 둘째, 역사의 시각적 구성, 셋째, 역사의 영상적 재현이다. 로젠스톤이 제시한 이 세 가지 지점은 이 영화 속에 상상된 과거의 재현 방식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려 할 때에도 대단히 유용한 준거점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 글은 본문의 2장에서는 먼저 선사시대 진화의 역사에 관한 이 영화만의 특이한 재현 방식을 다룬다. 이 영화가 개봉된 1981년 당시 학계에서 정통으로 인정받고 있던 순차적 진화론과 영화 속에 재구성된 새로운 생물적 진화 이야기의 차이점에 주목하고, 영화적 상상력에 따라 재구성된 진화 이야기가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에 따라 영화가 상상해서 그려낸 선사시대가 단지 허구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이름의 사실과 맞닿을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3장에서는 이 영화가 다루는 핵심 주제인 문화적 진화의 다양한 주체들을 좀 더 상세하게 비교 분석해 보고자 한다. 정통 진화론에 입각해서 볼 때, 인류 진화의 주체는 항상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상정되어져 왔다. 그러나 장-자크 노 감독은 선사시대에 살았던 다양한 인간 존재들을 시각적으로 유형화해냄으로써 다양한 문화적 진화(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4장에서는 이 영화 속에 재현된 문화적 진화의 구체적인 양상에 주목하고 다양한 선사 문화들을 자세하게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특이하게도 역사학에서 기본 규칙으로 통하는 리얼리즘 원칙을 파기하고 상징적인 재현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즉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불(火)은 물리적 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전유하는 주체에 의해 상징적 차원으로 부상한다. 그에 따라 이 영화 속에 나타나는 불이 비추는 곳을 따라가 보면 선사시대에 진화하는 문화들의 다채로운 모습이 고스란히 포착될 수 있다.

●1945년 이전 仁川의 華僑敎育과 華僑社會
- 仁川華僑小學을 중심으로 -(宋 承 錫)
1. 머리말
2. 전통한학교육과 근대서구교육의 충돌과 절충 - 仁川華僑小學의 탄생
3. 학교운영을 둘러싼 同鄕幇 간의 대립
4. 식민정부와 화교학교
5. 맺음말

본 논문은 한국 최초의 화교학교인 仁川華僑小學의 탄생배경 및 그 변화의 궤적을 추적하고 이를 통해 화교교육이 화교사회의 내부질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핵심적 기능을 담당해왔음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화교는 해외이주민 가운데 가장 오랜 한반도 거주 역사를 지니고 있고 더군다나 집단거주 형태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민족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차이나타운(Chinatown)’이라는 집단공동체를 중심으로 한국인과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체계와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이렇듯 화교사회가 중국 고유의 전통적 가치체계를 보존하는 가운데 한국사회의 ‘특수집단’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 교육의 역할이 중요했다. 1945년 이전 조선에서의 화교교육과 화교사회의 연관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화교학교의 탄생은 중국의 전통적 관행과 질서를 고수하던 화교사회가 서구의 근대적 경험과 마주하게 되면서 시대적 흐름과 현실적 수요에 맞게 자신들의 공동체원리 및 문화적 정체성을 재구성한 결과이다. 둘째, 화교학교의 운영을 둘러싼 同鄕幇 간의 대립과 통합의 과정은 화교사회 내부의 세력교체를 상징하는 동시에 지방별로 차이가 있던 중국적 관행과 원리들이 異國이라는 새로운 공간 속에서 점차 현지화되고 동시에 ‘화교’라는 확대된 개념 안에서 통일되어가는 과정이다. 셋째, 화교학교에 대한 식민당국과 친일협력정권의 取締 및 介入은 화교사회로서는 위기였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즉, 화교사회가 화교학교의 자율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못함으로써 중국적 공동체 원리를 확대재생산하는데 일시적이나마 방해를 받았다는 점에서는 분명 위기였지만 반면에, 친일협력정권에 의한 학교의 증설 및 풍부한 재정적 지원은 결과론적으로 해방 이후 화교교육 및 화교학교의 발전에 필수적인 기본적 인프라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화교사회는 자신들의 공동체 원리 즉, 중국의 관습과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고 공동체의 내부적 결속을 다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화교교육은 그 유효한 수단이자 유일한 길이었다.

●『御定宋史筌』권8 「本紀·后妃」 체례개편의 목적
: 『季漢書』 계승을 통한 정통성의 강조(崔 해 별)
1. 머리말
2. “統位明矣”: 「義例」의 설명
3. “不可不以范史爲正”: 『後漢書』의 체례를 따라
4. 『季漢書』의 체례 모방을 통한 『春秋』의 계승
5. “統位明矣”의 실례: 「楊皇后本紀」를 중심으로
6. 맺음말

조선의 正祖가 주축이 되어 1791에 편찬 완성된『宋史筌』은 원대 편찬된 『宋史』를 改修한 것이다. 『송사전』은 『송사』를 개수할 때 방대한 편폭을 줄인 것 외에 체례에서 약간의 변형을 가했다. 체례 개편 중에서도 『송사』의 「후비전」을 「후비본기」로 개편한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후비본기」는 기전체에서도 극히 예외적인 것이며, 기전체 사서에서 체례가 가지는 중요성, 나아가 ‘본기’ 가 가지는 상징성을 고려할 때 이런 이례적 체례 개편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에 대한 연구가 상세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 논문에서는 『송사전』이 후비를 「본기」에 편입시킨 체례 개편이 분명 『송사전』 편찬의 전체 목적과 맞물려 있을 것이라 추정하며, ‘존주론’의 강화 또는 정통성 계승의 강조라는 『송사전』 편찬 목적의 실현에서 「후비본기」로의 체례 개편이 가지는 상징성이 무엇인지 고찰해 보았다. 『송사전』 편찬자들의 설명은 ‘정통과 지위를 명확히(統位明矣)’하기 위해, 『후한서』와 『계한서』를 따라 ‘乾坤’과 ‘陰陽’의 질서를 밝히고, 조정의 ‘內外’ 조화를 이루기 위해 「후비본기」를 두었다고 하였지만 이는 다분히 명분적 설명이다. ‘統位明矣’를 통해 그들이 이루고자 한 것은, ‘존주론’을 강조하여 명을 잇는 조선의 정통성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춘추』의 뜻을 이어 ‘존주대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18세기 후반 정조 및 그의 신하들은, 『춘추』의 뜻을 받아 ‘촉한정통론’을 견지하는 『계한서』의 체례를 모방하여, 『송사전』이 『계한서』의 종지를 계승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리고자 했다. 이 때「후비본기」의 체례 모방은 이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명분이 ‘統位明矣’였기에 ‘후비’의 위치에 대한 재정리를 빗대어 조선의 적통의 자리를 재확인하고, 조선이 명을 계승하는 것의 정당성을 알린 것이다. 이러한 목적과 가장 잘 부합하고 있는 「양황후본기」는 송 말 황실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양황후의 ‘忠’을 강조하며 ‘양숙비’를 ‘양황후’로 높이고, 또 ‘二帝’에 대한 예우 및 그들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계한서』종지의 계승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많은 연구자들은 17,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중화사상 구현을 ‘조선중화주의’, ‘중화계승의식’ 등으로 논의하며 명의 적통을 잇고자 하는 조선의 의지, 그 ‘주체화’의 과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중화를 잇는 조선의 정통성은 분명한 변형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변형을 가한 만큼 경계도 해야 했기에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정통으로서의 근거를 찾아야 했다. 「후비본기」의 설치는 『계한서』와 『송사전』을 이어주는, 그리하여 결국 『춘추』와『송사전』을 이어주는 끈의 한 축이었다. 결론적으로, 『송사전』「후비본기」로의 체례개편은 『춘추』의 뜻을 이어 ‘존주대의’를 내세우고, 조선의 “統位”를 밝힘으로써 조선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근거 모색의 결과였다. 본 연구는 정조 시대 편찬된 『송사전』의 분석을 통해 조선 후기 사상사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23정사’와 명대 다른 『송사』개수작과의 비교를 바탕으로, 『송사전』「후비본기」의 체례 개편 목적을 정조 시기 정치, 사상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했다는 점에 학술적 의의가 있다. 아울러 본 논문의 내용은 정조시기 이루어진 중국사서의 편찬 활동 및 조선 지식인들의 송사 인식 그리고 이에 반영된 조선 후기 사상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교육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레지스탕스의 역사와 기억: 1993년의 ‘장 물랭 사건’을 중심으로(李 龍 雨)
1. 머리말
2. 티에리 볼통의 『대모집』
3. 사건의 前史: 앙리 프르네의 ‘공산당 사람’
4. 지원군: 방송, 잡지, 역사가들
5. 경악에서 반론으로
6. 맺음말

프랑스 레지스탕스 영웅인 장 물랭이 소련 첩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언론인 티에리 볼통의 주장-1993년 2월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은 다니엘 코르디에와 비달-나케 그리고 여타의 많은 프랑스 역사가들의 체계적이고도 철저한 비판으로 인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볼통은 그가 사료를 찾은 곳의 정확한 위치도, 그 사료가 원본인지 사본인지도, 그가 그 사료를 직접 발견한 것인지, 누군가가 그에게 건네준 것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또한 볼통이 의존한 주요 사료들 가운데 하나인, 1946년 소련 첩보기관이 소련 첩자 레오폴트 트레퍼를 상대로 심문한 기록은 위조문서이거나 신빙성이 없었다. 볼통의 또 다른 주요 사료인 1940~41년의 ‘로뱅송 문서’는 장 물랭과 또 다른 소련 첩자인 앙리 로뱅송 사이의 접촉 사실을 전혀 입증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통의 장 물랭 소련첩자설은 적지 않은 프랑스인들에 의해 일시적이나마 받아들여졌는데 그 이유는 그 가정이 반공주의자, 지로주의자, 비시파 사이의 동맹을 반영하고, 1990년대 초가 1945년 이후 수십 년간 프랑스 사회를 지배해온 기억들, 즉 레지스탕스 기억, 드골주의 기억, 공산주의 기억이 퇴조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의 문제는 역사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독일강점기 프랑스의 최대 영웅인 장 물랭에 대한 평가와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본고는 역사교육상의 의미가 작지 않다고 하겠다.

[書 評]
마키하라 노리오 著, 박지영 譯, 『민권과 헌법』, 어문학사, 2012
(方 光 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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