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輯> : 동아시아․유럽의 역사 교과서 문제와 화해를 향한 노력
辛珠柏, ‘동아시아형 교과서대화’의 본격적인 모색과 협력모델 찾기(1993~2006)
1. 머리말
2. 1993년 이후 역사인식에 관한 국제교류의 활성화
3. 21세기 동아시아 정세의 특징과 교과서대화의 함의
4. ‘동아시아형 교과서대화’의 다양한 시도
5. 맺음말
본 논문은 1993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독·프와 독·폴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하며 동아시아의 역사대화를 진행해 왔는지 정리한 글이다. 또 세계화 시대의 21세기에 역사갈등을 해소하고 域內의 안정과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교과서대화의 협력모델이 무엇인지 탐색한 글이다.
1993년 이후 진행된 한일간의 역사대화는 1991, 1992년의 공동연구 때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국제교과서 대화경험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며 대안모델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태동하였다. 2001년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왜곡문제는 이러한 모색이 본격화하는 계기였다. 동시에 새로운 연구인력이 역사대화에 대거 참여하는 전환점이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 이들에 의해 다양한 형식의 공동역사교재가 개발되었다.
교과서대화는 서로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다. 국제 교과서대화의 경험은 우리에게 이를 선험적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우리에게 교과서대화는 역내의 안정과 평화질서를 구축하고 남북분단을 극복하여 통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디딤돌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동아시아 역사대화의 코디네이터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한국으로서는 이 지점에서 ‘교과서대화의 정치성’이 있다.
그런데 국제 교과서대화의 구체적인 경험은 유럽적인 산물이다. 우리는 대화의 경험도 일천하고 다자간 협력시스템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가운데 민족주의 감정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동아시아적 상황에서 유럽의 경험을 창조적으로 응용할 필요가 있다.
지금 단계에서 동아시아형 교과서대화의 조직적 협력방식은 외교관계의 제약을 받는 정부 지원의 대화조직과 민간차원의 자발적인 대화조직이 각각 독립하여 병렬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그리고 민간차원의 다양한 공동역사교재 개발사업이 경쟁하면서 각자의 역할을 창조적으로 파악하고 상호의존하며 협력해 가야 한다.
공동역사교재에 관한 협력방식은 통사적인 서술에서 사료집까지 다양한 형식의 결과물일수록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화조직의 궁극적인 결과물은 국제 교과서대화의 정신적 합작품인 권고안의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의 단점을 만회할 수 있어야 한다. 민간차원의 결과물은 궁극적으로 2국간 관계사, 또는 한중일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더 나아간다면 ‘동아시아와 세계’라는 ‘역사’ 교재 또는 국민국가의 극복을 전망할 수 있는 ‘동아시아사’ 교재의 편찬을 지향해야 한다. 다만, 이들 교재는 이미 발행되었거나, 앞으로 발행될 여러 교재 가운데 하나로 간주해야 한다.
金正仁, 동아시아 공동 역사교재 개발, 그 경험의 공유와 도약을 위한 모색
1. 서 언
2. 공동 역사 교재의 발간 과정과 성과
3. 공동 역사 교재의 분석 원칙
4. 동아시아 역사 대화 분석 원칙에 따른 공동 역사 교재의 평가
5. 공동 역사 교재와 각국 교과서의 사례 비교
6. 결 어
지금 동아시아에는 치열한 역사 분쟁이 전개되고 있다. 동시에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를 표방하는 공동 역사 교재들이 잇달아 발간되어 주목을 받았다. 본고는 『조선통신사』(2005.4),『미래를 여는 역사』(2005.6), 『마주보는 한일사』(2006.8) 등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다. 먼저, 공동 역사 교재의 발간 과정과 성과를 분석했다. 그리고 유네스코가 마련한 역사 대화의 원칙을 동아시아 현실에 맞게 원용하여 공동 역사 교재를 분석하고 각국 교과서와 비교했다. 이는 동아시아 공동 역사 교재 개발의 경험을 공유하는 동시에 더 높은 수준의 역사 대화로의 도약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쌍방 혹은 다자간 합의에 의해 민간 차원에서 공동 역사 교재가 발간된 것은 국가의 협조와 지원 아래 장기간의 협의를 거쳐 추진되어온 유럽의 역사 대화와는 다른 동아시아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에서의 공동 역사 교재의 발간은 역사 갈등 해결의 귀착점이 아니라 진정한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韓海貞, 독일역사교과서에서 나치시대에 관한 서술분석
-집단박해 및 학살을 중심으로 -
1. 머리말
2. 교과서 소개와 시기별 유형적 특징
3. 전후 1950년~1960년대 : 나치과거에 대한 침묵, 그리고 변화의 모색
4. 1970년~1980년대 : 비판적인 나치과거사 서술
5. 통일 이후 : 나치과거에 대한 기억화
6. 맺음말
서독의 1950년대 교과서를 기준으로 볼 때 최근까지 독일 역사교과서에서 나치시대에 관한 서술은 상당히 개선되어 왔다. 그것은 보다 정확하고 균형 있는 서술로 감추고 싶은 독일의 과거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과정이었다.
나치시대를 역사적 재난으로 보고 그 책임을 기피했던 전후 서독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독일인들이 행한 박해와 학살에 대한 교과서 설명은 불충분했다. 비록 1960년대에 가서 사진과 함께 그에 관한 서술이 조금씩 증가했지만 실상을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치시대에 대한 부끄러운 과거는 1970년대 이후에 가서야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 희생에 대한 설명은 상세해졌으며, 슬라브 특히 폴란드인 희생도 강조되었다. 그리고 교과서 구성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교과서 서술에 비한다면 뒤떨어지는 수준이다. 요즘 교과서들은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예: 독일방위군의 역할), 생략 혹은 간략하게 소개되던 사건들(예: 소수집단들에 대한 집단학살, 징용당한 강제노동자의 삶)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정확한 정보를 위해 주요 개념들을 본문에서 정리해 주는가하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과거를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들을 제시한 점도 최근 교과서의 특징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특징은 유대인 중심으로 서술하던 ‘민족학살’을 더욱 자세히, ‘홀로코스트’ 혹은 ‘쇼아’, 나아가 ‘제노사이드’ 개념을 적용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공범자’ ‘단순가담자’, ‘가담자’ ‘밀고자’라는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나치시대에 대한 책임을 전체 독일인에게 확대시켜 ‘집단치욕’으로서 인간성에 대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 생각토록 한다.
이와 같은 역사교과서 서술은 독일의 과거청산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최근 독일의 역사교과서들은 자신의 과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학생들에게 교훈을 인지시키려고 한다. “2차 대전 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던 이 시대의 범죄를 떨쳐버리고 있었다. 50년 이상 지난 오늘날 “과거청산(Bewältigung der Vergangenheit)”(본문강조)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과거를 세우고 비판적으로 조상들의 행위와 그 조건들을 서로 연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장들은 과거사에 대한 독일인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이들의 역사교과서 서술태도는 일본을 비롯해 모든 국가에 모범이 될 만하다.
물론 독일 역사교과서에서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여전히 있다. 전쟁의 피해자나 독일인 저항자들의 규모가 교과서마다 일관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그 중 하나다. 또한 나치 희생자 가운데 아직도 소개되지 않는 집단이 있다는 점도 개선되어야 한다. 교과서에서는 ‘아프리카인과 흑인들’이 빠져 있다. 이들에 대한 관심은 2002/03년 쾰른에서 ‘나치국가에서의 흑인’이라는 전시회가 열린 것처럼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새로운 관심이 이후 교과서에 반영되길 기대한다. 아마도 그것은 홀로코스트 보다 넓은 의미의 제노사이드 개념을 적용해 나치 희생자들을 확대시키는 가운데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金承烈, “두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관계사 - 독일-폴란드 역사교과서 대화 -
1. 머리말
2. 배경 : “否定的 폴란드 정책” vs “否定的 독일 정책”
3. 주역 : 엔노 마이어와 게오르크 에커트
4. 국제적·국내적 조건: 데탕트, 신동방정책 그리고 과거정책
5. 권고안의 내용과 특징
6. 권고안에 대한 비판과 대응: 역사적 진실 vs 현실적 타협
7. 맺음말: 독-폴 역사교과서 대화의 기본정신
역사(교육) 분야의 유럽통합이라고 일컬어지는 서독-프랑스 역사교과서 협의활동도 독-폴 교과서 대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 “宿敵” 프랑스와 역사 분쟁을 해결했던 경험은 서독 교과서위원들에게 - 에커트가 독-불 교과서협의의 주역이었다 - 폴란드와 역사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동기와 지혜를 제공했다. 독-불 교과서 협의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이삭(J. Isaac)이 강조한 “두 개의 시선(deux points de vue)”은 국제교과서 대화에 중요한 정신이다. 이에 따르면, 자신의 시선뿐 아니라 타자의 시선으로도 자국사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좋은 전략일뿐 아니라 일방적인 민족주의적 역사교육을 극복하고 이웃 국가들과 평화적 관계를 건설하는 데 유용한 길이다. 독-폴 교과서위원회 위원들은 이 정신에 충실했다.
이 정신은 동아시아 역사분쟁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유럽과 동아시아의 상황이 다르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서독의 과거 극복 노력과 신동방정책이 독-폴 교과서 대화의 계기이자 성공 조건이었다. 하지만 유럽통합도 여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유럽통합은 민족주의의 절대성을 상대화했고, 공존과 평화를 해치는 민족주의의 폐해를 상당히 개선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국민국가들은 민족적 정체성과 함께 유럽적 정체성을 서로 공유할 수 있게 됐다. 후진 지역은 자신의 국가만이 아니라 유럽공동체(연합)로부터도 지원을 받는다. 유럽공동체로부터 지원을 받으면, 이에 따른 의무가 부과되고 이것은 곧 국가 주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유럽공동체의 지원을 거부하는 지역이나 정부는 현재 유럽에 없다. 서독은 유럽 국가들 중 유럽통합에 적극적이었고, 이에 따라 서독인들은 강한 유럽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과거 독일 영토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 슐레지엔과 포머른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서독 국민 전체에게 주는 의미가 2차 대전 이전과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럽통합은 서독이 오더-나이쎄 국경선을 인정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이 점이 동아시아와 유럽 간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이며, 유럽식 “가능성의 예술”을 동아시아에서 참조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論文>
朴平植, 15世紀 朝鮮의 魚箭政策과 魚箭經營
1. 序 言
2. 國初의 魚箭政策과 魚箭分給
3. 魚箭經營의 實態와 收稅增大
4. 結 語
15세기에 조선 왕조가 고려말의 어전문제를 개혁하면서 펼쳤던 어전정책의 추이와 그에 따른 이 시기 어전경영의 실태를 살펴보면 이상과 같다. 이제 그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는 것으로 본 작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고려시기 이래 魚箭은 중세기 우리나라 漁業의 대표적인 생산형태였다. ‘魚梁所’의 설정을 바탕으로 대하천이나 연해에 소재한 어전을 체계적으로 파악하여 관리하던 고려조의 어전정책은, 그러나 그 최말기에 이르러 권세가의 魚箭奪占과 私占 사태에 덧붙여 倭寇의 연해 침탈이 극심해지면서 와해되어 갔고, 이에 따라 국용어물의 안정적인 공급과 어민과 민생의 곤궁 구제 등의 과제가 대두하고 있었다. 새롭게 개창된 조선 왕조는 고려말 이래 누적되어 왔던 이 같은 어업과 어전문제를 산림과 염분 등을 포함하는 이른바 ‘山林川澤’ 일반에 대한 처리 방향의 틀 속에서 정비하여 갔다. 그리하여 ‘山林川澤 與民共之’라는 유교 전래의 이념에 근거하여 어전에 대한 권세가 개인의 사점을 일체 혁파하여 그 所有權을 부정하고, ‘共有’의 원리 하에 이들 어전에 대한 백성들의 자유로운 占有와 어물 생산활동을 수확어물의 1/10 收稅를 전제로 허용하였다. 국초 朝鮮經國典과 續六典에서 거듭 확인되었던 이 같은 조선 국가의 어전정책은 이후 성종조의 經國大典에 이르러, 어전사점을 일체 금지하고 대신 국가가 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여 관리하면서 貧民에게 3년마다 遞給하는 방침으로 최종 정리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 국가는 호조의 司宰監의 관할 하에 전국의 어전을 官魚箭과 私魚箭으로 편성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관어전은 司饔院 직속의 국용어전과 연해 州縣과 浦鎭에서 운용하는 관어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국용어전에서는 왕실의 수요어물을 그리고 주현과 포진의 관어전에서는 공물․진상용의 常貢魚物을 공급하고, 그 나머지를 貿穀하여 지방재정이나 軍資에 전용하고 있었다. 반면 사어전은 연해 백성들이 국가로부터 어전의 使用收益權을 분급받아 스스로 結箭하여 그 생산어물의 1/10을 사재감에 납세하고 있었는데, 이른바 ‘魚鹽雜稅’의 하나였던 이 사어전의 어전세는 중앙 정부의 예비재원의 하나로 파악되어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국초 조선 정부는 어전의 私占革罷와 貧民分給이라는 어전정책의 기본 骨格 안에서, 이들 어전의 일부를 왕실과 중앙의 몇몇 衙門이나 개인에게 收稅權 또는 사용수익권의 형태로 분급하고도 있었다. 우선 어전사점의 혁파에도 불구하고 국초 이래 本宮을 비롯한 왕실 세력은 여전히 特賜 別賜의 형식을 통해 어전을 장악하고 이를 書題를 통해서 운용하고 있었으며, 司僕寺․典校署 등의 아문 역시 어전의 수세권을 분급받아 이를 해당 관서의 運用資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아울러 조선 정부는 국가재정에 대한 기여, 예컨대 燔瓦用 燒木을 납부하거나 諸驛 驛吏들에게 入接 가옥을 조성하여 제공한 자들에게도 일정기간 ‘限年’의 형태로 어전의 사용수익권을 제급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 어전은 합법적인 형태이기는 하였으나, 그 분급과 회수가 국가에 의해 限年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恒久 排他의 독점적인 사점 형태는 아니었다.
권세가의 사점이 혁파되고 평민․빈민의 점유와 생산이 허용된 전국의 어전은 관어전과 사어전의 형태에 따라 그 구체적인 經營方式을 달리하고 있었다. 먼저 국용어전을 포함하여 전국의 관어전은 守令과 鎭將의 관할 하에 소속 공노비와 人吏 그리고 水軍을 동원하고, 여기에 결전과 어전운영에 필요한 선박과 각종 器物을 官에서 지원하여 어물을 생산함이 원칙이었다. 곧 당대 官屯田의 경작체계와 동일한 경영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대부분의 관어전 경영은 이런 원칙과는 달리, 소속 주현의 백성들을 賦役과 力役의 형태로 동원하여 결전과 어물생산이 이루어짐이 일반이었다. 더욱이 이들 관어전의 소출 중에서 공물․진상용의 常貢 어물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가 지방재정과 군자에 보충되었던 만큼, 이 시기 전국 연해의 수령과 진장들은 관어전의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고, 지방재원의 확보를 위한 어전 結箭地域의 割屬 요구가 특히 내륙 소재의 주현과 軍鎭으로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한편 사어전의 경영은, 국가로부터 3년 기한의 사용수익권을 분급받은 평민과 빈민들의 가족 노동력에 기반한 소규모 경영형태가 국초 조선 국가의 어전정책에서 설정된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형식의 사어전 경영은 전국의 어전 중에서 일부 또는 소규모의 어전에서나 가능하였다. 우선 어전의 결전에 소용되는 수다한 각종 기물과 노동력 때문에도, 권세가나 재력을 갖춘 상인․토호 등의 경영참여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왕에 의한 특사나 합법적으로 분급받은 어전 외에도, 유력자나 상인층의 魚箭投資와 경영이 빈민의 名儀를 빌리는 冒稱私占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전경영이 막대한 이익을 보장하는 조건에서 특히 대규모 어전의 경우에는, 권세가와 상인층이 빈민 명의로 장악한 어전의 결전에 필요한 物力을 제공하고 대신 그 수확어물을 ‘分半’하고 있었다. 당시 지주경영에서 일반적이었던 ‘並作半收’의 형태 바로 그것이었다. 더욱이 왕실이나 권세가에 대한 국왕의 어전 賜給이 世祖朝와 燕山朝에 확산되면서 15세기 후반에 들어, 특히 경영규모가 큰 연해의 사어전이 모점․사점의 형태로 이들 세력에게 장악되어 갔고, 이들은 권력을 바탕으로 어전세를 면제받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사점혁파와 빈민분급을 기조로 하는 국초의 어전정책이 15세기 후반 이후 왕실․권세가․상인층에 의한 어전 모점과 사점의 확산 속에서 실효를 상실해 가면서, 어전세에 근간을 둔 중앙과 지방재정의 문제 또한 심각해지고 있었다. 成宗 17년(1486)의 어전세 綿布增收 방안은 이런 형편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국법과 달리 어전을 권세가나 상인들이 장악하여 큰 이익을 독점하는 현실에서, 성종 정부는 기왕의 1/10 현물 어물세 외에 수확어물로 무역한 면포 총액의 1/3을 司贍寺에서 수납하는 어전세 증수 방안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성종조의 도입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어전세 綿布增收 방안은 결국 국정의 난맥 속에서 국가재정의 문제가 심각하였던 연산군 7년(1501)에 마침내 국가정책으로 채택 시행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합법적인 受賜 어전과 관어전을 제외한 모든 사어전에서 1/10의 현물 어전세 외에 수확어물의 1/3에 해당하는 면포가 수납되었고, 이렇게 증수된 어전 면포는 天使나 倭․野人의 糧餉 등 準경상재정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결국 연산조의 이 어전세 면포 증수 방침의 실행은, 어전사점을 금지하는 경국대전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그 같은 권세가나 상인층의 어전 모점과 사점이 사회적으로 黙認되어 가고 있던 실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어전 문제는 이후 전개된 조선 국가의 사회경제 변동과 맞물리면서 16세기에 들어 새로운 국면으로 논란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山林川澤의 일환인 어전에 대한 조선 국가의 이 같은 정책과 그 변화는, 집권적 국가체제를 표방하며 개창된 조선 왕조가 실제 추진하고 있던 경제정책의 성격과 그 추이를 또한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宋讚燮, 조선조 18~19세기 경상도지역 환곡운영의 변동
1. 머리말
2. 會錄制度의 시행과 還耗의 재정 편입
3. 加分의 확대와 還耗의 이용
4. 還耗 作錢의 시행과 확대
5. 還穀 虛留化의 진전과 대책
6. 맺음말
본 논문은 조선조 18~19세기 경상도지역에 있어서 환곡운영의 변동을 會錄制度, 加分, 作錢, 그리고 未捧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환곡이 부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것은 국가의 재정규모가 커지고 농업생산성이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재원을 쉽게 마련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환곡을 선택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회록제도는 일분모회록, 삼분모회록 등의 일시적인 시행을 거친 뒤 정착되어 나갔다. 이를 통해 환곡의 이자인 모조가 국가의 재정체계 속에 편입되었으며 환곡제도의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기존의 환곡에 있어서도 회록율은 점차 높아졌으며 회록을 위한 환곡, 이른바 全耗會錄의 환곡이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가분도 처음에는 흉년이나 자연재해 때문에 시행되었으나 점차 특정한 목적을 위해 가분을 받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달리 환곡을 설치하지 않아도 재정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지방관청에서 요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전체 분급율이 크게 늘어났다. 작전의 경우도 모조를 직접 중앙으로 상납하여 재정으로 사용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처럼 환곡의 모조까지 재정체계에 포함됨에 따라 국가재정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농민들의 환곡 부담이 커지고 미봉이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에서는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였으나 결국 해결하지 못하면서 환곡의 虛留化가 늘어나고 폐단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金泰雄, 朝鮮末 開城府財政 補用策의 추이와 朝野의 동향
1. 序 言
2. 財政難의 재발과 그 원인
3. 財政 補用策의 추이와 ‘新定事例’ 마련
4. 舊豊德 復邑運動과 정부의 후속책
5. 結 語
조선후기에 개성부가 軍需, 勅需 및 開市 費用의 증가로 말미암아 재정난에 당면하자, 정부는 정조 20년에 金川郡의 大南面 小南面, 長湍府 沙川面 以西 지역, 白峙鎭을 개성부에 이속시킴으로써 이러한 재정난을 해소하려 하였다. 그러나 개성부는 순조 연간에 들어와 기존 경비의 증가와 함께 殖利 運營의 모순으로 인해 재차 재정난을 맞이하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 개성부 재정난을 가중시킴은 물론이고 개성부민의 재생산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이에 개성부 유수는 정부에 재정 보용을 요청하였고 정부 관료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크게 두 방안으로 갈렸다. 하나는 환곡의 加分과 임시적인 劃給을 통해 일시적이나마 개성부의 재정난을 줄이는 방안이었다. 또 하나는 豊德府를 개성부에 합속시키는 동시에 상납 전세 등을 이속함으로써 개성부의 재원을 확대하는 방안이었다.
전자의 경우, 戶曹, 宣惠廳 등 中央의 掌賦 官衙에 상납되는 부세를 개성부로 이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고 세입의 감소를 초래하지 않은 반면에 개성부의 재정난을 일시적으로 해소할 뿐이었다. 이는 ‘有分土而無分民’의 원칙에서 비롯되었다. 후자의 경우, 개성부의 殖利 依存率을 낮추고 개성부 여타 재원의 확대를 도모함으로써 재정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반면에 상납 부세를 개성부에 이속시킨다는 점에서 국고 세입의 감소를 초래하였다. 이는 개성부가 舊京分司인 점을 중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정부는 이러한 논란 속에서 순조 24년 호조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풍덕부를 혁파하여 개성부에 합속시키는 한편 ‘開城府甲申新定事例’를 제정하였다. 이는 ‘有分土而無分民’의 원칙을 고수하기 보다는 舊京分司로서의 개성부를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방향이었다. 그 결과 개성부는 殖利에 의존하기 보다는 田稅, 還耗 및 商稅에 주로 의존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재정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군현 합속을 수반하므로 정치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았다. 우선 구 풍덕 유생들의 반발이 컸다. ‘有邑有宮 無邑無宮’의 원칙에 따라 郡邑과 함께 鄕校가 혁파됨으로써 이 지역 유생들의 향촌 사회 지배력이 약화되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양주 등 타 지역 유생들에게 통문을 돌려 풍덕이 兩陵尊奉之所이자 仁宣王后姓貫之鄕임을 강조하는 한편 향교 혁파시에 거행된 埋安 儀式의 문제점을 알려 여타 지역 유생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군현 합속의 여러 先例와 ‘有邑有宮 無邑無宮’의 원칙을 내세워 구 풍덕 유생들을 비롯한 참여 유생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한편 이들의 복설 운동을 ‘亂民’의 행위로 규정하고 주동자를 처벌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방침은 국가의 지방 통치 논리가 유생들의 향촌 지배 논리보다 우위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향교 복설운동은 이 시기 掛書 사건 등과 연계되어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는 讖緯說과 鄭鑑錄 등을 활용하여 민심을 선동하던 ‘不逞’의 무리들이 풍덕부 혁파 문제를 내세워 유생들을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그 만큼 향교 혁파 문제는 지방 유생들의 민감한 관심 대상이기도 하였다. 순조 26년에 연이어 일어난 청주 괘서 사건은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여 구 풍덕 복읍 문제는 철종 말년까지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물론 이 시기에 개성부 상업의 변동으로 商稅를 폐지하는 대신에 鑄錢 差額分으로 재정을 보용하거나 환곡 분급량을 늘려 환모를 증가시켜 개성부 재정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開城府甲申新定事例’의 기본 방침은 변화하지 않았다.
정부의 이런 방침은 1866년 丙寅洋擾로 말미암아 조정되어야 했다. 강화부 방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구 풍덕이 복읍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구 풍덕이 ‘兩陵尊奉之所’이자 ‘仁宣王后姓貫之鄕’이라는 명분이 작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풍덕이 ‘沁營後援’의 요충지라는 이유가 크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풍덕부는 혁파된 지 42년이 지난 1866년 11월에 복설되었다.
풍덕부의 폐치 문제는 이처럼 재정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사회적 파장을 초래하였다. 특히 구 풍덕의 복읍이 외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지방제도 문제는 국방 문제와도 밀접하였다. 이는 여타 郡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점에서 갑오개혁기 지방재정 개혁은 중세 군현제를 재편하는 지방제도 문제와 맞물리는 동시에 정치․경제․사회․군사 모든 방면의 제도 개혁과 연계하였던 것이다. 또한 근대적 지방통치체제의 수립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 기반하였다.
辛圭煥, 竝存과 折衷의 二重奏 日帝下 韓醫學의 西洋醫學 認識과 受容
1. 머리말
2. 강제 : 의생시험과 출제경향의 변화
3. 적응 : 동서의학연구회와 ‘동서병존’
4. 선회 : 1930년대 한의학부흥논쟁과 한의학의 서양의학 인식의 변화
5. 맺음말
일제시기 한의사는 1913년 11월 공포된 醫生規則을 통해 醫師 혹은 醫士보다도 낮은 醫生의 지위로 격하되었고, 조선총독부의 주도하에 서양의학 위주로 의료체계가 개편되면서 한의학은 의사면허 및 의학교육 등 제도적 보장을 받지 못한 채 한시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조선총독부는 안정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서양의학으로 일원화된 의료체계를 구축하고자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서양의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의사시험을 통해 서양의사를 양산함과 동시에 한시적으로 한의사를 공공위생업무에 동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사시험을 통한 서양의사 양산책은 실효성이 없었고, 조선총독부는 서양의학위주의 의생시험을 강제하여 의생을 공중위생업무에 동원하는 방안을 강화하였다.
일제시기 한의학은 서양의학을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서양의학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의생시험이 서양의학 지식을 묻는 게 대부분이었고, 1930년대 중후반 이후 의생시험에 일부 변화가 있었다지만, 의생이 되기 위해서 서양의학을 공부해야 하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의생조직들은 서양의학의 수용에 배타적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험 때문에 한의학이 일방적으로 식민당국의 기대에 부응한 것은 아니었다. 한의학의 주요 관심은 임상과 약물에 있었다. 이러한 관심은 시험 출제경향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심지어 식민당국은 한의사들의 양약처방을 통제하기 위해 또 다른 시험제도를 창안해 내기도 했다.
일제시기 한의학의 서양의학 인식은 1920년대 ‘동서절충론’에서 1930년대 ‘전통의학 회귀론’으로 전환되었다고 설명되어 왔다. 그런데 동서의학연구회 같은 조직이 처음부터 동서절충이나 동서회통을 지향했는지는 좀 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동서의학연구회의 성격은 ‘동서병존’을 지향하면서 임상적으로 진단과 처방을 병용하거나 비교연구 및 실험적 연구 혹은 동서절충과 같은 다양한 성격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의학이 서양의학과의 관계에서 동서병존이나 동서절충과 같이 다양한 모습을 표출했던 것은 일제가 서양의학을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외피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한의학부흥논쟁에서 한의학계가 논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시대적인 복고적 경향에 의존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적 교육을 경험한 논객들이 한의학을 근대적 인식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서양의학과 동등해지거나 혹은 능가할 수 있는 제도적 임상적 성취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의학은 ‘알아야만 했던 것’에서 벗어나 ‘알고 싶은 것’과 ‘받아들이고 싶은 것’에 보다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金昌成, 맥락적 접근을 활용한 로마 제국주의의 이해
- 로마 공화정 중기를 중심으로 -
1. 서 언
2. 로마 제국주의의 규정문제
3. 맥락의 갈래와 그 검증
4. 또 하나의 맥락-동맹국의 위상
5. 결 어
최근 미국의 팽창 및 간섭 정책의 증대를 로마의 제국주의에 비교해 보려는 시각들이 있다. 그런 비교는 흥미롭고도 유익한 것이다. 앞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의 변화를 예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예견하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 제국주의는 매우 상이한 측면이 있다. 우선 로마가 팽창을 시작하였을 무렵, 즉 공화정 중기에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부터 시작하여 공화정의 체제에 이르기까지 분석을 어렵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 제국이라는 용어를 공화정기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자의 추세이다. 아마도 그런 추세는 로마는 나름대로의 제국주의였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제국주의를 설명하는 맥락의 갈래는 다양하게 있었으며 그 갈래는 지역과 시기별로 상이하게 적용되어 설명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필자는 이런 맥락들의 이해와 실태가 연구나 현장교수에서 널리 사용되기를 희망하면서 정리해 보았다. 과일반화를 통해서 복잡다단한 역사를 만화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아 해악이 더 크다고 판단한 연유이다. 로마 공화정 중기 전체를 아우르는 맥락은 크게 보아 경제적인 맥락과 정치적인 맥락으로 검증되어 왔다. 특히 베이디언 이래로 후자의 맥락이 사실상 당시의 로마를 보는 중심적인 것이었다. 필자는 다른 맥락을 제시한 연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동맹국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실태에 주목하고, 오히려 로마의 제국주의 정책에서 동맹국의 위상을 다시 검토하여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매개요인으로 동맹국이 로마의 제국주의를 좌우했다고 설정하고, 이를 적용해 본 결과 몇 개의 사례에서 로마의 제국주의를 동맹국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필자는 제국주의 하에서 시장 자본주의 같은 순순한 경제적 동기가 로마의 동맹국에 의해서 관철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로마의 제국주의를 이해하는 데에서 필자는 이탈리아 동맹국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으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속주에서 어떤 역학관계가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說林>
吳恒寧, 역사교육의 또 다른 지평, ‘아카이브’
1. 머리말
2. 아카이브와 역사학
3. 아카이브의 역사교육 활용사례
4. 아카이브를 활용한 역사교육의 전망
5. 맺음말
세계 기록문화유산(‘Memory of World’)에 등록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전공학자를 자임하는 필자가 늘 가까이 두고 활용하는 자료인데, 보면 볼수록 탁월한 문화 성과이고 소중한 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경험은 아마 필자만의 소회는 아닐 것이다. 바로 이 실록도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아카이브’의 하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실록과 같은 기록유산을 만들어 전승하고 활용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는 것이고, 이 글도 그 연장에서 작성되었다.
필요와 발명,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하는 논의만큼이나 무의미하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필요하다면 준비해서 만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아카이브가 역사교육을 통해 인간의 경험에 대한 성찰과 이해를 높이고, 이 시대에 같은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연대를 실천하는 역사의식의 확산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 글의 문제제기가 용인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가기록원, 국회기록보존소 등 국가기관은 물론, 조계사, 신일교회 등의 종교단체,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홍익대 등의 대학기록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이제 16개 시․도광역시에서도 아카이브를 관리할 전문관리기관을 설치할 것이다. 나아가 기업들도 경영합리화라는 실제적인 목적과 함께 기업문화의 정체성을 고려하여 아카이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숱은 역사교육의 자료가 곳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아카이브를 역사교육에 활용하는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관계, 그리고 사료로서의 아카이브가 실제로 어떻게 활용되는지 홍콩 공공기록관과 호주 국립기록관에서 제공하는 교육키트의 사례를 통하여 알아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교육과 아카이브가 만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아카이브의 성격에 맞는 체계적이고 원리에 입각한 기록관리가 정착되어야만 효율적인 관리와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곧 記述 규칙의 제정과 그에 따른 관리, 기록관리의 표준화 등을 의미한다. 또 전문가 교육에서도 그 방법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역사교육에 아카이브를 활용한다는 것은 그저 확대프로그램(Outreach-Programme)의 일환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역사학의 사료론이 체계적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태껏 사료 읽기에 급급한 나머지, 사료비판에 대한 기초적인 훈련도 등한시해온 것이 한국 역사학계의 현주소가 아닌가 한다. 결국 아카이브의 활용을 논하기 이전에, 역사연구의 기초훈련을 위해서라도 사료비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외국의 앞선 경험이 있다면 서둘러 소개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아카이브를 이용한 역사교육방법의 개발, 그리고 그 방법을 작은 부분부터 목적의식적으로 채택하는 운동을 제안하였다. 실제로 역사교육현장에서는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다양한 방법이 실험되거나 이미 응용되고 있으므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아카이브를 금방 역사교육에 활용할 준비와 조건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관심을 촉구한다는 소박한 바램에서 이 글을 작성했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원래 역사학과 아카이브를 이용한 사료비판, 고문서와 현대 문서, 구체적인 아카이브 교육방법의 개발 등은 별도의 논의를 통해 다루어져도 손색이 없는 주제들이다. 후속 연구와 관심을 기다린다.
특히, 아카이브는 정부 활동에 시민들이 참여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통로, 즉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알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민주주의의 실현방안이자 유력한 도구이기도 하다. 조금 더 실천적으로 고민하면서, 지금 제대로 아카이브가 남길 조건을 만들어나가야 앞으로 알찬 역사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질 것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앞으로 역사의식을 가진 시민을 훈련하기 위해서 아카이브에 대한 관심은 정당할 뿐 아니라 시무(時務)이기도 하다.
<書評>
文秀鉉, 메리 E. 위너스-행크스 著, 노영순 譯, 젠더의 역사
<彙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