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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04輯(2007.12.)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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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毅植, 新羅 ‘上代’ 葛文王의 冊封과 聖骨

1. 序 言
2. 王位繼承과 葛文王 冊封의 原理
3. 葛文王 冊封 範疇의 縮小와 聖骨
4. 聖骨 消滅 後의 葛文王
5. 結 語

王과의 혈연관계나 인척관계를 살피고 그 변화를 추적하는 방법으로는 葛文王의 실체를 파악하기가 곤란하다.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冊封 記事를 중심으로 當代의 왕위 계승 관계 및 정치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볼 때에만 그 실체에 접근할 수가 있다. 葛文王은 聖骨의 소멸과 함께 실질적으로 그 기능을 상실한 제도였으므로 특히 왕위 계승 자격의 변동 관계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 된다. 本考는 이 점에 유의하여 葛文王 관련 기록들이 含意하고 있는 바를 다각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이제 지금까지 살핀 내용을 요약함으로써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葛文王은 왕위계승권을 벗어나게 된 사람에게 주어 本人 및 直子에 한하여 왕위 계승의 자격을 유지하도록 하는 기능과 그 內外孫子 범위까지 왕실과 통혼할 자격을 부여하는 기능을 수행했던 제도이다. 이 제도는 直子에 대한 왕위 계승 원칙이 확립되던 儒理尼師今 때 國王의 直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왕위 계승 자격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당초 신라 건국에 참여했던 辰韓6國의 干 모두가 왕위 계승 자격을 가졌던 시기에는 갈문왕이라는 지위가 따로 필요가 없었으나, 儒理尼師今 대에 현왕의 직계 비속이 왕위를 세습하되 王壻도 王子와 마찬가지로 왕위 계승 자격을 갖는다는 원칙이 성립하자, 왕의 親子에 한정되지 않고 열려진 왕위 계승 체제에서 6部의 諸干을 정치적으로 결속할 필요성이 발생함에 따라 他姓에게도 잠재적이고 형식적인 왕위 계승 자격을 주게 되었고, 이것이 갈문왕 제도의 신설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 시기의 갈문왕은 실제로 왕위에 오른 예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王室의 정치적 후원자라는 의미가 강하였다. 따라서 新羅의 王子들은 거개가 정치적 동맹관계에 있는 갈문왕의 딸을 배우자로 맞는 것이 관행이었다. 尼師今期 갈문왕이 妃父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갈문왕은 시간이 지날수록 왕위계승권 소지자로서의 本義를 잃고, 마치 그 기능이 원래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가문의 표시였던 것처럼 구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訥祗가 自立하여 麻立干을 칭함에 따라 크게 변화하였다. 訥祗는 볼모로 나가 있다가 귀국한 두 아우의 도움으로 국가 권력 전반을 장악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신라에는 所屬部보다 血緣關係가 구심점을 이루는 새로운 정치 구도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형제에 대한 互惠와 近親婚을 통해 奈勿系의 連帶가 두드러지게 공고해지는 가운데, 이렇게 결속된 奈勿系 干들이 일반 骨族과 스스로를 차별화하여 ‘眞骨’을 칭하고 정치적 사회적 특권을 주장함으로써 독자적 신분층으로 성립해 나갔다. 이들 진골은 新羅王의 近親族임을 근거로 6部의 일반 干들과 구별되는 특권을 주장한 것이었으므로 신라왕을 더욱 절대적이고 神聖한 존재로 수식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現王과 그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聖骨’이라고 불러 신성시하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聖骨이 성립하게 된 것이었다.
성골은, 왕위계승 자격자를 일반 진골과 구분하는 신분 개념으로 쓰였지만 본원적으로는 자격의 의미가 강하였으므로, 王子라 할지라도 현실의 왕위계승 구도에서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면 이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신분이었다. 그러므로 성골에서 벗어나게 된 王叔 또는 王弟가 생길 경우에는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왕 또한 처신이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갈문왕 제도는 이러한 난처한 국면을 타개하는 유력한 방안으로 주목되고 활용되게 되었다. ‘中古’期에 王弟를 갈문왕에 책봉한 예가 많은 것은, 성골이 성립함에 따라 왕위 계승 자격이 現王의 親子·親孫에 한정되게 된 결과 혹시 발생할 수 있는 王統 絶滅의 위험을 모면하기 위한 방책으로, 성골에서 벗어나게 된 王弟에게 성골 신분을 유지하도록 하는 장치로서 갈문왕 제도를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尼師今期에 他姓에게까지 주어졌던 갈문왕은 麻立干期로 접어들면서 奈勿系로 그 책봉 대상이 한정되었으며, ‘中古’期로 접어들 즈음 성골이 성립하면서는 성골 신분에서 벗어나게 된 國王 近親을 이에 책봉하여 그 신분을 유지시켜 주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었다. 갈문왕에 책봉되는 대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범주가 축소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갈문왕의 실질적 성격 역시, 신라왕의 位號 改定 및 ‘干’層에서 眞骨로의 최고 지배세력 改編 過程과 맞물려 몇 차례 변화하였으며, 마침내 성골 신분을 유지하는 장치로 기능하기에 이르러는 성골이 소멸할 경우 함께 사라지고 말 처지에 직면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논의에 입각한다면 성골 王統이 단절된 眞德王 이후로는 갈문왕이 일체 보이지 말아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龍春과 忠恭을 갈문왕이라고 부른 두 건의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이 사례는 대립과 갈등 속에서 타협과 화해를 구한 신라 정치과정의 상징물일 뿐이며, 갈문왕 제도가 후대까지 존속했다거나 恒例的으로 追封大王을 갈문왕이라고도 불렀음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는 아니다.
龍春은 眞智王의 아들로서 父王이 폐위되지 않았다면 응당 왕위를 계승했을 성골이었으나 父王의 폐위와 함께 성골에서 벗어나고 만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金春秋가 왕위에 올랐다. 그렇지만 金春秋로서도 아버지를 伸寃하여 성골로 복귀시켜 줄 여건이 아니었다. 이미 성골의 절멸이 선언된 마당이기도 했거니와, 그가 즉위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眞智王의 폐위 사건에 직접 간접으로 연루된 사람들의 후예들에게 이 사안에 대한 不再理를 약속함으로써 가능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太宗武烈王 金春秋는 아버지를 大王에 추봉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金春秋의 추종 세력은 물론이고 그와 타협한 여타 진골 세력으로서도 기왕 왕위에 오른 金春秋의 親父를 어떻게든 예우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龍春을 갈문왕이라 부른 것은 呼稱으로써만이라도 그를 예우함이 國王에 대한 臣僚로서의 예의라고 여긴 결과였다.
한편 忠恭은 元聖王의 장자인 仁謙의 아들로서 4형제의 막내였는데, 세 형이 모두 왕위에 올랐으며 그 아들 역시 왕(閔哀王)이 되었던 인물이다. 정치적 위상으로 본다면 龍春에 비견할만한 사람이었던 셈이다. 閔哀王은 아버지를 大王에 추봉하였다. 그러나 忠恭을 갈문왕이라 불러 예우한 것은 閔哀王 때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이후 신라의 왕위는 忠恭系, 均貞系, 憲貞系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이어졌는데, 이 세 계열의 혈통은 景文王 때 서로 만나게 된다. 景文王의 자녀들은 세 혈통을 모두 이어받은 이들이었고, 이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景文王의 세 자녀가 모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세 정치세력을 하나로 결합하는 구심점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景文王은 그 동안 왕위를 둘러싸고 대립해오던 諸勢力을 화해시키고 통합하는 데 매우 적절한 위치에 있었고, 실제로 그 위치에 상응하는 조정 역할을 수행해달라는 輿望을 받았던 왕이었다고 사료된다. 呼稱으로만이라도 忠恭을 갈문왕이라 높여 부르는 정치적 타협과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바로 이 景文王 때였을 公算이 크다. 모든 追封大王을 으레 갈문왕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니었다.
葛文王 제도는 聖骨의 소멸과 함께 폐지되었다. 이 제도가 聖骨 신분을 유지시켜 주는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었던 데 따른 결과였다. 따라서 이를 專制王權의 확립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그리고 갈문왕 수여 대상은, 그 범주가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을 뿐, 대상 자체가 妃父에서 王父, 王弟로 변화했던 것은 아니다.

李鎭漢, 高麗時代 宋商 貿易의 再照明

1. 머리말
2. 高麗前期 宋商 무역과 國王
3. 武臣政權期 宋商 貿易과 武臣執政
4. 맺음말

고려시대 宋商의 貿易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兩國間의 무역이 번성하였음을 밝히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高麗史 高麗史節要의 자료에 근거한 통계를 통해 설명하므로써 송상과 고려사람들 사이의 무역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새로운 자료를 통해 그들의 무역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활발했음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송상은 顯宗대 이후 忠烈王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해 2-3척이 왔고, 商團의 수도 둘 이상인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고려 朝廷에서 제공한 客館 등에 장기간 머물며 무역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무역상의 여건으로 인해 고려인은 언제든지 禮成港과 개경의 객관 등지에서 그들과 무역을 할 수 있었으며, 貿易品은 송상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인들의 수요나 요구를 반영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송상과 권력에 대해 고찰하였다. 송상들은 그들의 안전한 무역을 보장받기 위해 고려 국왕을 알현하여 進獻을 하였고 八關會의 의식에 참여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국왕은 그들을 準使節로서 대우하고, 宋商들의 무역상 편의를 위해 객관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관계 이외에도 고려에 온 송상들은 가장 큰 貿易 相對인 국왕을 만나 가져온 것 가운데 진귀한 것을 바치고, 국왕이 주문한 물품을 가져다 주는 등 매매를 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있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송상들이 고려전기 최고의 권력자인 국왕의 보호를 받고자한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武臣政變이 일어난 뒤 권력이 국왕에서 무신들에게 넘어가게 되자 송상들로서는 武臣執政을 새로운 후원자로 찾았던 것 같다. 송상들은 전기와 마찬가지로 꾸준히 고려를 왕래했으나 高麗史 세가에 송상이 국왕에게 進獻한 기사가 거의 없고, 宋商이 포함된 사건에 빈번하게 무신집정이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사정을 알려준다. 고려전기에 고려 국왕은 송상을 통해 정치적 권위를 높이고, 경제적 이익까지 얻을 수 있었으나, 무신정권기 이후는 그러한 실익의 상당 부분이 무신집정에게 옮겨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鄭在貞, 조선총독부철도국장 大村卓一과 朝滿鐵道連結政策

1. 머리말
2. 大村卓一의 철도경력과 철도업적
3. 大村卓一의 ‘朝鮮開拓鐵道論’과 ‘조선철도12년계획’
4. 大村卓一의 朝滿鐵道連結構想과 ‘北鮮루트’의 정비
5. 맺음말

大村卓一(1872.2-1945.3)은 생애의 대부분을 홋카이도, 중국, 조선, 만주 등에서 철도를 경영하는 데 바쳤다. 그의 철도에 대한 집념과 능력은 일본정부와 철도업계의 신망을 받아 각 任地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 중에서도 조선총독부철도국장, 關東軍鐵道監督部長, 남만주철도주식회사총재 등은 화려한 경력이었다. 그는 철도가 국토의 개척과 개발을 선도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경제와 산업의 발전을 推動하는 觸媒라고 여기고, 철도야말로 국가건설의 基幹이자 國勢膨脹의 槓杆이라고 인식했다. 그는 開拓鐵道論을 信條로 삼고 일본제국의 邊方 任地에 새 철도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철도경영에 전력투구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 무한한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技術官僚로서는 드물게 수많은 강연과 저술을 통해 철도의 보급과 애호를 주장했다. 그의 별명이 ‘鐵道傳道師’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大村이 조선총독부철도국장으로서 이룩한 업적은 조선의 국경과 변경 지역을 관통하는 철도를 부설하고 만주-조선-일본을 짧은 거리로 연결하는 海陸의 교통망을 구축한 것이다. ‘조선철도12년계획’의 추진과 ‘北鮮루트’의 정비가 그것이다. 그가 關東軍과 滿鐵의 간부로 활약한 시기에는 만철이 동북조선의 철도와 항만을 一括하여 경영하기도 했다. 이것은 조선철도의 一貫 운영에는 障碍가 되는 측면도 있었지만, 일본제국이 만주-조선-일본을 연결하는 제3의 捷徑을 확보했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정책이었다.
大村의 ‘開拓鐵道論’과 그의 대륙철도경영에는 식민지철도의 또 다른 역할, 곧 억압과 수탈의 측면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따라서 그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철도를 공격하고 그와 관련된 일본인을 살해하는 것을 匪賊의 준동 정도로 인식했다. 大村은 조선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내선융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속셈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조선인을 이해하고 다독거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보건대, 大村은 일본제국의 대륙지배를 효율적으로 관철하는 수단으로서 조만철도연결을 모색하고, 또 그것의 실현을 위해 진력한 식민지 주재의 엘리트관료였다고 할 수 있다.


權亨鎭, “너도 역시 지도자(Führer)의 자녀야”: 나치즘의 젠더 이데올로기- 독일 소녀동맹(BDM)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며
2. ‘독일 소녀동맹’ 그 이전
3. ‘독일 소녀동맹’의 조직과 활동
4. ‘독일 소녀동맹’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기억
5. 마치며

본 논문은 독일 소녀동맹을 중심으로 나치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다음의 몇 가지 관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역사교육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여성들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독일의 나치시대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하는 목적에서 서술되었다. 또한 나치 독재 체제의 청소년 교육의 방식을 소개함으로써 역사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성 청소년 조직의 역사적ㆍ문화적ㆍ사회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서, ‘독일 소녀동맹’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음으로 ‘독일 소녀동맹’의 성립과 조직과 그에 따른 활동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히틀러 유겐트 내에서 소녀들의 위치와 나치의 청소년 정책에서 나타나는 성 담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나치체제의 정치적 목적, 인종정책, 교육ㆍ사회 정책ㆍ선전정책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독일 소녀동맹’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소녀동맹에 대한 기억을 살펴봄으로써 나치체제가 제시한 이상적인 여성상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아니면 거부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나치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전통과 근대를 나타내는 특징들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1차 대전 이후 독일 사회에서 민족과 가정이 소중하다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다시 강조되면서 소녀들에게도 미래의 주부가 되는 것이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인식이 강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당이 내세운 가치관도 이런 전통적 가치에 기초한다. 나치 시대 ‘독일 소녀동맹’을 통하여 독일의 소녀들은 전통적인 가치인 여성과 미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의식을 조직적으로 주입받았다. 그러나 나치 체제가 목적으로 한 전통적 가치의 부활과 유지만으로 많은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독일 소녀동맹’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소녀들을 묶고 있는 전통적인 제도, 즉 학교와 부모로부터 벗어나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시간과 활동이 소녀들을 유인하고, 외톨이로 남지 않으려는 소녀들의 사회적 심리도 작용하였다. 또한 ‘믿음과 아름다움’이 강조하였던 ‘능력 있는 독일의 소녀’와 자립적인 젊은 숙녀의 모습이라는 근대적 여성상도 소녀들을 불러 모으는데 일조 하였다. 이는 역사 교육에서 중요한 전통과 미래라는 개념이 어떻게 나치 체제에 의해 오용되는 지를 보여준다.
독재체제 속에서 성장하고 자란 청소년들도 역시 다양성과 자기 개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독일 소녀동맹’의 교훈이다. 또한 이를 통해 ‘근대성’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이중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국민의 생계와 복지를 국가가 최소한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근대국가의 역할이 나치정권으로 하여금 자유 없는 경제적 안정과 국민 복지를 가능하게 만들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교육에서도 유용한 사례로 이용되고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교육이 담지 해야 하는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에 본 논문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說 林

特 輯 : 2007년 개정 교육과정 ‘세계역사의 이해’의 특징과 내용 구성문제

陳在管, ‘세계역사의 이해’의 특징과 새로운 변화

1. 머리말
2. 우리나라 세계사 교육의 현황
3.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의 세계사 내용 외부 변화
4.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의 세계사 과목 내부 변화
5.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의 적용 일정
6. 맺음말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의 세계사 내용은 과거의 틀을 과감하게 벗어나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과거 교육과정의 고질적인 망라주의적 내용 구성을 벗어나 과감하게 주제 중심으로 구성함으로써 체중을 대폭 줄였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현장에서의 세계사 수업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누구나 세계사 학습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 필요성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막연한 중요성’은 학생들이 이 과목을 학습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불이익, 즉 잡다하고 수많은 역사 사실을 암기해야 하는 고통과 이를 토대로 시험을 치러야 하는 스트레스를 상쇄할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선택 과목으로 편제된 고등학교 2~3학년 학생들의 세계사 과목 선택률이 이를 잘 보여준다. 세계사도 수요자인 학생에게 다가가려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세계사 교육의 정상화(발전) 방향을 제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시대의 변화를 파악하고 이에 맞추어 변화하려는 시대감각에 민감해야 한다. 세계사의 위축은 단순히 구조적인 문제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사 교육의 위축은 새로운 시대임에도 전통적인 방식만을 고집하는 세계사 교육의 내용 구성이나 수업 방식이 세계사 교육의 효용성을 약화시키고, 수요자인 학생들로 하여금 세계사 과목을 외면하게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변화된 시대에 변화되지 않은 구태의연한 내용이나 수업 방식은 학생들에게 학습 부담만을 가중시키고, 결국 외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된다.
둘째, 세계사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탐구 능력과 같은 기능과, 세계를 보는 안목과 가치관을 함양하는 교과서 제작에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세계사의 백과사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세계 역사를 빠짐없이 담으려는 교과서가 아니라 세계 역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도하고 이를 스스로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며 세계 역사에 대한 안목을 길러줄 수 있는 교과서를 제작하여 공급해야 한다. 현장 교육에 대한 영향은 교육과정보다 교과서가 더 클 수 있다. 고시된 교육과정이라는 테두리 속이기는 하지만 세계사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셋째, 공통과정은 한국사와 세계사의 통합 및 연계, 선택과정은 분과와 심화라는 내용 체계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저학년일수록 통합적으로 교육하고 고학년이 될 수록 전문 분야로 분리하여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무조건 이에 따라야 된다는 생각도 잘못일 것이다. 공통과정은 한국사와 세계사의 통합 및 연계, 선택과정은 분과와 심화라는 편성 원칙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실천적 바탕이 마련되어야 한다.
넷째, 역사 교사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수업 및 평가 방법이 필요하다. 사실의 암기 여부를 묻는 평가 방법은 평가 문항 구성과 결과 산출의 편리성 때문에 유혹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암기 위주의 수업과 평가는 교사의 편리일 뿐이지 학생의 교육 측면에서는 부정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사를 포함한 연구자들의 치열한 노력과 연구 결과에 대한 공유가 필요하다.
다섯째, 학생들의 감각에 맞는 내용 구성과 수업 진행이 요청된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이 유일한 정보의 원천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 이외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보를 얻고 이를 통해 성장해 나간다. 그러나 학교를 통한 정보는 가장 정련되어 있고, 부작용을 최소화한 바람직한 정보로 학생들의 성장에 필수적인 가장 우수한 것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양질의 정보라도 학생들이 관심을 끌 만한 매력이 없다면 결국 사장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양질의 정보를 생산하고 확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학생들의 감각에 맞게 보급해야 한다.

鄭夏賢, ‘세계역사의 이해’의 내용 구성문제와 검토의견- 동양사 부분 -

1. 머리말
2. 동아시아 세계
3. 교류와 지역 세계의 변화
4. 중국 중심 시각의 문제
5. 남은 문제들

새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 집필 기준안의 공동 연구 작업이 올해 초에 있었고 그 연구 결과를 역사학대회에서 발표할 기회를 가졌는데 아래의 내용은 그 발표를 정리한 것이다. 작업 과정과 관련하여 미리 밝혀두어야 것이 있다.
우선 제목들을 보면 동양사, 서양사로 체제를 분리해 작업이 진행된 것처럼 보이나, 실은 단지 발표자의 전공이 어느 분야에 속하는가에 따라서 편의적으로 발표 주제를 정한 것이었다. 전공자들을 두루 망라할 수 없는 형편에서 제한된 인원만으로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어느 부분부터 어느 부분까지를 누가 분담한다 하는 식으로 정리한 때문인데, 다만 작업을 분담하는 과정에서 종래의 지역 구분 방식에 따른 문제점들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서아시아사의 경우로서 유럽사와의 관련성 때문에 서양사 전공자가 다루어야 할지, 아니면 전통적인 인식대로 동양사에서 다루어야 할지가 문제가 되었다.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적 지역 구분 방식의 한계와 문제점은 자주 거론되어 왔지만1)1차 교육과정에서부터 도입된 동서양의 구분이라는 관행은 지금까지도 쉽게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2)전통적인 동서양 분류의 틀을 깰 필요를 의식하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새 교육과정이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3)다만 변화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시대 구분이 명시되지 않아 발전 단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든가, 단원의 표제에서 강조되고 있는 특징만으로 여러 지역의 역사상을 일반화하기에는 무리라든가, 교류의 측면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이견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다음으로 지적해 둘 것은 기준안에 앞서 진행된 개정 교육과정 세부안과의 관계 문제이다. 일단 기준안은 교육과정을 보완하는 성격을 띠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연초까지만 해도 개정 교육과정의 세부안이 확정,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비공식적으로 구한 시안만을 참고하면서 개정 교육과정의 연구와는 별개로 연구를 진행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연구 결과가 교육과정을 구체화하는 형태로 되지 않았거니와, 주제들도 교육과정과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선정하였고 구체적인 서술 방향에 있어서 부분적으로는 시각차도 존재하게 되었다. 이 점은 기준안의 초안이 학계의 연구 성과라든가 시각을 반영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싶다. 연구를 진행하고 보고서를 제출하기까지의 과정에서도 제목을 기준안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권고안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약간의 혼선이 있었고, 보고서 제출시에는 일단 기준안으로 정리하였지만 권고안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는 참여자의 의견들이 있었다. 보고서 제출 이후 교육부와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초안의 내용이 대폭 축소될 수 밖에 없었지만, 연구의 방향이라든가 초안의 의도에 대해 밝혀두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여기에 소개하게 되었다.
초안 동양사 부분의 전체 내용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중국의 고대문명
2.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변화와 통일 제국의 등장
3. 제자백가의 경쟁과 유교의 지배이념화
4. 삼국 이래 중국의 분열과 동아시아 세계의 전개
5. 수당시기 중국의 재통일과 국제 관계의 재편
6. 불교·도교의 유행과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
7. 당송의 교체와 중국의 경제 발전
8. 중국의 사회 변화와 새로운 문화로의 전환
9. 북방민족의 중국 지배와 몽골제국
10. 중국 전통사회의 성숙: 명청시대의 정치와 사회
11. 명청시대 경제발전과 동아시아 교역
12. 일본의 고대국가
13. 막부 통치의 성립과 전개
14. 일본사회의 변천: 에도막부의 성립과 발전
15. 인도의 고대문명
16. 인도 종교의 발전과 고대 제국의 전개
17. 굽타의 힌두문화
18. 무굴제국과 힌두·이슬람 문화
19. 영국의 지배와 인도의 민족운동
20. 동남아시아의 형성과 근대적 발전
21. 이슬람의 성립과 팽창
22. 이슬람 세계의 사회와 문화
23. 티무르제국과 오스만제국
24. 근대 이전 동서의 교류
25. 서양의 충격과 개항
26. 중국의 근대화 운동: 개혁과 혁명
27. 일본의 근대화 운동: 메이지 유신
28. 20세기 중국의 혁명: 반제민족운동의 전개와 국민국가 건설의 과제
29. 20세기 일본의 팽창: 군국주의의 대두와 전쟁으로의 길
30. 아시아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의 전개
31. 오스만제국의 해체와 서아시아 각국의 근대화
32. 냉전체제 하의 아시아
33. 현대 중국의 세계4)

문화권별로 큰 틀을 짰는데, 우리나라에 인접한 국가들처럼 중요성이 인정될 때는 더 세부적으로 들어 가 국가별로 주제를 정하였다. 현대사의 경우에는 중요한 역사적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대상 지역을 광범위하게 확대하여 다룬 주제들이 눈에 뜨인다. 역사 전개가 全지구적으로 일체화되어 간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발표자가 분담한 내용, 그 중에서도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서술 방향에 대해 검토해 보겠다.

金昌成, ‘세계역사의 이해’의 내용 구성문제와 검토의견- 서양사 부분 -

1. 서 언
2. 세계사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추세
3. 개정안의 취지와 서양사 구성
4. 개정안 구성의 실제와 논거-서양고대사를 중심으로-
5. 결 어

몇 년전이다. 지방 사학회에서 포스트모던에 관하여 우리나라에서 앞서 가는 교수께서 발표하시고, 필자가 외람되이 질문자가 되었던 적이 있다. 3가지 질문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마지막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필자는 미안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쯤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문제를 천착하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 질문은 “그런 내용이 역사수업에 어떻게 반영되어야 합니까?” 였다.
이제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서 문헌을 조사하는 데, 최근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다. 평소에 존경하던 선배·동료·후배께서 참신하고 좋은 논문을 써 주신 탓이다. 중등학교나 평가원에 있는 선·후배로부터 세계사 교육에 관심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온 터라, 이제 그런 푸념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필자는 이제 이 공간을 빌어서 최근에 논의되는 세계사 교육의 방향과 개정안에 참여한 사람으로서의 기본 방향과 실제 서술의 방침을 제시하고, 여러 평자의 논의를 듣고자 한다.

書 評

金正仁, 李智媛 著, <한국근대문화사상사연구>, 혜안, 2007

鄭炳喆, 吳金成 著, <國法과 社會慣行-明淸時代 社會經濟史 硏究->,지식산업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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