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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06輯(2008.6.)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599
교수요목에 의거한 ‘이웃나라 역사’ 교과서의 발간과 그 구성

박진동 朴振東

1. 머리말
2. 중학교 사회생활과 교수요목의 구조
3. ‘이웃나라 역사’ 교과서의 간행 상황
4. ‘이웃나라 역사’ 교과서의 구성과 내용
5. 맺음말

본고는 교수요목이 적용되던 시기 세계사 교육 중에서 중학교 1학년 과정인 이웃나라 역사 부분을 교수요목과 교과서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1948년 12월 간행된 중학교 사회생활과 교수요목 중에서 관련 부분을 집중 분석하였고, 교과서를 다수 수집하여 검토하였다. 교수요목과 교과서를 각각 살펴보았을 뿐만 아니라 교수요목에 의거해 편찬된 교과서였으므로 교수요목이 얼마나 교과서에 반영되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해방후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문서로서는 최초라 할 수 있는 사회생활과 교수요목은 오늘날과 같이 체계가 갖추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교과서 개발과 학교 교육에서 자율성과 다양성이 확보될 수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본고가 분석한 결과는 집필자별로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교수요목을 준용하고 있었다. 특히 국가가 교과서를 심사하고 허가하는 검정제의 시행은 국가적 요구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교육과정과 교과서 검정제는 이 시기에 처음 마련되고 있으면서 역사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규제할 수 있는 장치였다.
교수요목에 의한 세계사 교육은 일제 강점기 세계사 교육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과 미군정이 도입한 사회생활과라는 틀안에서 편제되는 속에서 쉽게 정착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최초의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인 교수요목이 제시되자 이에 의거한 교과서가 발간되고 이를 사용하여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중학교 사회생활과 교수요목과 이웃나라 역사 교과서에 대한 분석은 당대 과제와 해결 양상을 포함한 한국 현대 세계사 교육의 연원을 살펴봄과 동시에 이후 진행된 세계사 교육과의 차이와 연속을 알아보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이 시기 중학교 역사교육은 동양사-서양사-국사로 학습의 순서가 정해졌으며 주당 수업시수는 각 2시간씩이었다. 종합적인 사회생활과를 표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등에서는 시수와 교과서가 별도로 적용되어 분과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사회생활과 교수요목은 지리, 공민과의 연락관계(통합) 및 현재와의 연관과 문제 해결을 강조하였지만 중학교 역사에서는 사회생활과의 강조점이 크게 부각되지 못하였다.
세계사 교육의 특징은 중학교에서는 동양사와 서양사가 분리되고 고등학교에서는 세계사가 적용되었다. 학습의 순서는 동양사와 서양사를 학습한 후 국사를 학습하였다. 이는 국민학교 6학년에서 이루어진 국사에 대한 통사 교육을 감안한 것으로 초, 중학교의 계열성이 고려되었다. 기존의 동양사라는 표기 대신에 이웃나라 생활로 한 것은 사회생활과 도입과 한글전용 정책의 영향에 따른 것이었다. 시수면에서 국사 시수보다 세계사 시수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교수요목은 사회생활과의 목적을 통해서 사람과 자연환경 및 사회환경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민주주의 국가의 성실 유능한 국민 양성을 표방하였다. 역사 부분 교수상의 주의는 교재 배열을 시간순으로 하고 현재와의 연관성과 문제해결 능력을 강조하였고, 교수 방법은 사실의 대의 파악과 비판력 양성을 강조하면서 토의 학습과 실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이웃나라 역사와 우리나라 역사와의 관련성에 유의하도록 하였다.
중학교 1학년 동양사는 과목명이 ‘이웃나라 생활’이었고, 초기에는 검정을 받지 않은 교과서가 사용되다가 교수요목 발간과 검정제도의 실시에 따라 문교부 검정을 받은 교과서가 사용되었다. 집필자는 주로 대학에 재직하였던 동양사 연구자들이지만, 한국사나 서양사 전공자 중에서도 집필자가 있었다. 이는 초기 교과서 개발에 당대의 대부분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의 학자들은 신국가 건설과 역사교육의 실천을 위해서 일선에서 활약하였던 것이다. 국내 학계의 성과가 전무하다시피 한 현실에서 교과서 개발은 외국의 것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어 내용면에서 충실한 서술이 불가능하였으나, 시각면에서는 우리를 중심으로 주체적으로 서술하고자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와의 관련성을 중시한 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교수요목에 준거한 교과서 집필자들은 이웃나라 역사와 문화가 우리와 가깝고 그 속에서 우리가 존재하였으므로 이웃을 잘 알아야 친선도모와 세계 문화 창조에 기여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즉, 이웃을 주체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 시각에 있었다.
교수요목은 단원-항목-세목의 순서로 제시하였으나, 각 단원별로 항목수, 세목수 측면에서 균형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조직의 원리도 시대와 지역이 혼재되어 일관된 기준을 적용하지 못하였다. 분량과 관점 면에서도 중국사에 치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수요목 이전 교과서에 비해서는 일본사와 한국사, 인도와 동남아시아, 서아시아사를 안배하려고 노력한 것이기도 하였다. 교수요목 이전의 교과서가 지나치게 중국사 중심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은 교과서 집필자들도 인식하면서 이를 시정하려고도 했지만, 중국사의 비중을 과감하게 축소하지 못했다. 동양사에서 중국 중심의 서술 문제는 현재까지도 제기되고 있는데, 일찍부터 이 문제는 세계사 교육의 난제였던 것이다.
단원 구성과 내용 요소 측면에서 보면, 교수요목이 교과서에 크게 반영되었다. 다만 서술분량이나 내용 선정, 표현 등에서는 교과서별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단원별로 중국사의 내용은 상세한 반면, 인도나 서아시아, 일본, 현대사 부분은 미흡한 점이 있었다. 서술 내용에서도 내용을 정선했다고 하지만 사실 위주의 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집필 내용에서 볼 때, 국사 교육이 별도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한국사 내용을 중시하였고, 1단원에서 자연환경을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해방 직후의 시기이므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였을 것이나 교과서는 일본사를 사실 위주로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고대사에서의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나 중세사에서 왜구와 임진왜란 등 일본의 침략성을 다루는 내용도 있지만 일본사의 전개를 국가 성립, 막부의 변천, 명치유신, 제국주의 침략 전쟁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이러한 내용 요소는 이후 세계사 교육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게 된다.
교과서는 학교에서 사용되므로 학생 수준과 학습 효과 등을 고려해야만 한다. 집필자들은 이에 유의하였고, 용어 등의 표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나름의 기준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다수의 교과서가 사용되는 시점에서 용어상의 불일치는 학교교육의 혼란을 초래했을 것이고, 이후 표준화를 시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본문 외에 시각 자료와 부록, 연습 문제의 배치는 교재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수준면에서 조악한 것이 많았으나, 이와 같은 편집 방침은 이후 교과서 개발에 영향을 주었다.
당장의 교육을 방기할 수 없고 신국가의 새로운 역사교육의 토대를 구축해야 하는 현실에서 긴급하게 마련한 교육과정과 교과서이지만 당시 역사교육이 당면한 문제를 응급적으로 해결하였다. 미해결의 문제는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본고는 개별 교과서를 각각 분석하거나, 특정 주제에 한정하여 심도있게 다루지는 못했다. 오늘날 세계사 교육의 문제와 관련해서 특정 주제를 시계열적으로 다루는 과제는 교수요목기만이 아니라 이후 전개되는 교육과정기에 이루어지는 세계사 교육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연속적으로 고찰할 수 있으므로 별도의 과제로 남겨둔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구동독 역사교육에서의 민족문제와 민족사

한운석 韓雲錫

1. 머리말
2. 구동독(DDR) 역사교육과 정당화 기능
3. 1970년대와 80년대 통사당(SED) 정권의 민족문제 인식의 변화와 역사교육
4. 동독 역사학의 민족사 인식의 변화와 역사과목 교육과정 개혁을 둘러싼 담론
5. 맺음말

동독의 역사학에서는 1970년대 초 통사당 지도부가 ‘사회주의 민족’을 선언한 후 70년대 후반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체 민족사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이러한 역사인식 전환은 80년대 동독 역사학에서의 유산과 전통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론적으로 표현되었다. 역사학의 이러한 변화는 역사과목 교육과정 개혁 논의에 영향을 주었다.
1980년대에 일단의 역사가들과 교육학아카데미의 역사교수방법론 학자들 사이에서 더 이상 시대변화에 걸맞지 않는 역사교육을 개혁하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정당성의 위기가 심화되어 가는 가운데 보다 실질적인 정체성 교육을 모색하던 사통당 지도부의 관심에도 상응하는 것이었다. 교육과정 개혁안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은 지금까지의 역사교육의 문제점들을 분명히 부각시켰다. 무엇보다 노동운동사와 혁명적 전통에 대한 지나친 강조, 과거 지배계급들의 진보적 역할에 대한 무시로 인한 협소화된 역사, 동독국가와 통사당의 역사에 대한 과도한 집중, 동독사에 대한 너무 매끄러운 서술, 학생지향적인 수업이나 문제지향적인 수업의 부재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역사가들, 역사교수방법론 학자들, 교사들의 개혁에 대한 요구는 인민교육부, 특히 그 수장인 마고트 호네커의 반대에 부딪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1988년의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프랑스혁명까지의 역사에서는 유산과 전통 논쟁의 성과를 상당부분 반영했지만 19세기의 노동운동사를 다루면서부터는 과거의 좁은 계급투쟁사관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동독 역사학은 1970년대 말 이후 민족사 연구의 틀을 확장함으로써 동서독 역사학 사이의 경계를 다소나마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이것은 통일 후 역사학의 통합에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독의 역사교육은 마고트 호네커의 완고한 통제 하에서 개혁이 거부된 결과 통일 과정에서 동독 교사들이 씨름해야 할 무거운 부채를 남겨놓았다.


1880년∼1910년 서울 거류 일본 상공업자의 영업실태와 활동

김윤희 金允嬉

1. 머리말
2. 청일전쟁 이전 일본인 상공업자층의 형성
3.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 상공업자층의 변동과 활동
4. 맺음말

이 논문은 19세기말 20세기초 서울의 일본인 상인의 영업실태와 정치사회적 활동을 고찰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거류일본인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가운데 거류 일본인 사회의 구심을 형성했던 상층상공업자에 대한 연구는 거류 일본인 사회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서울은 인천과 부산에 비해 시장성이 좋은 곳도 아니었으며,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으로 서울의 반일 감정은 일본 거류민 사회의 확장을 더디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이기는 하지만 형성되기 시작한 일본 상공업자층은 영업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거류지를 정비하고, 불안정한 기반을 보완할 수 있는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한편 공격적으로 영업지역을 거류지 밖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청일전쟁으로 인해 영업에 곤란을 겪은 이들도 있지만, 젊고 공격적인 상인은 청일전쟁에 적극 참여하여 군수용달업 등으로 많은 이익과 함께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전개된 서울의 시장 환경은 매우 불안정했고, 자본력과 정보력을 갖고 신용이 두터웠던 청상과 한상 비하여 자본의 열세를 면치 못했던 일본 상공업자는 영업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1897년부터 1905년까지 영업을 지속했던 기존 상공업자 상층은 15%에 불과했다. 그들은 불안정한 서울 시장에서 일확천금의 꿈을 갖고 새롭게 진입하는 일본인과도 경쟁했다. 이러한 조건은 거류민 사회를 주도하는 상공업자 상층의 구성을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1905년 화폐재정정리로 찾아온 공항은 일본인 상공업자에게도 손실을 입혔다. 또한 대한제국을 적극적으로 경영하고자 일본인 이주자가 대거 이루어지면서 부동산 임대가격과 금리가 상승하면서 파산자도 속출했다. 일본인 상업회의소는 이러한 파산을 막기 위해 서울의 은행들이 자금회수를 연기하고, 신용 대출을 실시하며 금리를 인하해 줄 것을 요구했다. 1905년에서 1910년의 짦은 기간 동안 기존 영업자 중 그 지위를 유지한 자는 37%에 불과했으며, 이전과는 다른 엄청난 규모의 일본인이 몰려와 0.6%에 불과한 상층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거류민 사회의 상층을 구성하는 상공업자층의 이러한 양상은 그들이 경제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강한 정치적 지향을 갖게 하는 원인이었다. 1910년 이전 거류민 사회를 이끌었던 주도층은 자본력을 가진 극소수와 자본력은 크지 않지만 정치적 지향을 강하게 가진 자로서 대부분 수입무역상과 잡화상이었다. 이들은 내부경쟁을 차단하기 위해 상업회의소을 결성하여 상업적 이익에 대한 요구를 수렴하고 관철시키기 위해 앞장섰다. 나아가 일본 영사관을 통해 일본정부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한제국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8·15 후 좌우세력의 헌법 제정 시도에 대한 사실 관계 해석과 그 정치적 성격
- 민주주의민족전선, 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을 중심으로-

신용옥 辛容玉

1. 머리말
2. 좌파의 헌법 제정 시도와 그 정치적 성격
3. 비상국민회의의 헌법 제정 시도와 그 정치적 성격
4. 민주의원의 헌법 제정과 그 정치적 성격
5. 맺음말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조선 독립의 경로로 임시정부 수립이 결정되자, 민전은 1946년 4월 20일 朝鮮民主共和國臨時約法을 바탕으로 臨時憲章을 발표했고 민주의원 역시 비슷한 시기에 大韓民國臨時憲法을 제정해, 좌우세력은 1차 미소공위가 개최되는 동안 임시정부의 헌법적 구성을 완료했다.
朝鮮民主共和國臨時約法(試案)은 조선인민공화국의 헌법 시안으로 준비되어 왔던 것이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후 1차 미소공위에 대비한 민전의 시안으로 약간 변경된 것이지만 그 기조에서는 동일했다. 즉 조선인민공화국은 정식국가였던 반면 조선민주공화국은 임시국가의 위상이라는 차이가 있었을 뿐, 정권의 담당자가 인민위원회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비상국민회의 헌법·선거법수정위원회는 중경 임정의 임시헌장 계승을 헌법 기초의 원칙으로 삼았으며, 민주의원이 개원된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면서 민주의원의 헌법기초 작업과 연계되었다. 중경 임정은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을 통해 임정 중심의 헌법을 만들고자 했는데, 조선인민공화국의 헌법 제정 시도와 같은 맥락에 있었다. 헌법 제정을 둘러싸고 조선인민공화국과 중경 임정이 경쟁했을 뿐 아니라, 한민당이 임정의 정권 헤게모니에 반발하는 갈등 양상도 보여 이후 전개될 우파의 분화를 예고했다.
大韓民國臨時憲法은 그 체계에서 대한민국임시헌장(1944) 및 조선임시약헌과 유사하여, 그 매개가 되었다. 하지만 민전의 헌법 준비와 달리, 大韓民國臨時憲法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를 거부하는 입장에서 준비되었다. 大韓民國臨時憲法은 민주의원 내 우익 정파들이 동의했던 국가체제의 지점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토지문제와 정부 형태 등에서 보이는 우파세력 내의 차이는 우파가 분화할 수 있는 매개이기도 했다.
이 연구는 그간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던 朝鮮民主共和國臨時約法(試案)과 大韓民國臨時憲法을 토대로 민전과 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에서 시도한 헌법 제정 과정을 재구성하고, 좌우세력의 헌법 제정 시도에 내포된 정치적 의미를 밝힌데 의의가 있다. 헌법 제정 시도의 정치적 성격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둘러싸고 분화되어 갔던 좌우세력의 국가 수립 방안과 국가 건설 방향에 대한 입장 차이를 분석하는 동시에, 우파세력 내의 분화 양상을 추적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연구는 좌우세력이 기초한 헌법의 추상 수준에서는 포착될 수 없는 경제체제 지향의 차이점, 이후 분화하는 우익세력 내 경제체제 지향의 차이점을 규명하기 위한 전제가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에 대한 인식

정기문 鄭技抆

1. 서언
2. 마니교 입교와 ‘선한 하느님’
3. 회심과 ‘은총의 하느님’
4. 펠라기우스파의 ‘정의의 하느님’에 대한 대응
5. 결어

후기 고대는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하는 시기이다. 이런 이행기는 앞 시대와 뒷시대의 특징이 혼재하기 마련이다. 이 논문은 고전 고대가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시대였다면 중세는 신앙을 추구하는 시대였다는 전제하에서 후기 고대에 이성과 신앙이 갖는 역할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에 대한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고전고대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자기 행위의 주체자로 파악하고,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은 무지의 산물이기에 끊임없이 깨우치고 계몽한다면 완벽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신은 시공을 초월하여 계신 분이시며 자연 속에 질서를 부여하신 분이시며, 무한히 좋고, 고귀하고, 변하기 어려운 존재이고,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기본 물질’ 혹은 비인격적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청년 시절 철학에 입문한 후에 이성을 모든 판단의 절대적 준거로 삼았다. 그는 모든 신앙을 이성으로 재단하려고 했으며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앙이 악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하기에 하느님을 악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악의 문제에 몰두해있던 그에게 그 문제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보였던 마니교는 매력적인 종교였다. 그는 마니교가 철저히 선한 하느님, 합리적 하느님을 주창한다고 생각하여 마니교 신자가 되었다. 이 마니교의 하느님은 고전 세계의 신, 즉 철저히 선하고 합리적이지만 그 자체로는 최고의 물질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래 지나지 않아 마니교에 대한 미몽에서 깨어났다. 그가 끊임없이 이성으로 마니교 교리를 파악하려고 하자 거기에 많은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때문에 다시 종교적 혼돈 상태에 빠졌는데 그 때 신플라톤주의자인 암브로시우스와 심플리키아누스를 만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공부하면서 인간과 하느님의 성격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였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깊은 심연이 있기에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파악하고, 통제하지 못하며, 하느님은 절대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이성 밖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은총을 찾아서 가톨릭으로 귀의하였다.
그가 가톨릭 주교가 되어 은총의 하느님을 부르짖으며 마니교, 도나투스파를 제압하고 있을 때 펠라기우스파가 등장하였다. 펠라기우스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며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존재이기에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묻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에 근거해서 원죄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대해서 인간의 정의와 하느님의 정의를 구분해야 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정의를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타락했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정하기에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생의 말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을 부정하고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그의 인생은 고전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 즉 이성을 추구하던 시대에서 신앙을 추구하던 시대로의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 고대 문화와 중세 문화의 차별성, 시대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역사적 현상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흑사병 논고

박흥식 朴興植

1. 서론
2. 중세말의 의사들과 “흑사병 논고”의 출현
3. 흑사병 논고의 내용
4. 의사들의 인식과 경험중시 태도
5. 결론

14세기 중엽 이래 수백년간 반복․지속된 흑사병은 근대로의 이행시기에 “근대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본 논문은 흑사병 논고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중세말에 의사들이 흑사병의 원인, 예방 및 치료책에 대해 지니고 있던 의학적․과학적 인식 및 태도들을 살펴본다.
흑사병 논고들은 일차적으로 그리스와 이슬람 의학의 토대 위에서 흑사병의 원인과 예방책을 당대인들에게 설명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며, 의학적 치료보다는 합리적이고 안전한 생활방식을 지도하는데 큰 비중이 있었다. 특히 14세기 후반 이래로 논고에서 경험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표현들은 점차 빈번해졌으며, 이는 당대 의사들이 흑사병을 경험하며, 관찰과 경험을 중시하는 “근대적” 인식태도를 구비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흑사병 시기에 일부 의사들이 전염병 치료에 대해 자신있는 태도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흑사병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면서 임상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대 의학은 중세와의 단절을 통해 등장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 기본 토대는 흑사병 이후 의학사의 “장기 15세기”를 거치며 마련되었다. 불가항력적인 흑사병의 충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근대적인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촉진되었다.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역사 지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 선사․고대 부분을 중심으로 -

강종훈 姜鍾薰

1. 머리말
2. 현행 교과서 소재 역사 지도의 내용 분석
3. 현행 교과서 소재 역사 지도의 문제점
4. 향후 교과서 역사 지도의 개선 방향
5. 맺음말

본고는 현재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는 7차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 실린 역사 지도들을 대상으로 그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모색해 본 글이다. 2011년부터는 국정 교과서 체제가 막을 내리고, 검인정 역사 교과서 체제로 바뀌게 되어 있는데, 현재 출판사별로 새로운 교과서의 집필 작업이 시작된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교과서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선의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교과서 집필에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게 하려는 것이 본고의 집필 목적이다.
기존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역사 지도는 양 교과서에서의 중복과 기존 교과서로부터의 답습이 매우 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 개개의 지도는 내용상에서나 형식상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본고에서는 각각의 지도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어떤 방향으로 수정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필자의 의견을 달았다.
아울러 큰 틀에서의 개선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1) 학생들의 입장에 서서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2) 교과서 본문 서술과 정합성을 지닐 수 있도록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3) 학계의 연구 성과를 적절하게 반영하는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4) 기존의 지도에 얽매이지 말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지도를 다양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등이 그 제안의 주요 내용이다.


<서평> 정철웅 鄭哲雄,
鄭炳喆 著, <‘天崩地裂’의 시대, 明末淸初 華北社會>,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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