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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27輯 (2013. 9. 30.)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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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교육 이론 적용의 공과 (梁 豪 煥)


 


1. 서론


2. 다시 돌아보는 이론과 현장


3. 이론 적용의 난맥: 계열성 적용의 사례


4. 결론


 


역사교육의 이론은 학문의 체계성을 갖추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그 본질적인 존립의 근거와 의미는 역시 역사교육의 현실과 현상을 개선하고 분석하는 것에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우리나라 역사교육연구의 역사 가운데 초기부터 이론과 현장의 관계에 관심이 컸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이렇게 상정된 역사교육 이론의 역할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다만 이때 ‘이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혹은 그 이론을 현장에 적용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제 이 문제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검토되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첫째, 여러 연구자들의 역사교육 이론이 최근에 잦았던 역사교육과정과 정책 변화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때 이론은 역사교육의 의미·가치·방법에 대한 관점·견해·원칙·학설 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둘째, 최근 들어 역사교육의 연구 범위가 가장 현실적인 역사교육의 현안이라 할 수 있는 교과서와 교실수업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어, 연구의 주제와 주체, 활용의 의미와 방법을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여, 나는 이 글에서 역사교육 분야에서 이론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가장 시급히 검토해야 할 이론 적용의 분야와 사례는 무엇인지, 왜 그러한 검토가 시급한지 등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다만 다양한 역사교육 이론 중에서도 최근 연구가 활발한 분야, 예를 들면 교수내용지식, 내러티브, 역사적 사고 등에 관해서는 개별적으로 연구의 성과와 의미, 현장적용의 방안에 대한 평가가 축적되어 왔으므로 이 글에서 이를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대신 교실수업이론과 현장의 관계, 그리고 교육과정구성에 관한 학설의 제기와 적용에 관한 문제에 논의의 초점을 두고자 한다.


 


◆ 1990년대 이후 역사교육 정책 네트워크의 구조와 양상 변화 (具 蘭 熹)


 


1. 머리말


2.. 역사교육 정책 네트워크의 이론적 탐색


3 . 정책 네트워크의 양상 변화와 특징





4.. 결론에 대신하여


 


 


 이 연구는 역사교육정책이 거버넌스를 지향해야 한다는 전제로 역사교육을 둘러싼 정책 네트워크의 구조와 양상을 분석하였다. 역사교육 정책을 구성하는 3가지 요구로 학문적 요구, 심리적 요구, 국가사회적 요구를 설정하고 네트워크의 행위자 집단으로 정부, 학계, 민간을 3축으로 삼았다. 이러한 네트워크 구성 요소를 토대로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기간을 4시기로 구분해 보았다. 첫 번째 시기는 1990년대 중후반으로 네트워크의 형성기이다. 정부가 선도하는 단일구조를 벗어나 학계의 성과를 정부 정책에 반영하려는 모색의 시기였다. 비록 학계의 요구는 정치사회적 요구에 의해 묵살되었지만 네트워크의 기본 축을 재편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시기는 일본, 중국과의 역사 갈등을 겪던 2000년대 초반으로 네트워크 확대기이다. 이 시기는 일중과의 갈등 국면을 계기로 한국의 역사교육에 대한 자성적 비판과 재구조화를 모색하는 동시에 역사교육의 국제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세 번째 시기에는 2007 교육과정이 개발되면서 네트워크는 다원화되고 정부와 학계의 다양한 축이 공존하면서 균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동안 정책 네트워크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갖지 못했던 심리적 요구가 논의의 중심축으로 나설 수 있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또한 다원화된 정책 네트워크의 토대 위에서 열린 논의 과정을 구축하고 자율적 참여구조를 지향하였다. 반면 다른 한 축에서는 학계의 학문적 요구가 정부의 학문적 요구로 연계되는 고리를 공격하는 보수 성향의 사회적 요구가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네트워크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구도가 안착되기도 전에 새로운 격돌로 교란되었던 것은 역사교육 전반을 뒤덮는 불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네 번째 시기는 2009년 이후 현재까지로 네트워크의 궤열기이다. 보수 성향의 정치 담론이 역사교육 정책 전반을 독점하면서 다시 통제적 참여 구조로 회귀하고 다양한 논의를 차단하였다. 특정 가치와 견해가 역사교육의 본질을 뒤흔들면서 네트워크의 기본 구조가 무너지고 있다. 결국 지금까지의 역사교육 정책은, 특정 시기의 부분적 시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국가사회적 요구가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역사교육 정책 네트워크라는 분석적 방법을 시도한 취지는 네트워크 내 행위자 집단의 위상과 집단간의 관계망의 현황을 깊어냄으로써 바람직한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 시사점을 제공하기 위한 데 있다. 궁극적으로는 역사학과 역사교육학의 연구 성과, 그리고 현장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실천적 노력이 각 행위자 집단에 의해 정책 담론화되고 궁극적으로 이 담론이 역사교육 정책을 주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 역사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연구 (李 海 榮)


 


1. 들어가는 말


2. 흥미에 대한 연구


3. 분석대상 및 분석 방법


4. 학생들의 흥미 분석


5.. 학생들의 흥미로 본 역사수업의 특징


6. 나가는 말


 


요즘 많은 학생들은 “역사수업은 재미가 없다”, “역사가 지루하다”고 곧잘 표현한다. 흥미가 없는 수업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학습에 흥미가 있는 사람은 학습시간이 늘어나고 학습활동을 반복하며 집중력도 높아져 학습효과가 뛰어나다. 학생들이 학습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는지 혹은 그만두는지는 그 교과에 대한 흥미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기존의 역사교육에서는 내러티브와 같이 교과서 서술방식의 변화를 꾀하거나 연극수업, 토론수업, 역사신문제작, 추체험 글쓰기 등 다양한 수업모형으로 학생들의 흥미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에는 학생들이 어떤 역사내용에 흥미가 있는지를 면담을 통해 탐색한 연구도 등장했다. 강선주는 초등학생 4, 5학년 학생들에게 질문지와 심층면담을 통해 재미있는 역사내용을 조사하였다. 초등학교 4, 5학년은 대체로 갈등구조를 지닌 사건에서 인간의 본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 구체적인 인물이 역경을 극복한 위대한 행위나 업적 또는 인간의 기초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이야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 현재 사고방식, 생활방식과 다른 낯선 과거를 알 수 있는 내용에 흥미를 갖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글은 초등학생들이 느끼는 흥미 있는 역사를 연구하여 교육과정과 교과서 개발에 시사점을 제시했으나 수업 모습을 살피는 연구는 아니다. 원자은은 설문과 면담을 실시하여 역사에 흥미가 있는 학생들의 특성을 밝혔다. 역사에 흥미를 느끼는 학생들은 가족, 역사책, 역사수업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역사에 흥미를 가지며 역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강했고 평상시에도 역사책을 꾸준히 읽었다. 자신의 미래를 역사와 연결지어 생각하였고 역사적 상상력도 뛰어났다. 학생들은 재미있는 역사수업시간의 모습도 제시했다. 이 연구는 13명의 학생과 직접 면담을 통해 역사에 대한 흥미 정도를 조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역사에 흥미가 없는 학생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켜 줄 방안을 찾기는 어렵다. 이정우는 서울지역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들에게 사회수업 태도를 선호도, 중요도, 흥미도, 난이도로 나누어 조사하였다. 학생들은 사회과목을 다소 약하지만 긍정적으로 인식했다. 단원별 흥미도와 난이도를 보면 일반사회 영역은 지리나 역사 영역에 비해 다소 재미없고 어렵다고 평가하였다. 성별을 제외하면 학년, 사회 성적, 사회수업 평가 점수 모두 사회과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미쳤고 사회과에 대한 태도를 가장 잘 설명하는 변인은 사회 성적이었다. 기존 연구와 달리 학생들이 수업을 평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연구라는 점에 의의가 있으나 일반사회, 지리, 역사 영역을 묶은 사회수업에 대한 학생의 태도를 통계로 조사하여 학생들의 구체적인 의견을 찾기 힘들고 역사영역에 대한 언급이 미약하다. 고등학생들은 자의든 타의든 공부를 해야만 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도 하지만 공부에 흥미가 없어 보인다. 공부에 흥미를 잃은 학생들은 수업 중에 졸리고 지루하다는 표정을 역력하게 드러낸다. 학생들을 수업 속으로 끌어오게 할 수는 없을까? 이들이 역사수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업에 흥미를 느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등학생들의 역사수업에 대한 흥미를 다룬 연구는 미진한 편이기에 최근 학업 흥미에 관한 국내외 연구를 토대로 학생들의 역사에 대한 흥미를 밝혀보고자 한다. 특히, 이 글은 다양한 수업모형이 아닌 설명식 수업 속에서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부분을 찾아보았다. 일반적으로 수업모형을 다양화하거나 다양한 교재를 사용하면 학생들은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등학교 역사수업은 방대한 내용분량에 비해 수업 시수는 적고 어려운 역사용어나 개념 등을 쉽게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교사가 설명식으로 수업을 주도한다. 현실적인 수업 상황에서 학생들의 역사수업에 대한 흥미를 찾아보는 것이 흥미를 유발하는 기초 작업을 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


 


◆ 역사교사양성과 선발의 간극 : 수업전문성을 중심으로 (方 智 嫄)


 


1. 여는 글


2. 역사교사 양성과정의 수업전문성


3. 역사교사자격기준과 선발과정의 수업전문성


4. 간극의 내용과 그 원인


5. 맺는 글


 


예비 역사교사를 양성하는 과정의 핵심은 ‘성장가능성으로서의 수업전문성’ 함양이다. 이 때 수업전문성의 내용은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책임감과 교육적 관점, 자기 발전을 위한 성실한 자세, 수업을 위한 기본지식과 능력 등이다. 이 중에서도 연구자들과 교사들은 역사교육관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수한 교사의 양성과 선발을 표방하는 국가의 질 관리 정책에서도 수업전문성을 중시한다. 양쪽 모두 수업전문성을 말하지만, 둘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와 간극이 존재한다. 교사로 선발 임용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평가되는 수업전문성은 오늘날의 학교 현장의 요구와 역사교육계에서 주장하는 역사교사전문성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 차이는 공개경쟁시험을 통해 역사교사를 선발하는 제도 및 시험의 출제와 관리 운영에서 오는 한계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양적 평가기준에 의해 당락을 결정해야 하는 선발시험의 특성상 역사교육관이나 신념, 교재 재구성 능력 등 역사교사 전문성의 본질적인 부분은 평가영역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3단계로 시행된 임용시험의 평가문항과 평가 방식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된다. 두 가지 전문성 사이의 간극의 내용과 원인을 확인하는 이유는, 바로 그 간극의 존재가 역사교사 양성과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역사교사 양성과정에서 추구하는 수업전문성은 단일하게 표준화된 지표나 양적 기준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좋은 역사교사를 양성하려면 앞서 말한 두 가지 수업전문성의 차이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교사양성 양성과정의 수업과 프로그램이 선발시험의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노력하고, 교사선발제도를 보완하며, 수업전문성을 좀 더 폭넓게 평가할 수 있는 문항을 출제하고, 수업실연평가의 질적인 측면을 보완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 1970년대 일본의 국가주의 역사교육 강화 ― 1969·1977년 학습지도요령을 중심으로 ― (具 京 南)


 


1. 머리말


2. 1969년 학습지도요령과 국가주의의 부활


3. 1977년 학습지도요령과 공민교육으로서의 역사교육


4. ‘요령의 교육내용과 교과서 서술




5. 맺음말


 


戰前 군국주의 교육의 중심이었던 일본의 국가주의는 급변하는 국내외적 정황 속에서 전후에도 부활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후 일본의 교육정책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전전의 국가주의 교육의 부활은 학습지도요령을 개정하고, ‘요령’에 의한 교과서 검정을 통해 교육현장을 강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정부의 교육정책의 변화에 따라 역사교육의 교육목표나 편제, 교육내용, 교과서 서술도 큰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이 글은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1970년대 일본 정부가 추진한 역사교육의 지향점을 학습지도요령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1969년 ‘요령’은 ‘국가・천황에 대한 충성과 경애’를 강조하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역사교육을 지향했다. 1969년 사회과 교육과정은 ‘π형’ 사회과 체제로 개편되면서 역사를 중시하고 도덕교육을 별도로 설치하여 강조함으로써 사회과 전체의 도덕교육화를 심화시켜 나갔다. 다음 1977년 ‘요령’은 역사교육의 목표를 공민으로서 사회와 국가에 종속된 ‘국민 만들기’로 정하였다. 이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도구 교과로서 역사교육이 전락한 것을 의미한다. 끝으로 일본의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 강화 교육과 공민으로서의 역사교육은 청․일, 러․일전쟁의 교과서 서술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자국사 중심의 편협한 역사교육으로 나타났다. 결국 이러한 1970년대 일본 정부의 국가주의 역사교육 강화는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일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우경화 흐름, 또 東아시아의 역사 갈등 사태와도 관계가 매우 깊다.


 


◆ 독일 중등교육과정의 유럽사 교육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사대 주의 김나지움 역사교수계획안(Lehrpläne)을 중심으로 ― (朴 慧 井)


 


1. 서론: 독일 역사교육의 유럽지향주의


2. 교수지침(Richtlinie)과 교수계획안(Lehrplane)


3. 바이에른 주의 김나지움 교수계획안유럽중심주의에 기초한 국제적 현실인식의 함양


4. 베를린/브란덴부르크의 기본교수계획안(Rahmenlehrplan): 독일사 중심의 민주주의 정치교육


5. 작센 주의 김나지움 교수계획안탈락된 구동독사와 동유럽사의 복원


6.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의 핵심교수계획안(Kernlehrplan): 민족 중심의 정체성의 극복을 위하여


7. 결론


 


유럽연합의 확장과 공고화와 더불어 독일은 유럽사 연구와 교육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본 논문은 하나의 통일적 공동체로서의 유럽 개념과 유럽적 정체성 고취를 위한 수업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고, 유럽중심주의의 관점은 수업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보다 큰 관점인 지구사적 시각에서 볼 때 현 유럽사 교육은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는지와 같은 질문들을 중심으로 수업 현장에서 유럽사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한 분석자료로는 교사들이 수업준비시 필히 참고해야 하는 구속성을 갖는 바이에른,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작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의 역사교수계획안이 사용되었다. 사대 주의 역사교수계획안들 모두가 유럽통합과 세계사적 이해 함양을 위한 적합한 내용들을 갖추고 있었지만 사인사색의 다양성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는 수도권으로서의 위상에 걸맞게 전통적인 정치교육적 색채가 강한 유럽사 교육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작센 주는 동유럽 및 구동독사와 관련된 내용을 대거 포함시키는 특징을 보였다. 세계사 지향적인 유럽사 교육에 가장 적극적인 것은 바이에른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였다. 양주 모두가 유럽중심주의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전자가 보다 유럽패권적 관심에서 접근하고 있다면, 후자는 문화비교적 방법론에 입각한 보다 다원적이고 포괄적인 세계사 이해를 지향하고 있었다. 2012년 동아시아사 과목을 아시아 최초로 도입한 우리의 교육현실에서 볼 때, 독일의 유럽사 교육 내용과 방식은 한 편으로는 지역통합적 역사 이해와 공고한 공동체 의식의 함양, 다른 한 편으로는 전 지구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다문화주의의 맥락에서 각각 유용한 반면교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 도고 미노루(東鄕實)의 식민정책론 ― 농업식민론과 ‘비동화주의’ ― (朴 羊 信)


 


1. 머리말


2. 삿포로농학교와 日本植民論-식민정책론의 원점


3. 독일유학과 식민정책론의 구성





4. 민족심리와 비동화주의’-‘차별 즉 평등


5. 맺음말


 


도고는 1924년 정치가로 전업한 후에도 식민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정치가 도고에 대해 “매우 온순한 학자풍의 사람으로, 정치가다운 뻔뻔스러운 점이 조금도 없는 호신사이다”라는평에서 엿볼 수 있듯이 도고는 여전히 학구적이어서, 도쿄상과(東京商科)대학, 타쿠쇼쿠(拓殖)대학, 니혼(日本)대학, 도요(東洋)대학 등에서 강사로 식민정책 관련 강의를 했으며, 농림학교·실업학교의 교과서용으로 植民學敎科書(1930)를 출간하기도 했다. 정치가로서 특히 농정분야에 상세했으며, 농업공황에 직면해서는 해외식민과 이주를 권장하였다. 도고의 식민정책론은 삿포로농학교의 식민학에서 비롯된 농업식민론과 동화주의에 반대하는 ‘비동화주의’를 두 축으로 하고 있었다. 당초 농업식민론은 일본 국내의 과잉인구 해소와 대외팽창 실현의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지만, 독일유학에서 깨닫게 된 식민지민의 ‘민족적 자각’에 대한 대비책으로도 자리매김 되게 되었다. 즉 도고는 대만농업식민론을 통해 일본 농민을 대만으로 이주시켜 식민자의 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한편 식민지민의 ‘민족적 자각’에 대한 대비로 더 중요하게 강조된 것은 동화주의의 회피, 즉 ‘비동화주의’였다. 도고는 독일의 내국식민정책이 내포하고 있던 폴란드인의 ‘박멸’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결과적으로 폴란드인의 ‘민족적 자각’을 촉진했음에 주목하여, 식민지민의 민족성을 파괴하려는 동화주의는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했다. 동화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세계식민사에서 동화정책은 실패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식민정책학의 학지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었다. ‘비동화주의’의 주장은 1920년대 대만에서 전개된 동화주의 정책을 계기로 더 강화되었다. 특히 이때의 ‘비동화주의’는 민족심리학이라는 이론적 토대 위에 구성되게 된다.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민족심리=민족정신은 고정성과 영속성을 갖기 때문에 한 민족을 새로운 제도와 교육 등을 통해 동화시키는 것은 애당초 무리라는 것이다. 식민지의 관습과 제도를 존중한 위에 별도의 정치체로서 통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도고의 입장이었다. 그는 이를 ‘차별 즉 평등’이라는 문구로 표상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도고의 ‘비동화주의’는 어디까지나 식민지가 모국보다 열등하다는 양자의 불균등성을 전제로 한 논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의 관습 존중을 전제로 한 자치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식민정책적 관점의 관철이었다. 즉 도고의 ‘비동화주의’에서는 식민지민의 권리를 포함하여 식민지측으로부터의 관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차별 즉 평등’이라는 논리모순적 표상은 바로 식민주의자 도고의 입각점을 무엇보다도 사실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 [書評] 이영효 著, 『역사교육탐구』, 전남대출판부, 2012. (金 玟 政)


 


◆ 종합토론: 춘계학술대회-'역사교육의 현실과 당면과제' 종합토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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