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文
姜鮮珠, 역사교육에서 내용 선정 및 구성의 개념으로서 성별
1. 머리말
2. 여성사 연구 방법과 여성 관련 내용 선정 방안
3. 역사 교육과정과 교과서에서 여성 관련 내용 구성 방안
4. 맺음말
한 교과의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숙의’는 필수적인 절차이다. 숙의 과정에서는 그 교과를 학습하는 학생들의 요구, 사회적 요구와 함께 그 교과의 본질, 내용을 선정하는 시각, 원칙, 가정 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관련 기관이 교육과정 개정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 상태에서, 심층적으로 숙의되어야 할 문제가 숙의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무엇이 숙의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교과 차원의 구체적인 지침이 제시되지 않는 경우에, 숙의는 형식적인 수준의 ‘논쟁’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역사 교육과정 개발을 위한 ‘숙의’의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할 역사 지식의 본질, 중요한 내용을 선정하는데 전제되는 가정 등에 대한 기초적인 자료를 특히 ‘여성’, ‘성별’ 문제를 반영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제시하였다.
역사 교육과정은 대체로 역사학을 배경으로 그 논리에 충실하게 내용을 선정하고, 조직하여 왔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역사학, 특히 여성사 연구 방법론들이 전제하는 가정, 제시하는 중요한 지식 등을 분석하고, 그러한 방법론들이 역사 교육과정 구성에 적용될 경우, 여성/성별과 관련하여 어떤 지식이 채택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식이 전제하는 가정이 무엇인가를 검토하였다. 기본적으로 역사 연구 방법을 역사 교육과정 편성의 개념적 틀로 사용할 경우, 역사 연구 방법의 남성편향성 자체를 극복하지 않으면 여성사를 독립된 과목으로 다루지 않는 한 여성/성별이 유의미하게 역사교육에 반영될 수 있는 여지는 크지 않다. 특히 보편사적 시각, 구조사적 시각에서 역사 교육과정을 통사로 편성할 경우, 여성이나 성별 문제가 들어설 공간은 크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극단의 방안은 종래 역사 교육과정을 전폐하고, 성적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재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교육적이며 현실적인 방안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역사를 학습하는 학생들은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이 갖는 정체성은 다층적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그들 자신의 역사로 인식되고, 그들이 배우는 역사가 그들의 교양과 식견을 넓히는데, 그리고 사회를 이해하고, 그들이 부딪치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역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역사 교육과정에 학생들의 인구 구성과 그들이 속한 사회의 특징과 사회 변화가 반영되어야 한다. 이는 역사 교육과정에 기본적인 개념적 틀을 제공하였던 기존 역사학의 시각과 방법론에 대한 검토를 토대로, 학생과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는 새로운 교육과정의 개념적 틀을 만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양성평등에 대한 교육적 요구가 역사 교육과정에 유의미하게 반영되기 위해서는 역사 교육과정을 여성/성별의 관점에서 재편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종래와 같이 역사에서 여성을 ‘언급’하거나 ‘삽입’하는 방식을 넘어, 관점과 인식의 전환, 역사의 재정의 차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여성사를 독립시켜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의 개발이나, 성별을 내용 선정과 구성의 주요 개념으로 고려할 수 있는 성별 포괄 역사 교육과정을 구체화시키는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方智嫄, <국사> 서술형 평가 답안에 나타난 고등학생의 역사 이해 양상
- 조선 후기 신분 상승에 대한 서술형 답안 분석 -
1. 머리말
2. 평가 문항 구성과 분석 기준 설정
3. 답안 내용 분석 및 결과 정리
4. 맺음말
이 연구를 통해 얻게 된 결론 가운데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는 시점에서도 상당한 수의 학생들이 임진왜란과 18세기 말 사이에 존재하는 200년의 시간차를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군공을 통한 신분 상승이나 노비 해방 등 피지배층의 신분 상승을 위한 배경, 극적인 계기로 임진왜란을 연계시키는 경향이 매우 강하였다. 이는 학생들이 임진왜란이 지닌 역사적 의의와 영향을 매우 크게 인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이 조선 후기 사회상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향후 고등학교 교육과정이나 교과서 개발에서 학생들의 연대기적 사고나 시간 개념을 체계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장치의 마련이 요청된다.
그리고 평가 대상이었던 학생들 가운데 약 1/4정도가 자신들이 지닌 역사 지식을 활용하여 과거의 특정한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답안을 작성하라는 문항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 중의 약 1/3정도(전체 평가 대상의 10%)만이 역사 지식과 문제 해결을 위한 사고 모두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답안을 작성하였다. 이는 역사교육목표 영역에서 중요하게 논의되는 지적 기능, 탐구 기능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역사 수업 진행 과정에서 학생들의 지식과 역사적 문제 해결을 연계지은 활동을 좀 더 계획적으로 이루어질 때 역사적 소재를 활용한 다양한 글쓰기 활동이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趙成山, 18세기 洛論系 學脈의 변모양상 연구
1. 머리말
2. 17세기 후반~18세기 초 農淵 學脈의 면면과 특징
3. 18세기 중엽 李縡 學脈의 사상적 동향
4. 18세기 후반 金元行과 閔遇洙 學脈의 분화
5. 맺음말
초기 농연 학맥에서 형성된 낙론 학맥은 辛壬獄事, 庚申處分, 辛酉大訓, 乙亥獄事, 壬午禍變, 華陽書院廟庭碑 사건 등 많은 정치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호락논쟁과 함께 그 학맥․학풍의 성격을 달리해 갔다. 호락논쟁이 학술 논쟁에서 정치적인 영역으로 이동해 가면서 낙론 학맥도 중요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그 변화의 과정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김창협 학맥은 문학․성리학 분야에서 특장을 보였으며, 훗날 소론계에 가담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아직 학맥이 정형화되기 이전이라 상대적으로 다양한 면모들이 보였다. 김창흡 학맥도 문학․성리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신임옥사를 겪으면서 학풍이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는 사실이다. 신임옥사가 노론 학계에 끼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보수화 경향으로 인해 어유봉․박필주와 같이 소론과 관련되거나, 적극적인 반탕평론을 전개하지 않았던 인물들은 낙론 학맥을 계승하는 데 어려움을 가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연 문하에 직접 있지 않았던 이재가 학맥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재는 심성론에 있어서는 호론과 명확한 차이를 보였지만, 현실관에 있어서는 송시열의 그것을 계승하였으므로 호론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는 신임옥사 이후 의리론 일변도의 노론 학풍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점차 노론 의리가 정계에 관철되면서 의리론 일변도의 학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학문 경향들이 서서히 낙론계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재의 제자들은 대부분 의리론에 충실하였지만 그 안에서 제한적으로나마 경세론에 관심 갖는 이들도 등장하였다. 경세론에 대한 관심은 磻溪隨錄을 통해서 주로 표출되었다. 이것은 낙론계 학풍에 있어 작지만 중요한 변화였다.
18세기 후반 낙론계 학맥은 攻洪-扶洪의 갈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며 전개되었다. 1755년 乙亥獄事 이후 노론의 의리는 대부분 관철되면서 낙론 학계는 신임의리에서 일정 부분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학문 경향들이 등장하였다. 이는 당시 학맥의 분화를 설명하는 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낙론 학맥은 크게 김원행과 민우수 학맥으로 분화되었다. 김원행 학맥은 낙론 심성론을 고수하였고 부홍-시파적 입장에 가까웠다. 문하에는 홍대용이 이용후생학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박윤원은 보수적인 낙론 학맥을 대표하였다. 또한 황윤석 같은 지방의 인재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편, 민우수 학맥은 노론 의리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공홍-벽파적 성향을 띠었고 호론계와도 긴밀하게 연대하였다. 그들에게서 특징적인 것은 심성론에 있어서도 호론에 접근하는 모습을 띠었다는 점이다.
이상에서 18세기 낙론 학맥의 변모양상을 살펴보았다. 낙론 학맥은 일률적이지 않았으며 개개 인물들도 각기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낙론계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졌던 학문적, 정치적 맥락은 세밀히 살펴 볼 때 중요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호락논쟁 또한 각 시대마다 사회적 맥락이 달랐으며, 후대로 갈수록 정치적인 색채를 짙게 띠어갔다. 학맥의 변모양상을 살펴봄으로써 낙론계 인물들의 사상사적 위치도 좀더 선명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朴振東,日帝强占下(1920년대) 普通學校 6年制 昇格運動의 展開와 歸結
1. 序 言
2. 普通學校 增設과 6年制 昇格의 趨勢
3. 日帝 當局의 學校昇格 政策과 地方民과의 葛藤
4. 地方民의 6年制 學校 昇格運動의 實態
5. 結 語
1920년대에는 조선인의 정규학교에 의한 보통교육을 받고자 하는 요구가 증대하였고, 일제 당국도 보통학교를 확충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것은 교육령의 개정과 보통교육 확장계획(3면 1교, 1면 1교)에 의해 진행되었다. 교육령의 개정에 의해 보통학교 제도는 4년제에서 6년제로 연장되었으나 4년제도 병존하였다. 확장계획은 학교의 보급에 중점을 두어 4년 정도의 학교 신설에 치중하였다. 4년제 학교는 6년제 학교와는 교육과정에서도 차이가 있었고 무엇보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졸업자격에 미달하였으므로 학부형과 학생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것에서 보통학교 6년제 승격운동이 발생하였다.
본고는 1920년대 기설 보통학교의 6년제 승격의 추이와 승격운동의 실태에 대해서 통계를 활용하여 검토하고 신설과 승격의 상호관계를 당국과 운동의 주체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6년제 제도가 없었던 1921년 이전 설립학교군은 위치나 규모면에서 우위에 있어 대부분 1920년대 전반기에 승격되었으나, 설립시기가 늦은 학교는 상당수가 1930년대 후반에야 승격되었고, 승격이 지연된 학교는 규모나 시설, 재정면에서 열악한 면단위 소재의 보통학교였음을 밝혔다.
準據主義를 표방한 일제의 교육정책이 실제로는 민족차별과 동화의 도구로 작동한 것에 대해 조선인이 자력으로 수업연한을 승격시키려고 하자 일제 당국에게도 압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1920년대 전반기에는 기존의 학교를 6년제로 승격시켰다가, 후반기에는 학교 신설을 이유로 승격을 부인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 지방민의 승격운동이 활발한 곳을 중심으로 6년제로의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학교신설에도 조선인이 참여했지만, 승격에도 민원의 제기, 기부금 모집 등에서 유지와 면민이 참여하였고 신설과는 달리 기설학교의 승격문제였으므로 학교 당국과 학부형들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이를 상세히 분석함으로써 일제하 보통교육을 둘러싸고 면단위로 전개된 조선인의 승격운동의 실태를 규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가 추진하는 제도교육에 참여하여 식민교육에 호응하고 보완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타협적이라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가 추진한 보통교육이 예산 등의 문제로 지체되었다기보다는, 조선인에 대한 저열한 인식 때문에 차별적인 교육정책을 추진한 것이 본질이었다. 이러한 기저에서 볼 때에는 조선인이 스스로의 교육기회를 확대하는 추진력을 조직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길 또한 이것뿐이었다. 보통학교의 승격은 상급학교 진학 자격자를 확대하여 연쇄적으로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 설립과 승격을 자극하여 일제강점기 학교교육 전반을 저변에서부터 변동시킨 셈이었다.
그렇지만 이후 일제는 간이학교를 도입함으로써 조선인이 요구하는 수준에 미달하는 교육을 확장하였으며, 전시통제기에 이르러서 초등교육의 4년제가 소멸되고 대부분이 6년제가 되었지만, 이는 학령아동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보통교육에도 미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시동원을 위한 국민양성의 필요가 극대화된 결과였다.
金成修, 동아시아론의 전개와 역사 텍스트 속의 동아시아
1.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동아시아론의 대두
2. 中華를 통해 동아시아를 본다는 것
3. 동아시아 그 다원적 세계
4. 역사 텍스트 속의 동아시아
5. 맺음말-동아시아론과 역사 교육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세계화’라는 화두에 사회 모든 분야가 매진하는 형국이다. 따라서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자긍심을 키우고, 스스로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역사 교육 본연의 임무도 때로는 애국주의, 국수주의, 우파적 민족주의로 매도되고 있다. 기존의 우리 역사 교육이 안고 있었던 극복의 대상으로서의 사이비 민족주의와 역사 교육의 본질적인 성격으로서의 민족에 대한 이해는 분명 구분되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세계화 교육이 민족성의 존재와 발전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면 결국 주도권을 상실한 이질적 사회의 객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글의 목적은 세계화와 민족교육이라는 과제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역사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 시점에서 ‘동아시아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하는 점일 것이다. 서구 역사를 기준으로 한 시기 구분과 서구 중심적 사고의 양산을 지양하고자 하는 논의는 오리엔탈리즘의 논의를 통해 어느 정도 사회 각층의 공감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동아시아로의 시각 전환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해 지고는 있으나, 이것이 때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론으로 천착되면서 동아시아의 또 다른 중심론을 낳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유라시아 초원을 지배하던 북방 민족과 동아시아 농경 민족의 만남은 수․당대에 이르러 동아시아 문화권을 탄생시켰다. 그 후, 송과 고려, 일본, 요, 금, 원 등 아시아 각 왕조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상호 작용은 동아시아 세계의 모습을 다채롭게 하였다.58)
위의 인용문에서도 보이듯이, 우리 사회는 이미 다양한 문화의 존재 형태와 생산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학적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실천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간 동아시아론은 일본이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 말하듯이,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철저히 일본 자국사의 문제였다.59)이제 우리도 비슷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와는 다르지만 각 지역 사회의 자연스런 발전 방향을 어떤 기존의 왜곡된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세계관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주변의 공감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전근대에 다극화되어 있던 지역 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근대적 국민국가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를 다양한 지역 질서의 존재 속에서 해석하고, 이를 교육에 반영한다면 동아시아에 대한 수평적이며 동시에 수직적인 이해의 폭을 확대시킬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 동아시아론의 위치를 담론의 수준으로 치부하기에는 부족한 이유가 이런 점에 있지 않을까 한다.
鄭鉉栢. ‘여성사 쓰기’에 대한 (재)성찰
1. 문제의 제기
2. 그간의 역사 서술과 여성사의 딜레마
3. 여성사의 이론화와 그 쟁점
4. 여성사의 재구성을 위한 지점: ‘젠더화된 여성주체’의 발견
5. 마무리에 부쳐
거다 러너는 “지난 30년 동안 여성사는 [……] ‘선택적 망각’에 대한 하나의 교정책을 제시했다. 전부를 기억해야만 성차별주의, 계급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반유태주의 따위가 독초처럼 자라나는 체계, 왜곡과 반쪽의 진리만을 담고 있는 체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89)라고주장하였다. 러너가 보기에 기왕의 문화전쟁은 역사를 마치 제로섬 게임처럼 파악하였으나, 좀 더 새롭고 좀 더 포괄적인 역사를 추가할수록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지닌 완전성은 높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힘 있는 자들의 역사가 지닌 헤게모니를 위협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사의 제대로 된 정착은 잃어버린 여성들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사학의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성사는 지난 30여 년 동안 많은 성과를 거둔 만큼이나 많은 도전에 직면하였다. 여성사 연구의 양적 증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사는 역사학의 주변적인 위치에 머무르고 있다는 자괴감, 그래서 여성사의 이론화가 필요하고, 그를 통해 종국에는 역사학의 전체 개념틀을 문제 삼고 재개념화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던 것이다. 그럴수록 여성사는 여전히 여성과 관련된 역사의 공백을 채우는 작업에 매달리는 만큼이나 이론화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론화를 둘러싼 논쟁도 가속화되었다.
우선 페미니즘에서 시작된 젠더 범주가 인문·사회과학계에서 각광받는 분야로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그것의 여성사와의 관계성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포스트구조주의가 제기한 여성 내부의 ‘차이’문제도 끝없는 상대화로 치달았고, 이는 종국적으로 여성 범주 자체의 무의미성을 주장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또한 새로이 제기되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비서구권의 역사학과 여성사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마찬가지로 활발해지고 있는 남성사 연구와의 관계설정도 중요해졌다.
이 논문에서 이런 다양한 이론화의 문제에 시원한 해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글에서는 여성사의 핵심 쟁점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방안을 제안하였다. 섹스/젠더체계의 엄격한 분리시도를 넘어설 뿐 아니라, 젠더연구가 빠지기 쉬운 보편주의적 접근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성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고 젠더를 역사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젠더범주가 여성주체의 존재를 적절히 해명하지 못하는 한계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젠더화된 여성주체’의 형성과정에 주목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젠더범주의 유용성을 적극 활용해야겠지만, 여성사를 젠더사로 전환하는 시도는 아직은 시기상조임을 밝힌 바 있다. 남성중심적 역사서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젠더사의 강조가 자칫 중립화로 오인되면서, 페미니즘 역사서술의 문제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와 관련해서는 기왕의 여성사 연구가 제1세계/백인/중산층여성에 치중하였음을 비판하였으나, 차이의 역사화 과정에서 차이의 강조가 해체주의로 치닫는 과정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 대안으로 과거의 보편주의가 지닌 폐해를 극복해야하나, 끝없는 상대화보다는 ‘차이를 통한 전체사의 구성’을 제안하였다. 권력과 지배 그리고 헤게모니의 다층적 구조를 파악하고, 차이에 못지 않게 공통점을 발견해내고, 이를 통해 젠더, 계급, 인종이 함께 작동하는 지배의 연동체제를 구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비서구사회의 역사학은 새로운 개념틀과 재구성의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체 역사학의 구조 자체가 요동하는 만큼이나,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이나 흑인페미니즘 연구에 자극 받은 여성사연구도 온전한 지역사 재구성의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간 비서구사회의 여성사 쓰기는 제국주의 지배/피지배관계나 포스트식민주의의 문제의식에 집중하였으나, 이 글에서는 그러한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또 다른 유형, 선별적인 서구화를 시도한 중간유형으로 한국의 여성사를 분석해볼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는 위에서 제기한 이론적인 쟁점을 토대로 여성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지점을 제안하였다. 젠더화된 주체의 발견의 장소로 생산활동에서의 여성의 역할, 가족속에서의 중심적 역할, 저항주체로서의 여성, 가해자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서 역사 속에 여성주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역사는 완결된 이야기이기 보다는 끊임없이 형성되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여성사도 예외는 아니다. 이 글에서 시도한 이론화 작업과 젠더화된 여성주체의 재구성의 시도도 이런 과정의 일부이다. 이런 논의가 한국여성사의 서술의 완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 바란다. 과거와 의미 있는 연관성을 가지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역사가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安相俊.중세 말 쾰른 시의 지배계층과 자치정부
1. 머리말
2. 참사회헌정과 자치권 획득
3. 참사회 지배독점과 도시의 내분
4. 1396년 ‘동맹합의규정’과 가펠참사회
5. 맺음말
쾰른의 최초 자치기관은 배심원단이었다. 원래 배심원은 도시영주인 쾰른대주교의 법정관리였다. 12세기 도시의 유력자들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사적인 부자모임을 조직하여 공적인 임무까지 수행했다. 이들 기관이 도시 각 구역의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시민을 대변한다기보다 대주교의 그늘에서 그들의 권리수호기구였다. 13세기 초에 전체 시민을 대표하는 참사회가 등장했고, 기존의 유력가문들은 참사회까지 장악하면서 대주교와 갈등을 불사하고 자신들과 시민의 권익을 지켜냈다. 1258년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중재한 ‘대결별’은 이제 대주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참사회의 법적 권한을 승인하는 절차였다. 유력가문의 참사회지배가 경제적 영역에서 성장하는 신흥엘리트들의 불만을 자극하고 있었지만, 13세기 말 시민들은 영방제후와 연합하여 대주교의 지배권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주교의 퇴장은 도시의 평화를 보장하지 못했다. 시민들은 참사회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유력가문의 지배독점에 맞서 신흥 경제엘리트들이 정치적 참여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시민이 폭넓게 참여하는 대참사회를 거점으로 유력가문이 장악한 소참사회의 위상을 흔들어 놓았다.
1370년 직물업자들은 유력가문의 지배를 극복하고 독자적인 지배체제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뚜렷한 비전이 없던 직물업자체제는 곧 와해되었다. 주도권을 되찾았지만 유력가문의 내분은 이미 유력가문 독점체제의 종말을 예고했다. 1390년대 파벌로 갈린 유력가문 연대는 1396년 가펠을 토대로 성립된 새로운 체제로 대체되었다. 정치적 동업조합(politische Zunft)이라 할 수 있는 가펠은 서약에 기초하여 조직된 수평적 연대체로서 다양한 직업군이 합종연합하는 정치적 구성체의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가문과 혈연유대를 배경으로 참사회를 장악했던 유력가문 지배체제와 달리 가펠지배체제는 동업조합의 연대를 배경으로 참사회를 장악하는 보다 개방된 지배체제였다.65)그런 만큼 느슨했고 유력가문을 완전히 배제하지도 못했다.
문제는 참사회의 본질적인 속성에 있었다. 모든 직종의 조합원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였지만 현실적으로 참사회 활동은 일부 집단과 동업조합에게만 가능했다. 이른바 베버가 말하는 무보수 명예직의 유산계층에 의한 독점현상이다(Abkömmlichkeit). 명예직의 업무량은 엄청났고 갈수록 전문성을 요구했다. ‘공익’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좋은 정부는 지극히 중세적인 기준에서만 옳다.66)중세도시의 사회구조는 이미 재산과 신분을 기준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 위에 구축되었다. 참사회 소속감은 사회적 지위를 의미했고, 계층적 위화감을 조성했다. 1396년 위기는 이미 예고되었던 사건이었고, 한 세기가 지난 후 1513년에 개정된 동맹합의규정이 작성되는 악순환은 도시사회의 내재된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彙報
姜鮮珠, 역사교육에서 내용 선정 및 구성의 개념으로서 성별
1. 머리말
2. 여성사 연구 방법과 여성 관련 내용 선정 방안
3. 역사 교육과정과 교과서에서 여성 관련 내용 구성 방안
4. 맺음말
한 교과의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숙의’는 필수적인 절차이다. 숙의 과정에서는 그 교과를 학습하는 학생들의 요구, 사회적 요구와 함께 그 교과의 본질, 내용을 선정하는 시각, 원칙, 가정 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관련 기관이 교육과정 개정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 상태에서, 심층적으로 숙의되어야 할 문제가 숙의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무엇이 숙의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교과 차원의 구체적인 지침이 제시되지 않는 경우에, 숙의는 형식적인 수준의 ‘논쟁’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역사 교육과정 개발을 위한 ‘숙의’의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할 역사 지식의 본질, 중요한 내용을 선정하는데 전제되는 가정 등에 대한 기초적인 자료를 특히 ‘여성’, ‘성별’ 문제를 반영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제시하였다.
역사 교육과정은 대체로 역사학을 배경으로 그 논리에 충실하게 내용을 선정하고, 조직하여 왔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역사학, 특히 여성사 연구 방법론들이 전제하는 가정, 제시하는 중요한 지식 등을 분석하고, 그러한 방법론들이 역사 교육과정 구성에 적용될 경우, 여성/성별과 관련하여 어떤 지식이 채택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식이 전제하는 가정이 무엇인가를 검토하였다. 기본적으로 역사 연구 방법을 역사 교육과정 편성의 개념적 틀로 사용할 경우, 역사 연구 방법의 남성편향성 자체를 극복하지 않으면 여성사를 독립된 과목으로 다루지 않는 한 여성/성별이 유의미하게 역사교육에 반영될 수 있는 여지는 크지 않다. 특히 보편사적 시각, 구조사적 시각에서 역사 교육과정을 통사로 편성할 경우, 여성이나 성별 문제가 들어설 공간은 크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극단의 방안은 종래 역사 교육과정을 전폐하고, 성적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재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교육적이며 현실적인 방안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역사를 학습하는 학생들은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이 갖는 정체성은 다층적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그들 자신의 역사로 인식되고, 그들이 배우는 역사가 그들의 교양과 식견을 넓히는데, 그리고 사회를 이해하고, 그들이 부딪치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역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역사 교육과정에 학생들의 인구 구성과 그들이 속한 사회의 특징과 사회 변화가 반영되어야 한다. 이는 역사 교육과정에 기본적인 개념적 틀을 제공하였던 기존 역사학의 시각과 방법론에 대한 검토를 토대로, 학생과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는 새로운 교육과정의 개념적 틀을 만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양성평등에 대한 교육적 요구가 역사 교육과정에 유의미하게 반영되기 위해서는 역사 교육과정을 여성/성별의 관점에서 재편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종래와 같이 역사에서 여성을 ‘언급’하거나 ‘삽입’하는 방식을 넘어, 관점과 인식의 전환, 역사의 재정의 차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여성사를 독립시켜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의 개발이나, 성별을 내용 선정과 구성의 주요 개념으로 고려할 수 있는 성별 포괄 역사 교육과정을 구체화시키는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方智嫄, <국사> 서술형 평가 답안에 나타난 고등학생의 역사 이해 양상
- 조선 후기 신분 상승에 대한 서술형 답안 분석 -
1. 머리말
2. 평가 문항 구성과 분석 기준 설정
3. 답안 내용 분석 및 결과 정리
4. 맺음말
이 연구를 통해 얻게 된 결론 가운데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는 시점에서도 상당한 수의 학생들이 임진왜란과 18세기 말 사이에 존재하는 200년의 시간차를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군공을 통한 신분 상승이나 노비 해방 등 피지배층의 신분 상승을 위한 배경, 극적인 계기로 임진왜란을 연계시키는 경향이 매우 강하였다. 이는 학생들이 임진왜란이 지닌 역사적 의의와 영향을 매우 크게 인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이 조선 후기 사회상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향후 고등학교 교육과정이나 교과서 개발에서 학생들의 연대기적 사고나 시간 개념을 체계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장치의 마련이 요청된다.
그리고 평가 대상이었던 학생들 가운데 약 1/4정도가 자신들이 지닌 역사 지식을 활용하여 과거의 특정한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답안을 작성하라는 문항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 중의 약 1/3정도(전체 평가 대상의 10%)만이 역사 지식과 문제 해결을 위한 사고 모두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답안을 작성하였다. 이는 역사교육목표 영역에서 중요하게 논의되는 지적 기능, 탐구 기능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역사 수업 진행 과정에서 학생들의 지식과 역사적 문제 해결을 연계지은 활동을 좀 더 계획적으로 이루어질 때 역사적 소재를 활용한 다양한 글쓰기 활동이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趙成山, 18세기 洛論系 學脈의 변모양상 연구
1. 머리말
2. 17세기 후반~18세기 초 農淵 學脈의 면면과 특징
3. 18세기 중엽 李縡 學脈의 사상적 동향
4. 18세기 후반 金元行과 閔遇洙 學脈의 분화
5. 맺음말
초기 농연 학맥에서 형성된 낙론 학맥은 辛壬獄事, 庚申處分, 辛酉大訓, 乙亥獄事, 壬午禍變, 華陽書院廟庭碑 사건 등 많은 정치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호락논쟁과 함께 그 학맥․학풍의 성격을 달리해 갔다. 호락논쟁이 학술 논쟁에서 정치적인 영역으로 이동해 가면서 낙론 학맥도 중요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그 변화의 과정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김창협 학맥은 문학․성리학 분야에서 특장을 보였으며, 훗날 소론계에 가담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아직 학맥이 정형화되기 이전이라 상대적으로 다양한 면모들이 보였다. 김창흡 학맥도 문학․성리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신임옥사를 겪으면서 학풍이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는 사실이다. 신임옥사가 노론 학계에 끼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보수화 경향으로 인해 어유봉․박필주와 같이 소론과 관련되거나, 적극적인 반탕평론을 전개하지 않았던 인물들은 낙론 학맥을 계승하는 데 어려움을 가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연 문하에 직접 있지 않았던 이재가 학맥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재는 심성론에 있어서는 호론과 명확한 차이를 보였지만, 현실관에 있어서는 송시열의 그것을 계승하였으므로 호론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는 신임옥사 이후 의리론 일변도의 노론 학풍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점차 노론 의리가 정계에 관철되면서 의리론 일변도의 학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학문 경향들이 서서히 낙론계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재의 제자들은 대부분 의리론에 충실하였지만 그 안에서 제한적으로나마 경세론에 관심 갖는 이들도 등장하였다. 경세론에 대한 관심은 磻溪隨錄을 통해서 주로 표출되었다. 이것은 낙론계 학풍에 있어 작지만 중요한 변화였다.
18세기 후반 낙론계 학맥은 攻洪-扶洪의 갈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며 전개되었다. 1755년 乙亥獄事 이후 노론의 의리는 대부분 관철되면서 낙론 학계는 신임의리에서 일정 부분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학문 경향들이 등장하였다. 이는 당시 학맥의 분화를 설명하는 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낙론 학맥은 크게 김원행과 민우수 학맥으로 분화되었다. 김원행 학맥은 낙론 심성론을 고수하였고 부홍-시파적 입장에 가까웠다. 문하에는 홍대용이 이용후생학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박윤원은 보수적인 낙론 학맥을 대표하였다. 또한 황윤석 같은 지방의 인재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편, 민우수 학맥은 노론 의리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공홍-벽파적 성향을 띠었고 호론계와도 긴밀하게 연대하였다. 그들에게서 특징적인 것은 심성론에 있어서도 호론에 접근하는 모습을 띠었다는 점이다.
이상에서 18세기 낙론 학맥의 변모양상을 살펴보았다. 낙론 학맥은 일률적이지 않았으며 개개 인물들도 각기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낙론계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졌던 학문적, 정치적 맥락은 세밀히 살펴 볼 때 중요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호락논쟁 또한 각 시대마다 사회적 맥락이 달랐으며, 후대로 갈수록 정치적인 색채를 짙게 띠어갔다. 학맥의 변모양상을 살펴봄으로써 낙론계 인물들의 사상사적 위치도 좀더 선명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朴振東,日帝强占下(1920년대) 普通學校 6年制 昇格運動의 展開와 歸結
1. 序 言
2. 普通學校 增設과 6年制 昇格의 趨勢
3. 日帝 當局의 學校昇格 政策과 地方民과의 葛藤
4. 地方民의 6年制 學校 昇格運動의 實態
5. 結 語
1920년대에는 조선인의 정규학교에 의한 보통교육을 받고자 하는 요구가 증대하였고, 일제 당국도 보통학교를 확충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것은 교육령의 개정과 보통교육 확장계획(3면 1교, 1면 1교)에 의해 진행되었다. 교육령의 개정에 의해 보통학교 제도는 4년제에서 6년제로 연장되었으나 4년제도 병존하였다. 확장계획은 학교의 보급에 중점을 두어 4년 정도의 학교 신설에 치중하였다. 4년제 학교는 6년제 학교와는 교육과정에서도 차이가 있었고 무엇보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졸업자격에 미달하였으므로 학부형과 학생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것에서 보통학교 6년제 승격운동이 발생하였다.
본고는 1920년대 기설 보통학교의 6년제 승격의 추이와 승격운동의 실태에 대해서 통계를 활용하여 검토하고 신설과 승격의 상호관계를 당국과 운동의 주체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6년제 제도가 없었던 1921년 이전 설립학교군은 위치나 규모면에서 우위에 있어 대부분 1920년대 전반기에 승격되었으나, 설립시기가 늦은 학교는 상당수가 1930년대 후반에야 승격되었고, 승격이 지연된 학교는 규모나 시설, 재정면에서 열악한 면단위 소재의 보통학교였음을 밝혔다.
準據主義를 표방한 일제의 교육정책이 실제로는 민족차별과 동화의 도구로 작동한 것에 대해 조선인이 자력으로 수업연한을 승격시키려고 하자 일제 당국에게도 압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1920년대 전반기에는 기존의 학교를 6년제로 승격시켰다가, 후반기에는 학교 신설을 이유로 승격을 부인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 지방민의 승격운동이 활발한 곳을 중심으로 6년제로의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학교신설에도 조선인이 참여했지만, 승격에도 민원의 제기, 기부금 모집 등에서 유지와 면민이 참여하였고 신설과는 달리 기설학교의 승격문제였으므로 학교 당국과 학부형들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이를 상세히 분석함으로써 일제하 보통교육을 둘러싸고 면단위로 전개된 조선인의 승격운동의 실태를 규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가 추진하는 제도교육에 참여하여 식민교육에 호응하고 보완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타협적이라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가 추진한 보통교육이 예산 등의 문제로 지체되었다기보다는, 조선인에 대한 저열한 인식 때문에 차별적인 교육정책을 추진한 것이 본질이었다. 이러한 기저에서 볼 때에는 조선인이 스스로의 교육기회를 확대하는 추진력을 조직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길 또한 이것뿐이었다. 보통학교의 승격은 상급학교 진학 자격자를 확대하여 연쇄적으로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 설립과 승격을 자극하여 일제강점기 학교교육 전반을 저변에서부터 변동시킨 셈이었다.
그렇지만 이후 일제는 간이학교를 도입함으로써 조선인이 요구하는 수준에 미달하는 교육을 확장하였으며, 전시통제기에 이르러서 초등교육의 4년제가 소멸되고 대부분이 6년제가 되었지만, 이는 학령아동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보통교육에도 미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시동원을 위한 국민양성의 필요가 극대화된 결과였다.
金成修, 동아시아론의 전개와 역사 텍스트 속의 동아시아
1.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동아시아론의 대두
2. 中華를 통해 동아시아를 본다는 것
3. 동아시아 그 다원적 세계
4. 역사 텍스트 속의 동아시아
5. 맺음말-동아시아론과 역사 교육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세계화’라는 화두에 사회 모든 분야가 매진하는 형국이다. 따라서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자긍심을 키우고, 스스로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역사 교육 본연의 임무도 때로는 애국주의, 국수주의, 우파적 민족주의로 매도되고 있다. 기존의 우리 역사 교육이 안고 있었던 극복의 대상으로서의 사이비 민족주의와 역사 교육의 본질적인 성격으로서의 민족에 대한 이해는 분명 구분되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세계화 교육이 민족성의 존재와 발전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면 결국 주도권을 상실한 이질적 사회의 객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글의 목적은 세계화와 민족교육이라는 과제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역사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 시점에서 ‘동아시아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하는 점일 것이다. 서구 역사를 기준으로 한 시기 구분과 서구 중심적 사고의 양산을 지양하고자 하는 논의는 오리엔탈리즘의 논의를 통해 어느 정도 사회 각층의 공감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동아시아로의 시각 전환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해 지고는 있으나, 이것이 때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론으로 천착되면서 동아시아의 또 다른 중심론을 낳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유라시아 초원을 지배하던 북방 민족과 동아시아 농경 민족의 만남은 수․당대에 이르러 동아시아 문화권을 탄생시켰다. 그 후, 송과 고려, 일본, 요, 금, 원 등 아시아 각 왕조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상호 작용은 동아시아 세계의 모습을 다채롭게 하였다.58)
위의 인용문에서도 보이듯이, 우리 사회는 이미 다양한 문화의 존재 형태와 생산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학적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실천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간 동아시아론은 일본이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 말하듯이,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철저히 일본 자국사의 문제였다.59)이제 우리도 비슷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와는 다르지만 각 지역 사회의 자연스런 발전 방향을 어떤 기존의 왜곡된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세계관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주변의 공감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전근대에 다극화되어 있던 지역 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근대적 국민국가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를 다양한 지역 질서의 존재 속에서 해석하고, 이를 교육에 반영한다면 동아시아에 대한 수평적이며 동시에 수직적인 이해의 폭을 확대시킬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 동아시아론의 위치를 담론의 수준으로 치부하기에는 부족한 이유가 이런 점에 있지 않을까 한다.
鄭鉉栢. ‘여성사 쓰기’에 대한 (재)성찰
1. 문제의 제기
2. 그간의 역사 서술과 여성사의 딜레마
3. 여성사의 이론화와 그 쟁점
4. 여성사의 재구성을 위한 지점: ‘젠더화된 여성주체’의 발견
5. 마무리에 부쳐
거다 러너는 “지난 30년 동안 여성사는 [……] ‘선택적 망각’에 대한 하나의 교정책을 제시했다. 전부를 기억해야만 성차별주의, 계급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반유태주의 따위가 독초처럼 자라나는 체계, 왜곡과 반쪽의 진리만을 담고 있는 체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89)라고주장하였다. 러너가 보기에 기왕의 문화전쟁은 역사를 마치 제로섬 게임처럼 파악하였으나, 좀 더 새롭고 좀 더 포괄적인 역사를 추가할수록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지닌 완전성은 높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힘 있는 자들의 역사가 지닌 헤게모니를 위협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사의 제대로 된 정착은 잃어버린 여성들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사학의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성사는 지난 30여 년 동안 많은 성과를 거둔 만큼이나 많은 도전에 직면하였다. 여성사 연구의 양적 증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사는 역사학의 주변적인 위치에 머무르고 있다는 자괴감, 그래서 여성사의 이론화가 필요하고, 그를 통해 종국에는 역사학의 전체 개념틀을 문제 삼고 재개념화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던 것이다. 그럴수록 여성사는 여전히 여성과 관련된 역사의 공백을 채우는 작업에 매달리는 만큼이나 이론화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론화를 둘러싼 논쟁도 가속화되었다.
우선 페미니즘에서 시작된 젠더 범주가 인문·사회과학계에서 각광받는 분야로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그것의 여성사와의 관계성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포스트구조주의가 제기한 여성 내부의 ‘차이’문제도 끝없는 상대화로 치달았고, 이는 종국적으로 여성 범주 자체의 무의미성을 주장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또한 새로이 제기되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비서구권의 역사학과 여성사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마찬가지로 활발해지고 있는 남성사 연구와의 관계설정도 중요해졌다.
이 논문에서 이런 다양한 이론화의 문제에 시원한 해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글에서는 여성사의 핵심 쟁점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방안을 제안하였다. 섹스/젠더체계의 엄격한 분리시도를 넘어설 뿐 아니라, 젠더연구가 빠지기 쉬운 보편주의적 접근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성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고 젠더를 역사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젠더범주가 여성주체의 존재를 적절히 해명하지 못하는 한계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젠더화된 여성주체’의 형성과정에 주목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젠더범주의 유용성을 적극 활용해야겠지만, 여성사를 젠더사로 전환하는 시도는 아직은 시기상조임을 밝힌 바 있다. 남성중심적 역사서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젠더사의 강조가 자칫 중립화로 오인되면서, 페미니즘 역사서술의 문제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와 관련해서는 기왕의 여성사 연구가 제1세계/백인/중산층여성에 치중하였음을 비판하였으나, 차이의 역사화 과정에서 차이의 강조가 해체주의로 치닫는 과정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 대안으로 과거의 보편주의가 지닌 폐해를 극복해야하나, 끝없는 상대화보다는 ‘차이를 통한 전체사의 구성’을 제안하였다. 권력과 지배 그리고 헤게모니의 다층적 구조를 파악하고, 차이에 못지 않게 공통점을 발견해내고, 이를 통해 젠더, 계급, 인종이 함께 작동하는 지배의 연동체제를 구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비서구사회의 역사학은 새로운 개념틀과 재구성의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체 역사학의 구조 자체가 요동하는 만큼이나,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이나 흑인페미니즘 연구에 자극 받은 여성사연구도 온전한 지역사 재구성의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간 비서구사회의 여성사 쓰기는 제국주의 지배/피지배관계나 포스트식민주의의 문제의식에 집중하였으나, 이 글에서는 그러한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또 다른 유형, 선별적인 서구화를 시도한 중간유형으로 한국의 여성사를 분석해볼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는 위에서 제기한 이론적인 쟁점을 토대로 여성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지점을 제안하였다. 젠더화된 주체의 발견의 장소로 생산활동에서의 여성의 역할, 가족속에서의 중심적 역할, 저항주체로서의 여성, 가해자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서 역사 속에 여성주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역사는 완결된 이야기이기 보다는 끊임없이 형성되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여성사도 예외는 아니다. 이 글에서 시도한 이론화 작업과 젠더화된 여성주체의 재구성의 시도도 이런 과정의 일부이다. 이런 논의가 한국여성사의 서술의 완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 바란다. 과거와 의미 있는 연관성을 가지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역사가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安相俊.중세 말 쾰른 시의 지배계층과 자치정부
1. 머리말
2. 참사회헌정과 자치권 획득
3. 참사회 지배독점과 도시의 내분
4. 1396년 ‘동맹합의규정’과 가펠참사회
5. 맺음말
쾰른의 최초 자치기관은 배심원단이었다. 원래 배심원은 도시영주인 쾰른대주교의 법정관리였다. 12세기 도시의 유력자들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사적인 부자모임을 조직하여 공적인 임무까지 수행했다. 이들 기관이 도시 각 구역의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시민을 대변한다기보다 대주교의 그늘에서 그들의 권리수호기구였다. 13세기 초에 전체 시민을 대표하는 참사회가 등장했고, 기존의 유력가문들은 참사회까지 장악하면서 대주교와 갈등을 불사하고 자신들과 시민의 권익을 지켜냈다. 1258년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중재한 ‘대결별’은 이제 대주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참사회의 법적 권한을 승인하는 절차였다. 유력가문의 참사회지배가 경제적 영역에서 성장하는 신흥엘리트들의 불만을 자극하고 있었지만, 13세기 말 시민들은 영방제후와 연합하여 대주교의 지배권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주교의 퇴장은 도시의 평화를 보장하지 못했다. 시민들은 참사회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유력가문의 지배독점에 맞서 신흥 경제엘리트들이 정치적 참여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시민이 폭넓게 참여하는 대참사회를 거점으로 유력가문이 장악한 소참사회의 위상을 흔들어 놓았다.
1370년 직물업자들은 유력가문의 지배를 극복하고 독자적인 지배체제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뚜렷한 비전이 없던 직물업자체제는 곧 와해되었다. 주도권을 되찾았지만 유력가문의 내분은 이미 유력가문 독점체제의 종말을 예고했다. 1390년대 파벌로 갈린 유력가문 연대는 1396년 가펠을 토대로 성립된 새로운 체제로 대체되었다. 정치적 동업조합(politische Zunft)이라 할 수 있는 가펠은 서약에 기초하여 조직된 수평적 연대체로서 다양한 직업군이 합종연합하는 정치적 구성체의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가문과 혈연유대를 배경으로 참사회를 장악했던 유력가문 지배체제와 달리 가펠지배체제는 동업조합의 연대를 배경으로 참사회를 장악하는 보다 개방된 지배체제였다.65)그런 만큼 느슨했고 유력가문을 완전히 배제하지도 못했다.
문제는 참사회의 본질적인 속성에 있었다. 모든 직종의 조합원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였지만 현실적으로 참사회 활동은 일부 집단과 동업조합에게만 가능했다. 이른바 베버가 말하는 무보수 명예직의 유산계층에 의한 독점현상이다(Abkömmlichkeit). 명예직의 업무량은 엄청났고 갈수록 전문성을 요구했다. ‘공익’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좋은 정부는 지극히 중세적인 기준에서만 옳다.66)중세도시의 사회구조는 이미 재산과 신분을 기준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 위에 구축되었다. 참사회 소속감은 사회적 지위를 의미했고, 계층적 위화감을 조성했다. 1396년 위기는 이미 예고되었던 사건이었고, 한 세기가 지난 후 1513년에 개정된 동맹합의규정이 작성되는 악순환은 도시사회의 내재된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彙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