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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33輯 (2015. 03. 31.)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62

● 역사학습의 목적과 역사교사의 역사교육 목적에 대한 중고등학생들의 인식 - 白  銀  珍


1. 머리말
2. 연구의 내용과 방법
3. 역사학습의 목적에 대한 인식
4. 역사교사의 역사교육 목적에 대한 인식
5. 맺음말
 
 본 연구는 역사수업의 행위 주체인 역사교사와 학생 가운데 특히 학생의 인식을 다루었다. 그 가운데서도 학생이 생각하는 역사교사의 역사교육 목적을 심층면담의 방법으로 연구하였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학생이 생각하는 역사학습의 목적도 알아보았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자신이 참여하는 학교 역사수업에서 어떠한 측면에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연구 대상은 서울과 경기지역의 중학생 6명과 고등학생 9명, 총 15명이었다.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들이 면담에서 밝힌 역사학습의 목적은 현재 자신을 가르치는 역사교사보다는 그동안 자신이 겪은 개인적 경험과 맥락에서 비롯한 이해에 기초한 경우가 더 많았다.
둘째, 일부 학생들이 교사의 역사교육 목적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교사의 관점에 대한 공감을 뜻하지는 않았다.
셋째, 일부 학생들은 교사의 역사교육 목적이나, 교사가 자신의 역사교육 목적에 기초해 선정한 역사수업의 내용이나 방법에 대해 자신의 이견과 판단 근거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넷째, 학생이 교사의 역사교육 목적을 이해하는지의 여부는 학생 개인의 학업성취도와 관련이 있지는 않았다.
이처럼 학생이 생각하는 역사학습의 목적과, 학생이 인식하고 있는 역사교사의 역사교육 목적에 관해 이해하는 것은 역사교사와 학생이 더 잘 소통하는 역사수업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수 있다.


 


 ● 수업일기를 통해 본 역사교사의 수업실천 - 柳  正  蘭 


1. 서론
2. 역사수업의 성격과 수업일기
3. 수업일기를 통해 본 교사지식
4. 수업일기에 나타난 학생요인과 교실수업
5. 결론 및 제언


 


본 연구는 교사 자신의 수업계획과 반성을 중심으로 한 자기수업 이해이다. 연구자가 1년 동안 작성한 수업일기를 통해 교실수업의 중요한 요인인 교사지식의 양상과 수업 적용 과정, 학생과의 상호작용 등을 살펴보았다. 또한 수업일기를 통해 연구자가 학생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이해가 수업방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1년 동안의 수업일기 작성을 통해 수업을 하면서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역사교육관에 대하여 돌아보고, 이후 계획적인 수업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연구자는 이전까지 수업을 계획하고 내용을 구성하면서 내가 가르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 수업을 하면서 주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채 수업을 해 왔다. 하지만 수업 계획 단계의 일기에서 본시 수업에서 강조할 내용을 미리 구상하면서 연구자가 역사수업에서 역사의 흐름과 맥락을 중요시한다는 것, 수업 중에 많은 이야기와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수업 후 작성된 일기를 통해 학생들의 생각과 반응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수업일기를 통해 수업의 효과는 수업의 내용과 방법, 그것을 전달하는 교사의 노하우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확인하였으며, 이후 수업을 계획할 때 좀 더 짜임새 있고 계획적인 수업을 준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교실수업에서 당면하는 돌발 상황과 교사가 예상하지 못한 학생들의 반응을 통해 실제 수업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스스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다만 본 연구에서는 처음 의도와 달리 학생들의 반응과 이에 대한 교사의 피드백이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 학생들의 수업일기를 통해 각각의 수업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고 이를 이후 수업에 적용하려 하였으나 학생 수업일기의 대부분이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등의 감정표현에 그쳤으며, 교사 또한 교사의 기억에 의존해 일기를 적다보니 생생한 수업현장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 이는 교사와 학생 모두 ‘수업일기’를 작성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었을 뿐 이를 분석하여 결과를 피드백하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므로 이후 연구에서는 이러한 점을 보완하여 수업일기를 작성하기 전에 수업의 목적, 수업내용과 이에 따른 방법 및 수업자료, 학생의 반응, 수업 관련 에피소드, 이후 수업에 대한 피드백 등을 철저히 계획하여 작성을 한 후 이를 분석한다면 수업일기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의 수업일기도 무조건 일기를 적도록 하는 것보다 각 수업시간마다 수업내용에 맞는 주제를 정해주는 방법도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역사교사들이 연구자와 같은 고민과 반성을 통해 창조한 자신의 수업자료와 노하우들을 동료교사와 함께 서로 공유하고, 이를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평소 자신이 어떻게 수업에 필요한 지식을 구성하고, 이것이 어떻게 학생들에게 전달되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수업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를 통한 수업반성과 결과의 공유는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신장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수업을 열고 역사수업에 대해 진지한 대화와 소통을 시도함으로써 수업공개를 꺼리는 학교현장의 문화를 개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수업상황과 교사의 의도를 이해하고 여러 교사가 공동으로 ‘수업일기’를 작성하여 연구하는 공동체가 구성된다면, 역사교사로서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대학에서 수업과 학생에 관한 이론적 지식만을 가지고 학교현장에 첫 발을 디디는 신규 교사들에게 이미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선배교사들의 ‘수업일기’ 작성을 통한 경험의 결과는 수업과정에서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고려 후기 사회 경제 중심의 학습 내용 구성 방안 - 辛  素  然 


1. 서언
2. 고려 후기 사회 경제 학습의 주요 내용 요소
3. 『한국사』 교과서의 고려 후기 사회 경제사 서술 분석
4. 결어


 


빈번한 교육과정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대부분의 논의는 시수 및 과목 편제와 같은 형식적인 부분에 치중해왔다. 교육과정의 본질이자 학생의 역사인식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영역인 학습 내용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고려 후기에 대한 학생들의 역사 인식은 대단히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필자가 현장에서 마주한 학생들의 상당수는 원과 권문세족, 명과 신진사대부를 역사가 아닌 윤리적 잣대로 이분화 함으로써 고려 패망은 당연한 논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고려 후기는 원의 압제 하에서 부패하고 정체되었던 시기로만 인식하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과서에서는 고려 후기를 원에 의한 경제 수탈과 정치 억압의 시기로 기술하고 있다. 각종 개혁은 권문세족과 친원 세력의 방해로 실패하였으므로 권문세족은 개혁해야할 부정적인 대상, 신진사대부는 새로운 시대를 연 개혁의 주체라는 점이 주요 내용이다. 이 때문에 학교 수업을 통해 고려 후기 역사전개의 긍정적인 측면과 독자성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학생들의 인식을 재고하여 올바른 역사인식을 함양하고자 전민변정사업을 기준으로 사회 경제적인 내용을 새롭게 재구성해보았다. 물론 여기에서 제안한 학습 내용이 학문적 교육적으로 반드시 옳다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다. 실제 교과 내용에 반영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내용전문가와 역사 교육 관련자들의 실질적인 참여가 반드시 요구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고려 멸망에 이르기까지 국체가 보전되었던 원인과 그 과정에서 일궈낸 사회 경제적 발전 및 주체적인 역사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본고에서 제안한 내용과 주제를 정돈하여 현재의 교과서에 반영할 수 있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고려 후기 사회를 보다 발전적이고 주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바이다.



 ● 1920년대 13도 임시교원양성강습회의 치폐와 운영 - 金  德  珍


1. 머리말
2. 1920년 13도의 임시교원양성강습회 개설
3. 도별 임시교원양성강습회의 운영
4. 1923년 폐지와 13도 사범학교로의 편입
5. 맺음말


 


1920년에 가까워지자 한국인의 보통학교에 대한 진학률이 증가하면서 학교·학급이 증설되고 학년이 연장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한국인 학생을 가르치는 한국인 출신의 초등교원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일본인 교사를 양성하는 경성사범학교와 소학교원양성소만 있어 그 수요에 부응할 수 없었다. 이에 총독부는 사범학교 설립을 염두에 두고서 임시조치로 각 도에 임시교원양성강습회를 열게 했다. 그리하여 전국 13도는 도립으로 도청 소재지에 1920년 4·5월에 일제히 강습회를 열어 운영했고, 이전의 경험을 토대로 平安北道敎員養成所規程과 같은 규정을 각기 제정했다.
수학기간은 처음에는 6개월 과정이었는데, 이듬해부터는 1년 과정으로 연장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4월 1일 개강일부터 3월 31일 종강일까지를 1·2·3학기 등 세 학기와 하계·동계 휴업일 등 두 방학으로 나누어 운영했다. 독립건물이 없어 기존학교나 관공서(도청, 헌병대, 잠업취체소, 물산장려관)에서 수업을 하거나 입학·졸업식을 거행했다. 특히 소재지의 보통학교·소학교·실업학교·고등보통학교를 주로 이용했고, 그런 점 때문에 그곳 교사들이 소장이나 강사로 초빙되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도청視學이나 학교장 등 지역 교육계 중심인물이 되었다.
입학정원은 도세에 따라 20~60명 규모였다. 그 가운데에는 여성도 20% 가까이 할당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모집정원(관비생) 외의 자비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입학기준은 도내 거주자, 17·18세 이상, 보통학교나 실업학교 졸업 이상의 자격을 가진 자로써 부윤·군수의 추천이 있어야 했다(군별 할당). 입학시험은 국어·산술·조선어·한문을 평가하는 필기시험, 그리고 면접시험과 체력검사로 나뉘어 치러졌다. 재학생은 도경비로 학비 외에 일비(월 20원 정도)까지 지원받았는데, 관비생은 졸업 후 해당 도에서 2년 의무복무를 해야만 했다. 주당 30시간 내외 수업을 받았는데, 10개 내외 과목 가운데 일본어·일본사·교육 등의 시수가 가장 많았다. 재학 중에 시찰이나 견학 및 수학여행이나 운동회 등을 가졌고, 인근 보통학교에서 교육실습을 했다. 졸업생은 각 도청에서 주관하는 제3종 임용시험에 응시했다. 도 내무부장이 위원장이 되고 내무부 소속 학무과 시학과 관내 교원이 위원이 되어 5일에 걸친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주관했다. 강습회 출신의 응시생들은 대거 합격했고, 합격하면 도내 학교의 부훈도로 대부분 임용되었다. 이러한 높은 취업률과 일비까지 포함된 관비 지원 때문에 경쟁률이 높았고, 그런 점 때문에 지역의 우수한 인재들이 대거 응시했고 그들은 이후 지역 교육계의 명사나 민족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이러한 임시교원양성강습회의 설립은 근대 교원양성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구한말 서울에 관립 사범학교가 있었고 전국 여러 곳에 사립 교원양성기관도 있었지만, 관비로 운영되는 ‘1도 1교’ 형식의 강습회 개설로 그동안 서울과 일부 대도시 중심으로 운영되던 교원양성기관이 전국 곳곳으로까지 제도적으로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습회가 각 도립 사범학교로 계승되고 뒤이은 관립 사범학교와 국립 교육대학을 거쳐 오늘날 초등교원 양성기관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강습회와 도립 사범학교의 연결성을 이어주는 사실로 강습회 강사 가운데 상당수가 나중에 사범학교 교원으로 자리를 옮겼던 점, 강습회와 사범학교의 교육과정(학기, 교과목, 학비지원, 학생활동 등)이 상당수 일치했다는 점, 강습회의 폐지와 사범학교의 개설이 동시에 이루어졌던 점, 강습회 자리에 사범학교가 들어섰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 해방이후 『동학사』의 비판적 수용과 농민전쟁연구 - 王  賢  鍾


1. 서론
2. 1940년대 출판 환경과 『동학사』의 간행
3. 해방이후 『동학사』의 영향 확대와 농민전쟁 연구 경향
4. 『동학사』의 비판적 수용과 농민전쟁 서술의 편향
5. 결론


 


갑오농민전쟁은 1894년 1월에 고부 농민봉기에서 시작하여 다음해 3월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처형을 당할 때까지 약 1년 여간 전라도와 전국에 걸쳐 진행된 농민들의 반란운동이었다. 이 사건의 명칭은 발생 초기부터 획일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른바 ‘東學亂’이라는 용어 표현은 조선왕조의 집권 지배층과 유생들이 즐겨 사용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이런 명칭으로 진압과 학살을 정당화했다. 이들은 당시 농민운동을 조선국가의 사회질서와 동아시아의 안정을 어지럽히는 운동으로 폄하하였다. 일제 강점하에 민족해방운동을 추구하는 운동가와 학자들 사이에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사회경제적 개혁 요구와 함께 반일 민족운동의 측면에 주목하였다. 결국 ‘갑오혁명운동’, 혹은 ‘동학농민전쟁’으로 재해석하면서 아래로부터의 근대혁명운동으로 재평가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는 吳知泳이 저술한 『東學史』가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1940년 출간된 이래 일순간에 전파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견해를 가진 연구자들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결국 이 책은 그동안 농민전쟁 연구에서 사료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해명의 측면에서 금과옥조처럼 절대적인 권위와 역사서의 고전 반열에 올라갔다. 그럼에도 일부 학자들은 오지영의 천도교적인 동학운동 이해 때문에, 혹은 그의 사회운동 경력으로 보아 일부 배척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東學史』 속표지에서 ‘역사소설 동학사’라는 문구를 들어 역사서로서의 가치를 부정하고 허구적인 소설처럼 취급하기도 하였다.
지난 농민전쟁 100주년이후 20년 동안 1차 사료의 발굴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지영의 저작처럼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동학사』의 내용과 성격을 검토한다는 것은 지난 농민전쟁 연구의 궤적에서 제기된 주요한 경향성을 파악하는 것과 아울러 향후 연구의 지표로 삼을 수 있다. 종전까지 이 책에 대해서 주로 오지영의 동학 및 천도교에서의 활동과 저작의 과정에 대해 분석했다면, 이 글은 저작의 간행이후 농민전쟁 연구에 미친 영향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 측면을 검토하려고 한다. 첫째, 오지영의 저작에서 서술 기조로 있는 ‘東學農民軍’의 이념과 행동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른바 ‘종교적 외피론’으로 대표되는 동학과 농민전쟁과의 관련성에 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동학농민군 위주의 농민전쟁 서술에서 종교적 차원의 강조를 배제하려는 흐름에 주목하여 농민전쟁론의 서술 특징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둘째, 농민전쟁의 성격 논쟁과 관련되는 ‘폐정개혁안 12개 조항’의 실재성 여부이다. 지금까지 연구사상에서 중요한 주제로 상반된 논란이 되고 있으며, 주요한 쟁점은 사료로서 실재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였다. 더욱이 집강소 시기 폐정개혁 강령 12개조는 한국의 중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수록 여부가 쟁점이 될 정도로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에서 핵심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1940년 동학사 간행 이후 오지영의 활동과 이후 저작의 학술적 수용과정을 검토하려고 한다. 우선 간행의 경위를 추적하면서 당시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검열 통제에서 벗어나 출간할 수 있게 된 배경을 검토하고, 『동학사』의 간행과 유포는 국내외 학계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서는 일반 독자에게도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검토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1945년 해방이후 남한과 북한 학계, 일본 학계 등에 미친 영향에 대해 검토하려고 한다. 본문 내용 분석으로 『동학사』 초고본과 간행본의 차이점에 주목하고, 특히 ‘12개 조항’에 대한 이해방식과 그 차이를 검토해 보려고 한다. 한편에서는 집강소의 정강으로 실재성을 인정하려고 하였지만 실제 사료가 발굴되지 않음으로써 일부에서 실재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역사서로서 동학사의 가치를 폄하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집강소의 설치와 정강의 존재를 밝히려는 실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강조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동학사의 초고본과 간행본의 서술 차이에 주목하여 오지영의 집필의도를 밝히려고 한다. 이렇게 오지영의 『동학사』가 지닌 사료적 성격과 특징을 재검토함으로써 해방이후 1894년 농민전쟁 연구의 경향성과 함께 새로운 연구 방향을 모색하려고 한다.


 


 ● ‘公武體制’의 政治理念 – 室町時代의 公과 武 –  - 朴  秀  哲


1. 머리말
2. 公 개념의 변화
3. 武의 융합과 독점화
4. 公武의 역할 분장과 ‘一統’ 
5. 맺음말


 


  무로마치 시대는 公 이념이 점차 중시되었지만, 간토구보, 전국다이묘의 公儀 自稱 등 무로마치 막부 쇼군만이 공 명칭을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天도 중시되었고 天道라는 용어도 유행한다. 天과 公의 이념이 서로 각축했으며, 또 근세와 같이 私에 대해 公의 절대 우위가 확립된 것도 아니었다. 公과 더불어 家라는 공동체적‧집단적 私가 병존하는 구조였다.
  武도 武家만이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남북조 시대 이후 무사처럼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싸우는 公家가 출현한다. 이는 學問과 예능 등을 주된 임무로 규정된 근세 공가와 다른 점이다. 선행 연구는 文士와 武將의 역할을 분담한 것이 중세이며, 무사의 文武兼行은 근세의 특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무겸행 자체는 가마쿠라 초기부터 존재한다. 가마쿠라 초기 『愚管抄』에서는 섭관가와 쇼군의 결합을 주장했고, 남북조 이후 『神皇正統記』에서는 공가가 중심이 된 문무겸행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국시대 이후 武威가 확대되어 무사는 다른 세력(공가, 사원)이 武에 간여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었고 공가‧무가의 분리가 시작된다. 따라서 오히려 무로마치 시대가 공가‧무가의 융합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무로마치 시대의 정치이념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치조 가네요시(一條兼良)의 『樵談治要』이다. 가네요시는 오곡풍양을 담당하는 제사적 기능의 천황과 만민평온의 세속정치를 담당하는 쇼군으로 역할을 분장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동시에 百神의 主인 천황은 天下主領의 人인 쇼군을 보호하며 백성의 안온과 태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의 목적을 갖고 있던 것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공가‧무가의 융합을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一統으로 표현했다.
  한편 근세는 민중까지 무 논리의 대상으로 무의 절대성 강조(무는 골수, 문은 피부와 털)하고 이는 武德으로 자칭하기에 이른다. 무덕을 통한 천하태평을 확립이며 공가‧무가의 융합을 상정한 무로마치 시대와 정치 이념을 달리한다.


 


 ● 해방 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1894년 농민전쟁 서술의 변천 - 金  泰  雄


1. 교과서 서술 내용 분석의 필요성과 방법
2. 검인정 교과서 시기 ‘국사’의 농민전쟁 서술(해방정국~제2차 교육과정 시기)
3. 국정 교과서 발행 시기 『국사』의 농민전쟁 서술(제3차 교육과정~제6차 교육과정 시기)
4. 검인정 교과서 시기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사』의 농민전쟁 서술(제7차 교육과정~2009 개정 교육과정 시기)
5. 餘言


 


현재 ‘동학 농민 운동’ 용어를 둘러싼 학술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농민전쟁의 성격을 바라보는 여러 연구자의 시각이 다를뿐더러 관련 기관의 처지와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 이러한 논쟁은 지속될 것이며 농민전쟁 연구를 심화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 용어를 둘러싼 지리한 논란은 자칫하면 서술 내용의 개선과 확충보다는 용어 자체에 대한 비생산적인 논쟁으로 그칠 수 있다. 학설이 분분하고 시각이 서로 달라 특정 용어로 합의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과서 집필자들은 ‘동학 농민 운동’이라는 용어에 구애받지 말고 교육과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사실의 정확성을 염두에 두고 사건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되 ‘동학 농민 운동’을 ‘민중운동’, ‘전쟁’, ‘혁명’ 등으로 다양하게 성격을 규정할 수 있도록 열린 시각이 요구된다.
물론 이러한 용어의 정립과 서술 방식이 학계 연구자들의 기대에 못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용어를 둘러싼 학계의 지나친 논란은 교사와 학생들에게 혼란과 불안을 안길 수 있다. 아울러 교육현장을 정치 현장으로 여기고 이념적 공세를 펼치는 역사해석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교과서가 오류의 난장판이 된다거나 이념 공세의 지면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현재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매우 불안한 처지에 몰려 있다. 온갖 정치・이념 논리가 횡행하면서 학문적 성과의 전문성과 교육 현장의 적합성이 곧잘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러한 소모적인 논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학계의 엄격한 사료 비판과 실증적인 연구 성과에 의거하되 교육현장의 고민을 담아 교과서의 단원 구성과 서술 체계를 지속적으로 안정화시키려는 개선 노력이 더욱 필요할 때이다.



  ● 역사 교과서 논쟁과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 金  正  仁


1. 머리말
2. 뉴라이트의 신자유주의와 시장주의사관
3. 뉴라이트의 반공주의와 반북주의사관
4. 진영 프레임의 확산과 공공성의 위기
5. 맺음말


 


오늘날 역사전쟁은 이념 갈등에 기반한 진영화를 상징한다. 역사전쟁의 한 축은 신자유주의와 시장주의사관, 반공주의와 반북주의사관을 내세우는 뉴라이트다. 그들은 줄곧 시민사회 내 소통보다는 정치권력을 배후삼아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려 했다. 그렇기에 뉴라이트에 맞선다는 건 정치와 시민사회 혹은 시장과 시민사회의 경계를 허물고 공론장을 이념전쟁터로 삼아야 함을 의미한다. 역사학계가 가장 곤혹스러워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역사전쟁 2013’을 놓고 보면 학문과 교육의 차원에서 맞서고자 했던 역사학계의 뜻과 달리 시민사회에서는 대중적인 동시에 수구적인 종북 프레임과 친일 프레임이 정면충돌했다. 상대를 종북좌파, 혹은 친일파로 몰아대는 형국은 매서웠다. 그 와중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리고 보편 가치적 지향에 바탕을 둔 공론장이 펼쳐지는 기회를 갖기는 난망한 일이었다.
이 글은 진영 프레임을 무기로 펼쳐지고 있는 역사전쟁을 학문의 공론장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역사 교과서 논쟁에서 드러난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역사 연구의 계보 안으로 끌어들여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뉴라이트의 시장주의사관,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반북주의사관을 아울러 가설적으로 ‘한국형 신자유주의사관’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 사관이 어떤 역사학 연구의 흐름과 맞닿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현대사의 해석을 둘러싸고 역사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이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현대사 연구를 이끌었던 사회과학계의 역사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식민사학과 실증사학의 계보 아래 박정희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국가주의 역사학의 계보와의 연관성도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국가주의 역사학이란 ‘일제하 민족 개량주의자들의 종족적, 문화적 민족주의를 계승하고 미국의 근대화론을 도입하여 극우반공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화하고 국가 주도로 추진하는 종속적인 자본주의 산업화에 기여하는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려는 역사학’을 일컫는다. 그들이 지향하는 바는 명백하다.  
이 계보선상에서 역사 교과서 논쟁에 뛰어든 뉴라이트의 ‘신자유주의사관’을 살피는 동시에 더욱 절실한 것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 혁신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대안적 사관에 대한 모색이다. 그것은 공공성의 위기를 논할 만큼 역사 해석이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오늘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 통합을 지향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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