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수업 구성의 원리와 함의 (全 炳 喆)
1. 머리말
2. 수업 내용의 구성 원리
3. 교수·학습 방법의 구성
4. 역사수업 구성의 함의
5. 맺음말
역사는 객관적일 수 있고, 주관적일 수 있다. 동시에 역사는 존재적 사실로서 다루어질 수 있고, 인식적 문제로서 다루어질 수 있다. 역사의 이러한 특성은 역사수업의 내용과 방법의 구성을 어렵게 만든다. 이에 이 연구는 역사수업의 내용과 방법의 구성 원리와 함의를 밝히고, 교사의 더 나은 수업 구성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역사수업은 내용과 방법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개 분면의 수업 구성 유형으로 논의될 수 있었다. 첫째, Ⅰ분면의 수업 구성으로 존재론·학생 주도형 수업 구성이 있다. 학생들은 존재론적 측면의 사실 내용을 탐구하고, 발견하고, 또는 상상한다. 물론 이들이 탐구하고, 발견하고, 상상하는 것은 모두 존재론적 과거들이다. 둘째, Ⅱ분면의 수업 구성으로 인식론·학생 주도형 수업 구성이 있다. 이 경우 수업은 담론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 개입된 관점을 학생 스스로가 발견하도록 하는 수업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학생들은 제한된 관점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관점, 또는 새로운 관점을 시도해야 한다. 셋째, Ⅲ분면의 수업 구성으로 인식론·교사 주도형 수업 구성이 있다. 이때 학생들은 역사가로서의 통찰력을 발휘하는 교사를 인식적 전범으로 삼아 교사의 인식 과정을 익히게 된다. 넷째, Ⅳ분면의 수업 구성으로 존재론·교사 주도형 수업 구성이 있다. 물론 교사는 그 과정에서 효과적 전달을 위한 멀티미디어 자료 등을 보조 교재로 사용하여 학생들의 이해를 높여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위 Ⅰ-Ⅳ 분면의 수업 구성 형태 중에서 가장 수준 높은 것은 역시 Ⅱ분면의 것이다. 이에 역사교육은 학생들의 수준을 높이며, Ⅳ분면의 수업을 Ⅰ, Ⅲ분면으로 발전시키고, 또 이후에는 Ⅱ분면의 수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물론 교사의 한 차시 수업 구성은 각 분면의 함의가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사는 각 분면 수업의 함의를 알고, 이를 실제 수업 구성에 적절히 혼합하여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수업 구성의 특별한 전문가여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맞는 내용과 방법을 설계하고, 이를 실제 수업에 적용하면서, 끊임없이 수업을 구성해 가는 수업의 주체이다. 역사수업은 절대적일 수 없다. 역사수업에 가르쳐야 할 정형화된 지식이나 특정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론적 역사를 다룰 것인가? 인식론적 역사를 다룰 것인가? 그리고 객관주의 입장에서 교사가 주도할 것인가? 주관주의 입장에서 학생들이 주도할 것인가? 이는 전적으로 내용과 방법의 측면에서 수업 구성을 시도하는 교사의 선택 사항이다. 이를 위해 교사는 수업 구성의 전문가로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대상의 수준은 어떠한가? 등을 끊임없이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 21세기 중국의 세계사 교육 (尹 世 炳)
1. 머리말
2. 課程標準의 개발과 새로운 시각의 반영
3. 자국사와 세계사의 통합
4. 학생 심리와 활동을 고려한 텍스트 구성
5. 맺음말
중국과의 교류나 역사 갈등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최근 중국의 역사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의 세계사 교육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되었다. 먼저 吳炳守는 初中 『세계역사』의 목차 분석을 통해 중국 중심의 세계사 인식을 파악하였고, 鄭夏賢은 상해시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교육과정에 의해 개발한 교과서가 중국사와 세계사의 통합 형태를 취하고 있는 측면에 주목하였다. 宋相憲은 初中 『세계역사』와 高中 『세계근대현대사』의 서술 속에 중화주의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하였다.중국의 세계사 교과서에 관한 본격적인 분석은 朴章培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개혁·개방의 추세 속에서 중국의 세계사 교과서가 계급투쟁사를 위주로 한 서술에서 탈피해 생산력 발전, 문화사, 세 차례의 기술 혁명 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였다.윤세병은 1902년 근대 교육의 도입기부터 2000년까지의 세계사 교육과정의 변화상을 추적하였다. 즉 20세기 중반까지는 유럽과 미국의 서양사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세계사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사회주의 정권 수립 후에는 소련의 영향으로 역사적 유물론과 역사발전 5단계설에 기초한 교육이 자리 잡았으나, 개혁·개방 이후에는 소련의 모델로부터 벗어나 계급투쟁보다는 생산력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반영되고 있음을 분석하였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중국의 역사교육에 대한 연구는 중국의 역사왜곡이나 한국사 관련의 연구가 대부분이며, 중국 세계사 교육에 대한 우리 학계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한편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학계가 서양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대폭 수용하면서 세계사 연구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에 주목한 서양 학자들의 논고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 논고의 대부분은 실용주의 정치노선과 함께 중국의 세계사 연구가 맑스주의 관점으로부터 자본주의 세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점에 주목하고 있으나 중국의 세계사 교육에 관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실시되는 중국의 세계사 교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미국과 함께 G2라 불릴 정도로 중국의 국제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변화된 자기 위상에 맞춰 새로운 세계 인식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그것이 세계사 교육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21세기를 무한 경쟁의 시대로 보고 세계 각국이 교육개혁에 많은 힘을 기울이는 것에 발맞추어, 중국 역시 국제적인 위상 제고를 위해서 교육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역사교육에서는 기존의 ‘복잡함(繁)·난해함(難)·세세함(深)·구태의연함(舊)’을 과감히 탈피해서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이 아닌 학생 스스로 탐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교육을 표방하고 있다.본고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교학대강에서 과정표준으로 교육과정 개발 방식의 변화, 現代化史觀과 全球史觀으로 대표되는 90년대 이후 새로운 세계사 연구 경향의 반영, 자국사와 세계사를 통합하려는 다양한 시도, 교육 개혁을 선도하고 있는 상해판 역사 교과서의 세계사 그리고 학습자의 수준과 활동을 고려한 교과서 서술의 변화 등을 살펴볼 것이다.
◆ 미국에서의 자국사 교육 학년별 내용 조직 분석 캘리포니아, 미시간, 아이오와 주 사례 연구 (李 美 薇)
1. 서언
2. 미국 교육 개혁 흐름 속 주별 역사 내용 표준의 현황
3. 캘리포니아, 미시간, 아이오와 주의 자국사 내용 조직
4. 결어
학교 교육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에 해당하는 교육과정 논의는 대한민국 역사교육 담론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다. 역사교육의 강화와 내실화는 역사교과의 편제, 교과서 구성, 시수 확보 등 교육과정 논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 교육과정 논의에서 초·중·고등학교 역사교육 내용의 체계적 구성은 국가 교육과정의 개정이 있을 때마다 주요 과제로 제시되었다. 교육과정이 교육에서 지니는 중요성과 교육과정의 체계적 구성의 필요성은 우리나라에 한정되는 문제는 아니다. 우리처럼 사회과를 주요 교과의 하나로 채택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최근 30년간 교육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담론 속에서 무엇을 언제 가르칠 것인가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경우 역사 교육과정의 학년별 내용 조직은 어떤 논리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경우, 교육과정상 국사 교육이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학교급별간 차별성이 크지 않다는 역사교육 내외의 비판을 받곤 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경우는 자국사 교육의 학년별 내용 조직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을까? 다른 나라의 경험을 자세히 살피는 것은 우리의 교육과정 논의를 보다 분명히 하고 풍부히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본고는 공교육 상에 있어서 미국의 자국사 학년별 내용 조직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을 논하였다.
◆ 대한제국기 역사교과서 편찬과 근대역사학 동국사략(현채)의 당대사 서술을 통한 ‘국민 만들기’를 중심으로 (李 信 澈)
1. 머리말
2. 대한제국기 역사교과서 편찬과 동국사략
3. 동국사략의 당대사 인식과 조선근세사 譯述
4. 동국사략의 동시대사 敍述과 근대적 역사인식
5. 맺음말 : 동국사략의 ‘국민 만들기’
玄采의 『東國史略』(1906)은 획기적이고 근대적인 서술방법(新史體)을 도입한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역사교과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 책을 일본인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가 쓴 『조선사』(1892)와 『조선근세사』(1901)의 번역서로 인식하여 한국 근대역사학의 선구적 위치를 부여하기를 꺼려한다. 『동국사략』은 “체제 면에서는 근대적 방법을 도입해, 영역별로 분류하고 주제별로 분석하는 발전적 형식을 취하고 있고, 고대사 부분에서 단군관련 서술 등 일부 부분에서 민족적인 서술로 수정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식민사학에 본격적으로 함몰된 책”이라는 평가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평가에 근거해 『동국사략』은 한국 근대사학사 논의에서 배제되고, 한국 근대사학의 원류는 신채호를 출발로 하는 민족주의사학으로 통용되어 왔던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비판적 인식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당대에 신채호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신채호의 비판은 대한제국에서 펴낸 교과서들의 고대사 서술이 사대적이며 종속적이라는 것이고, 현재의 비판은 『동국사략』이 식민사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최근 『동국사략』에 대한 재평가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윤선태는 갑오~광무개혁정권은 하야시의 조선사체계를 ‘국사’로 수용하여, 청으로부터 독립한 근대 조선의 ‘국민’을 창출하려고 했으며, 현채는 『조선사』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하야시가 강조한 ‘임나일본부설’을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청만이 아니라 일본까지도 조선민족의 타자로 의식하는 ‘국사’의 확립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도면회의 경우에도 근대역사학의 임무가 국민의 양성이었다는 점에서 제도로서의 역사교육과 정통론적 통사체계의 확립을 도모하고 있는가를 근대 역사학의 주요한 지표로 설정하고,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현채의 『동국사략』을 한국인이 쓴 최초의 근대적 통사라고 평가하였다. 이외에도 현채와 『동국사략』을 둘러싼 평가와 논쟁은 당시대는 물론이고, 해방 후인 196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또 그러한 논의는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전개되었다. 그만큼 그와 그의 저작이 가지는 의미가 적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적지 않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아직 논의가 충분하다고 하기에는 미흡한 측면이 있다. 이글에서는 『동국사략』이 『조선근세사』의 당대사, 그 중에서도 특히 개항이후의 서술을 어떻게 역술했는지, 그리고 1894년 이후 동시대사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이를 통해, 『동국사략』이 가지고 있는 근대역사서로서의 성격을 규명하고 ‘국민 만들기’라는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려고 하는지를 실체적으로 규명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 근대역사학의 성격규명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자 한다.
◆ 渤海와 日本의 交流 航路 變化에 관한 연구 (具 蘭 憙)
1. 머리말
2. 양국 교류 항로의 제유형
3. 양국 교류 항로의 양상 변화
4. 맺는말
발해와 일본의 교류가 이루어진 8세기와 9세기는 동아시아 각국이 선진문물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국가 발전을 도모하고 밖으로는 국제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해 나가던 때이다. 각국은 서로 협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립·경쟁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양상으로 교류를 전개해 나갔다. 발해는 일본에 모두 35차례 사신을 파견하였고 일본 또한 발해를 14차례 방문하였다. 양국의 교류는 교류 환경을 감안해 보면 단절없이 이어졌으며 특히 9세기 이후 일본의 공식적 대외 교류는 발해가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촌강 전투 패배 이후 신라에 대한 경계심이 고양되는 가운데 신라를 번국시하는 일본조정은 신라와의 교류에서 크고 작은 외교적 마찰을 겪다가 결국 799년 이후 양국 조정간 교류는 단절되었다. 뿐만 아니라 견당사 파견 또한 백제멸망 이후 한반도 서해안을 경유하는 북로가 아닌 南(島)路를 이용하면서 조난을 거듭하고 대사 임명자의 稱病 등으로 파견이 중지되기도 하면서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해의 존속 기간과 당시 일본의 대외 인식을 감안해 볼 때 양국간 교류는 당대의 어느 국가들보다 상대국을 비중있는 외교 대상국으로 인식하고 활발하게 교류를 전개해 나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양국 교류에 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있는 가운데 교류의 양상과 시기별 변화, 그리고 그 배경을 밝혀내는 데는 다양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첫 번째는 양국 교류의 내용을 통해 시기를 구분하는 방법이다. 濱田耕策은 크게 727년 9월부터 759년 10월까지를 1기로, 762년 10월부터 810년까지를 2기로, 814년 9월부터 마지막까지를 3기로 구분하였다. 제1기는 발해의 대외적 위기를 타개하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으며 무관 대사가 파견된 시기로 보았다. 제2기는 문관 대사가 파견되면서 정치적 목적보다는 교린적 성격으로 변화하였으며 발해의 대외적 위상이 강화되고 당과 일본간의 중개적 역할이 활발해지는 시기로 해석한다. 마지막 제3기는 交隣이 정례화되면서 파견단 규모가 100~105인으로 구성되어 활발한 교역이 전개되는 시기로 보았다. 특히 2시기와 3시기의 구분을 送使 파견의 단절로 보고 있다. 국내에서도 박진숙이 양국 교류를 3시기로 나누고 정치외교, 경제외교, 문화외교로 대별한 바 있다. 森公章은 4시기로 구분하고 신라정벌계획 논의를 기준으로 정벌이 논의되던 시기를 전후 두 시기로 나누고 3시기와 4시기는 방문기한 논의를 기준으로 제한이 완화되는 시기를 마지막 4시기로 삼고 있다. 이처럼 변화 시기를 8세기 중반, 그리고 8세기말 9세기 초로 본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정치 중심의 교류에서 경제 중심의 교류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발해에 대한 일본의 태도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점은 차이를 보인다. 이와는 달리 교류의 외형 조건인 항해 상황을 살피면서 양국 교류의 양상 변화를 해석해 보려는 시도가 있다. 구체적인 시기 구분은 학자들마다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보아 8세기 말과 9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를 기점으로 도착지 내지는 도착 시기의 변화, 파견단 규모의 확대 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海事史的 관점에서 항해술의 발달이라는 시각에 두고 일본학계는 그 원인을 일본의 동행 내지는 선박 제공으로부터 찾고 있다. 또한 출발항이 포시에트만에서 남경남해부로 변화한 데서부터 원인을 찾기도 한다. 해사사적 연구는 양국 교류의 실상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해양기술사적 시각을 접목함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넓힌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류의 양상 변화를 지나치게 기술사적 관점에 가두어 놓고 양국간 시시각각 전개되는 대내외 정세, 그리고 이와 연계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일본중심의 양국 관계 해석을 뒷받침하는 성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제기된다. 도착지 변화와 선단 규모가 보여준 변화를 항해기술의 발전으로 보는 입장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발전이 일본의 선진 항해술의 영향이라는 해석은 검토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이 글은 해사사적 관점에서 살필 수 있는 교류의 양상 변화의 실상은 어떠한가? 변화 양상으로 지적되는 제요소간에는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하는가? 양상 변화를 양국 교류의 내면과 그것에 작동하는 다양한 대내외 정세와 연계할 수 있는 접점은 없는 것일까? 등의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면서 교류 항로 변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 이능식의 생애와 역사연구 (文 敬 鎬)
1. 머리말
2. 이능식의 생애
3. 역사교육자로서의 이능식
4. 역사연구와 역사관
5. 맺음말
광복 직후 이 땅에는 다양한 사관을 표방하는 연구자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혼란 속에서도 일제 강점기의 연구 성과를 정리·수용하는 한편, 종래의 민족사학, 사회경제사학, 실증사학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역사 연구 방법론을 모색하였다. 이능식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식민사관으로부터 우리 역사를 해방시키고, 다양한 역사관이 혼재·대립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역사이론을 정립시키려 하였다. 또한, 그는 경북중학과 서울대 역사교육과에서 역사를 강의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역사연구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려 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생애를 정리하고, 그의 연구가 우리 역사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를 재조명하였다. 경북중학과 서울사대 역사교육과 시절 제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역사교육자로서의 그의 품성과 이후의 역사 연구자와 역사교육자들에게 끼친 영향을 살폈으며, 그가 유물론에 우호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사회·경제사학과 실증사학의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광복 후 한국 역사학계의 사상적 혼란을 정리하려 했음을 재조명하였다. 종래 한국 근대사학은 민족 사학, 사회경제사학, 실증사학 등으로 크게 구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해방 전후에 활동한 역사가들 중에는 이능식과 같이 그런 구분으로 분류할 수 없는 중도적 성향의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본고는 광복~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史觀을 달리하는 여러 영역에서 활동했던 역사학자와 역사학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 宋·遼·金 및 高麗 帝王 生日考 (金 成 奎)
1. 머리말
2. 동아시아 각국 제왕의 생일
3. 節日의 명칭과 ‘改期受賀’의 유행
4. 맺음말
중국에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관습이 唐에서 시작된 이래로 五代를 거쳐 宋代가 되면 특히 성행하게 된다. 송대에 이르러 황제의 生辰은 正旦과 함께 왕조의 최대 명절을 구성한다. 또한 이 관습은 인근의 요, 금 왕조는 물론 고려에서도 유행하였다. 특히 송과 요․금 왕조는 생신사를 정기적으로 교환하는 새로운 형태의 외교 방식을 개시하였고, 여기에 그들과 관계가 깊었던 고려 및 서하의 사절을 동석시킴으로써, ‘생신사의 교환’은 동아시아 외교사에서 새로운 영역으로 등장․정착하였다. 생신을 축하하는 자리에 외국사를 동석시킴으로써 군주의 왕권을 고양시키려한 것은 당시의 왕조에 공통된 사항이었다. 이를 반영해 10~13세기의 동아시아 각국의 문헌에는 생신사의 파견과 도착을 알리는 기록이 수없이 눈에 띈다.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생신사의 왕래는 외교 관련 사료에서 내용상 가장 많은 교류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이 문제에 대한 학계의 관심과 연구는 결코 많지 않았다. 각국 帝王의 생일이 언제인가, 하는 간단한 문제에서부터 그 節日(기념일)의 명칭을 둘러싼 문제, 또는 그 축하를 위해 해당국과 인근 왕조 사이에서 어떠한 원칙과 절차를 통해 사절을 주고받았는지 등에 이르기까지, 해명할 부분이 적지 않다. 전자의 두 문제는 비교적 단순한 문제라 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정리가 이루지지 않았을 뿐더러, 당시의 동아시아에서의 사절단의 왕래를 이해할 때 기준점을 제시하는 사항이므로 이를 확정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정리하는 한편, 무엇보다 ‘개기수하’라는 형식의 생일 축하 방식이 송을 제외한 요와 금, 그리고 고려에서도 폭넓게 유행한 것을 확인하였다. 요에서 시작된 ‘개기수하’는 기본적으로 행사와 관련된 인력의 동원과 경비를 경감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본고에서는 또한 이상의 문제를 송-요, 혹은 송-금처럼 1대1의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주변의 고려 등의 왕조를 함께 포함하는 다각적 관찰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제왕의 생일을 둘러싼 특징들을 폭넓게 검토하였다. 이 때, 고려를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은 분석의 범위를 확대시킨다는 단순한 의미만이 아니라, 중국사 내부의 문제만으로 시야를 고정시킬 때는 알기 어려운 점들이 고려의 입장을 도입시킴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려의 역사에서 일대 외교 현안을 이룬 생신사 파견의 내용과 의의도 중국사와의 결부를 통해 비로소 그 진상이 파악되는 부분이 적지 않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사상 군주의 ‘생일’은 儀禮와 같은 각 왕조의 내부적 측면을 별도로 규명해야 할 점이 있지만, 본고에서는 이 문제를 기본적으로는 외교 문제의 측면에서 검토할 것이다.
◆ 로마 공화정 후기 교육 환경의 성숙 도서관 건립과 그리스 지식인의 활동을 중심으로 (安 熙 惇)
1. 서언
2. 도서관의 건립과 교육적 영향
3. 그리스 지식인의 활동과 교육 환경의 성숙
4. 결어
로마 공화국은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점차 등장하기 시작한 기원전 2세기 이후 그리스인의 교육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로마인들은 화려한 그리스 문화에 열광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경계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제국의 운영에 그들의 학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이 추구하는 파이데이아의 교육과 문화의 이상에 공감하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그들의 학문적 업적의 결과물인 방대한 도서를 접하였고, 그 장서들을 로마로 들여와 도서관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세기 전반 이래 로마에 등장한 여러 대규모 도서관들은 로마 사회에 학문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리스 학문의 교육 열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도서관들은 헬레니즘 세계 그리스 지식인들을 로마로 끌어들이는 자석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귀족 가문의 유력자들은 문인 보호제를 통하여 그리스 지식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학문과 교육활동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은 로마 사회의 교육 환경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규모 도서관의 등장과 문인을 대우하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지식인과 더불어 토론하는 가내 분위기 등은 학생들의 학구열을 자연스럽게 고양시켰을 것이다. 폴리비오스는, 로마인들은 교육제도에 대하여 국가적 차원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였지만, 키케로는 로마인의 교육 방식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그의 지적을 반박하였다. 키케로의 자신감은 공화정 후기 로마의 이러한 교육적 환경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 1960년대 서독의 원외반대운동(Die 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APO)) (金 鎭 浩)
1. 머리말
2. SDS와 APO의 시대적 배경
3.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er Schule)와 APO
4. 대연정, 긴급조치법과 APO의 소멸
5. 맺음말
원외반대운동은 1960년대 서독에서 사회주의 대학생조직인 SDS를 중심으로 있었던 정치적 운동이다. 대연정으로 인해 원내에서 실질적으로 야당이 없어진 상황에서 원외반대운동의 당위성은 설득력 있었다. 당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원외반대운동 시위는 매우 격렬했다. 1960년대 서독의 정세는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다. 국제적으로는 초강대국들의 데탕트 논의가 가시화되었던 상황이었고, 프랑스의 독자노선 및 나토 탈퇴, 핵공유 프로그램의 폐기(MLF/ANF)와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이행을 통한 핵 현상유지를 꾀하던 상황이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건설 이후 독일분단의 현상유지는 데탕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국제적으로는 독일분단과 희생을 전제로 긴장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이러한 유럽의 데탕트 상황과 대조적으로 미국은 월남에 대한 개입을 증대하면서 막대한 전비를 지출했고, 이에 대한 국제적 여론은 매우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국내에서는 1958년부터 내무부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긴급조치법이 현실화되는 상황이었고 이에 대해 SDS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은 반대했다. 원외반대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은 대연정 수립이었다. 대연정을 통해 실질적 야당이 없어짐과 동시에 긴급조치법안의 통과가 유력화되었기 때문이다. 대연정과 긴급조치법은 원외반대운동을 통해 강력히 반대했던 부분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월남전 확대와 미국의 월남전을 지지하고 협력하는 서독정부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다. 이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의 비판이론에 대한 재조명과 신좌파이론의 등장은 원외반대운동의 사상적 근거로 작용했다. 그러나 반권위주의파인 급진주의자들의 등장은 원외반대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화시켰다. 이들은 폭력도 불사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과격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도르노를 비롯한 비판이론가들도 폭력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원외반대운동은 대연정의 소멸과 월남전의 종식을 공약으로 당선된 닉슨 대통령의 취임, SDS 내 반권위주의파와 전통주의파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원외반대운동 자체가 정치적 차원의 대립과 더불어 세대갈등 문화적 차원의 대립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수용되고 합의되기가 매우 어려운 측면이 있었으며 세대간 문화 충돌 및 저항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한계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과격화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1960년대 원외반대운동을 통해 당시 서독의 사회상과 당시 국제적 국내적인 상황들을 보다 면밀히 이해할 수 있다.
[批評論文]
◆ 민주주의의 눈으로 본 역사학 (金 正 仁)
1. 머리말
2. 중도 통합 가치로서의 신민주주의
3. 민족주의에 내재된 민주주의
4. 민중주의의 부상과 민주주의의 환기
5. 민족주의·민중주의에 대한 비판과 역사학의 민주화 제기
6. 민족주의의 혁신과 민주주의의 귀환
7. 맺음말
1980년대 이후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족과 민중, 이념으로서의 민족주의와 민중주의가 정통론적 역사인식으로 시민권을 획득해가던 역사학의 풍토 속에서 민주주의는 역사화의 대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민주주의란 민중 주도의 민족 통합을 지향하는 민중적 민족주의를 학술운동의 이름으로 실천하는 ‘지금 여기’의 민주화 투쟁이지 역사화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87년 체제’ 하에서 민중적 민족주의 역사인식이 역사학은 물론 역사교육에 뿌리내리는 가운데 진보와 보수의 이념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어느새 역사학은 뉴라이트와의 역사전쟁에서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전사가 되었다. 진보와 보수의 편가르기가 극심해질수록 역사학은 사회 통합이 아니라 진영 논리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는 의도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했다. 민족 통합을 지향하면서도 사회 통합에는 실패한 역사학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마침내 성찰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탈근대를 화두로 문제제기에 나선 역사학자들은 민족주의·민중주의에 입각하지 않은 역사학을 옳은 노선이 아니라며 배척하는 역사학의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문화를 비판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풍토를 만들어 나갈 것을 제기했다. 사회 민주화에 호응하여 역사학의 민주화를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안의 파시즘’ 문화에 대한 성찰적 도전에 대해 역사학계 주류는 거부감을 나타내며 탈근대론의 민족주의 비판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라는 이론적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탈근대론자들이 민족주의 역사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역사학의 민주화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역사학계가 민중적 민족주의적 역사 인식만이 당위라는 독선적 사고와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후자의 문제제기는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역사학 안팎을 들썩이게 했던 갈등이 쉽게 해결되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는 역사학이 점점 친북좌파로 매도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감내해야 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보편 가치에 주목해 보자. 근대와 반근대, 그리고 탈근대를 넘어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득세하는 新近代를 살아내야 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국가와 시장을 견제 혹은 견인하며 사회 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는 보수도 진보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가치, 바로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그 민주주의를 준거로 새로운 역사상의 구성을 시도함으로써, 역사학 역시 민족 통합만이 아니라 사회 통합에 일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학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역사학자 중에도 민주주의의 역사화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적지 않고, 뉴라이트가 산업화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렇다고 민주화를 부정하지 않는 역사관을 갖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다. 탈근대론자도 시민과 민주주의를 역사인식의 키워드로 주장한 바 있다. 최근에는 민족주의·탈민족주의 프레임에 관계없이 중진·소장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의 역사화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고 있다. 민주주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역사화하고자 하는 ‘문화적 전환’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본고는 역사학이 주관적으로는 중도·합작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친북좌파로 매도되는 모순적 상황을 타개하고, 민족 통합만이 아니라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길을 걷는 데 민주주의의 역사화 노력이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바탕으로 해방 이후 역사학의 역사를 민주주의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해방 후 역사학에서 민주주의가 민족주의·민중주의가 압도하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며, 최근 어떤 경로를 통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書 評]
◆ 李景植 著, 高麗時期土地制度硏究 土地稅役體系와 農業生産 , 지식산업사, 2012 (李 炳 熙)
[彙 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