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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29輯 (2014. 3. 31.)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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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한국사 교육의 연혁과 내용 ─초기 적응 교육을 중심으로 ─(鄭 尙 雨)

 

1. 서언

2. 하나원에서 이루어지는 한국사 교육의 연혁과 성격

3. 하나원 한국사 교육용 교재의 내용과 특성

4. 결어

 

1990년대 후반 이래 남한에 유입되는 북한이탈주민이 증가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7월 하나원을 설치하여 2~3개월간 남한사회에 대한 사회적응교육을 실시하였다. 하나원에서의 교육내용은 북한이탈주민의 연령, 성별, 하나원 수료자의 요구 등에 따라 변화하였다. 2004년 한국사 교육이 시작된 이래로 최근에는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교육용 교재가 만들어졌다. 2004년 이래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한국사 교육용 강의안과 교재를 통해 볼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1)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한국사 교육은 ‘민족적 동질감 회복’과 ‘남북한 차이의 이해와 극복’이라는, 남북의 공통점과 차이에 해당하는 두 축으로 구성된다.

2) 근대 이전은 민족적 동질감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대립과 갈등의 국면보다는 남북 모두가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문화사와 대외항쟁사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신라와 조선왕조를 중심으로 하는데, 이는 남한사회의 역사상을 제시하여 동질성 회복을 시도한다고 하겠다.

3) 근대 이전에 비해 남북한의 차이가 발생한 근현대사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많다. 이는 북한이탈주민에게는 생소한 남한 사회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4) 근현대사의 서술은 정치와 경제에 있어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 남한의 경제적 성장이라는 두 측면에서 조명되는데, 경제적 측면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남한사회에 정착․적응하는 과정에서 이질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을 위한 한국사 교육은 바로 같은 민족이라고 불리면서도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즉 남북의 차이를 알려주는 근현대사 교육의 필요성은 이 지점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또 북한이탈주민의 탈북이 북한사회의 경제적 붕괴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경제적 부분을 강조하는 서술 역시 타당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분단 이후 남한사회의 경제적 성장에만 지나친 비중을 두는 것은 역사에 있어 장기적 조망을 상실한 것이자, 체제경쟁적으로 비추어 지는 것으로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역사학이라는 특성을 살려 장기적인 조망에서 북한이탈주민이 남한사회에서 차지하게 될 위치를 고려하는 가운데 남한 사회의 경제 활동의 다양한 부분에 대한 서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북한이탈주민이 남한에서 느끼는 이질감이나 낯설음은 경제적인 부분에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시민사회나 민주적 선거와 같은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남한 체제의 특징과 우수성을 역사적으로 알려주는 것 역시 필요할 것이다.

 

 

◆ 중국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소수민족” 서술(金 志 勳)

 

1. 머리말

2. 근대 이전의 “소수민족” 서술

3. 현대의 “소수민족” 서술

4. 맺음말

 

중국은 거대한 영토와 56개 민족이라고 하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중국은 한국, 러시아 몽골, 인도를 비롯하여 14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중국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은 한족이지만 55개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은 중국 전체 영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민족이 거주하는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몽골 등은 중국의 안보와 자원 등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소수민족”정책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존립과도 관계되는 민감한 문제이다. 이 때문에 중국정부는 이들 민족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을 유지하는 것을 중요한 국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변강’ 지역과 “소수민족”을 중국화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변강’ 지역은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변경 지역으로 영토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중국 영토 안에 존재했던 모든 민족의 역사적 활동을 중국 역사로 보는 ‘통일된 다민족국가론’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중국사의 범위 안에 편입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역사교과서에서도 민족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56개 민족’을 ‘중화민족’으로 통합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적 완전성을 유지하는 것은 중국의 역사교육에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중국정부는 역사교과서를 편찬할 때 민족과 종교 문제 등에 조심하여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고 있다.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통일된 다민족국가로 각 민족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상호 의존하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였고 모두 중화민족 대가족의 일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민족평등, 민족단결, 공동번영, 공동발전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민족구역자치가 중국의 기본 국가정책이고 정치제도라고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조국통일과 민족단결을 수호해야 하고 이를 파괴하는 교과서 서술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종교와 신앙의 자유도 공산당과 정부의 기본 정책이므로 교과서를 편찬할 때 민족습관과 종교습관을 존중하고 민족금기와 종교금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과거 역사에서도 민족 간의 갈등과 투쟁보다는 상호 교류와 협력, 융합 등이 강조되고 있다.

중국 역사교과서의 “소수민족” 서술에 대해서는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 중국의 역사교과서에 시대별로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에 주목한 연구들이 있다. 이들 연구는 소수민족 서술보다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따라 이루어진 중국 역사교과서 서술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연구는 대부분 인민교육출판사의 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분석이 이루어져서 대체로 중국의 교과서가 일관된 논리를 관철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초중등 교과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1980년대까지 인민교육출판사가 독점하여 출판하여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역사교과서는 여러 출판사에서 경쟁을 하면서 인민교육출판사의 독점적 지위는 약화되고 여러 출판사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같은 『역사과정표준』에 의거하여 편찬되었지만 교과서 별로 서술상에서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일부 연구에서는 중국의 복잡한 역사교과서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부정확한 서술을 하기도 하였다.

중국은 역사교과서 편찬에서 민족평등, 민족단결, 공동번영, 공동발전과 민족금기에 주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는 2001년에 반포된 『역사과정표준』에 의거하여 편찬된 8종의 중학교 역사교과서의“소수민족” 서술에서 민족평등과 민족단결 등이 어떤 형태로 반영되었는가에 주목하여 검토해 보겠다.

 

◆ 일본 중세의 女子 교육 ─公家의 女訓을 중심으로─(申 美 那)

 

1. 머리말

2. 女子 교육과 女訓書

3. 『乳母のふみ』에 나타나는 공가의 女訓

4. 공가의 男女 교육의 특징

5. 맺음말

 

이 논문의 목적은 일본 중세 여자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공가의 여훈을 통하여 검토하는 것이다. 일본 중세의 여자 교육 및 여훈서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 본 연구 성과는 근세의 유교적 여훈서가 등장하기 이전의 여자 교육의 이념과 실상을 파악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훈서란 여성에게 기대되는 바른 마음가짐과 몸가짐, 교양을 서술한 텍스트로 중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가마쿠라시대에 나온 여훈서의 효시로 알려진 『메노토노후미(乳母のふみ)』에서 작가가 딸에게 훈시하는 내용은, 마음가짐, 몸가짐, 와카·서도·그림·악기·모노가타리 등 교양의 수양과 신변의 조도품의 취급, 궁정 생활에 있어서 동료·아랫사람·주인을 대하는 태도, 후궁으로서의 처신, 불교 신앙 등 다기에 걸쳐진다. 작가가 『메노토노후미(乳母のふみ)』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분별과 사려, 인내심 등 마음과 관련된 부분이고, 학문과 기예에 있어서는 평균적인 수준을 요구하였다. 공가에 태어난 남자의 경우, 교육의 목표는 가업을 물려받고 이에를 계승하는데 두었다. 남자 교육의 텍스트는 중국 유교 서적이나 일본의 고전 등 주로 한적이었고, 이를 부친이나 전문적인 학자에게 전수받았다. 이에 반하여 여성의 경우, 주로 결혼 생활이나 궁정 생활을 염두에 둔 교육을 받았다. 중세의 여자 교육은 방법에 있어서 여자가 여자를 가르치는 방식이 주류였고, 텍스트는 가나 서적에 치중되어 있었고, 한자의 습득을 소홀히 하였다. 남자 교육의 주안점이 지식과 기량의 습득에 있었다면, 여자 교육에 있어서는 인성 함양을 더욱 중요시한 것 같다. 여훈서에서는 헤이안 시대의 소설인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등장인물이 모범상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어서, 공가여성의 이상형은 고대 이래 변함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가의 발호와 이에의 확립, 혼인제도의 변화 등 여성을 둘러싼 환경은 전과 같지 않았고, 여성의 지위와 역할, 재산권 등의 침식은 피할 수 없었다. 여훈서가 시종일관 여성에게 강인한 인내심을 요구하고, 불교에의 귀의를 최후의 구제 수단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중세 여성이 처한 엄격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사 속 소수자 수업,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미국의 일본계 미국인 억류 사건 사례 분석─(李 美 薇)

 

1. 서언

2. 교과서와 내용 표준에 나타난 일본계 미국인 억류 사건

3. 일본계 미국인 억류 사건 수업지도안 분석

4. 결어

 

미국에서의 역사 속 소수자 교육의 실태를 면밀히 살피기 위하여 본 연구는 일본계 미국인 억류 사건이라는 미국사 교육과정의 한 요소에 관련된 교과서 서술, 내용 표준, 그리고 6편의 수업지도안을 분석하였다. 교과서 서술과 내용 표준은 세부적인 차원에서 차이를 보이기는 했으나, 큰 흐름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6편의 수업지도안은 학생들로 하여금 사료 분석을 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였으나, 사용하고 있는 사료에서는 차이를 보였으며, 수업의 핵심 질문을 통해 파악한 수업의 초점 역시 크게 달랐다. 이러한 차이는 한편으로는 수업지도안을 작성한 배경이 무엇이었는가에서 기인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계 미국인 억류 사건을 통한 현재 이해를 수업에 어느 정도 포함할 것인가에서 나타났다. 이처럼 같은 소재를 다루며 사료학습이라는 동일한 교수 전략을 사용하되 수업의 초점을 크게 달리하는 이유를 “역사 전쟁”이라는 맥락과 최근 교육계 개혁의 흐름 속에서 논의하며 우리 역사 교육계에 주는 시사점을 짚어보았다.

 

◆ 학생의 선다형 국사 문항 풀이 과정 분석(金 秀 美)

 

1. 머리말

2. 선다형 국사 문항 풀이의 요건

3. 선다형 국사 문항 풀이 과정의 사례

4. 선다형 국사 문항 풀이 과정의 특성과 시사점

5. 맺음말

 

본 연구는 학생의 선다형 국사 문항 풀이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국사 문항 출제 방향에 시사점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다. 선다형 국사 문항의 풀이 과정을 통해 학생의 사고과정을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득점자는 저득점자보다 역사적 내용(history content)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어 단편적인 사실보다는 역사 용어와 개념을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는 역사지식 능력이 뛰어났다. 즉 고득점자는 지식의 배열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세부사항과 의미의 암시에 더 유의하여 문제와 선택항으로부터 의미를 생각하며 문제를 풀었다.

둘째, 탐구형 국사 문항의 풀이 과정에서 내용교과로서 국사 문항에서는 특히 리터러시(literacy)가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탐구형 문항은 자료 ‘해석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수업에서 고유한 리터러시 코칭을 제안한다. 역사 리터러시 코칭의 기본은 읽고 쓰는 활동을 강화시켜 이해를 높이는 방법이다. 역사 리터러시 코칭의 방안으로 사료 읽기가 중심적인 활동일 수 있으며, 이러한 읽기 과정에서 역사이해를 높이는 방법은 역사용어와 개념 그리고 일반 어휘력을 확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역사를 효율적으로 학습하기 위한 기본적인 사고력으로 역사용어와 개념을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고득점자는 수험요령(test-wiseness)도 있어 답지를 소거해 나가면서 문제 풀이를 하는 데 익숙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은 선다형 국사 문항 풀이 과정에서 주로 소거법(消去法)을 쓰고 있으므로 언어적으로 답지들이 모두 풀이되는 것보다 역사지식이 들어가는 답지가 2개 이상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제시문의 자료가 익숙했을 때는 수험요령만 가지고도 풀이가 가능하고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문항을 풀기보다는 연습과 훈련을 통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으므로 문제 해결 시에 구체적인 증거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 발굴이 반드시 필요하다.

학생의 국사 문항 풀이 과정 분석은 앞으로 각종 평가에서 학생의 역사학습과 역사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 문항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고, 리터러시 교육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리라고 여겨진다.

 

◆ 저항의 도구─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 철도(尹 相 元)

 

1. 머리말

2. 감시와 검속─일제의 철도와 열차

3. 효율적 운동의 도구─민족해방운동가들의 철도와 열차

4. 맺음말

 

철도와 열차는 기본적으로 지배세력의 도구이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잘만 이용한다면 철도와 열차는 저항을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식민지시기 민족해방운동가들은 효율적인 운동의 전개를 위해 철도와 열차를 적극 이용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식민지 조선에서 철도가 저항의 대상을 넘어 저항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밝히는데 있다.

일본제국주의는 철도를 통해 조선의 식민지화를 가속화시켰다. 아울러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서도 철도와 열차는 중요했다. 일제는 철도와 열차에 대한 부단한 감시와 검속을 통해 민족해방운동가들의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에 맞서 좀 더 효율적인 운동을 고민하던 운동가들은 일제 경찰의 검속을 피하는 여러 방법들을 고안하였다. 신분을 위장할 수 있는 통행증의 확보, 일반승객과 일행인 것처럼 가장하기, 검속을 피해 화장실에 숨기, 주요역 우회하기 등이 운동가들이 주로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운동가들은 철도와 열차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전국적 운동망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또한 전국적으로 확산된 철도망을 통해 국내외의 민족해방운동을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식민지 조선의 열차 안에서는 조선총독부 경찰과 민족해방운동가들의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계속되었다.

근대의 상징물인 철도는 근대문명과 사상의 전령사이지만, 그 역사는 제국주의와 침략의 대명사라는 이중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 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철도를 대상으로 한 역사교육 역시 이러한 점에 주안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하지만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서 본다면 철도가 저항의 대상을 넘어 원활한 운동을 위한 저항의 도구로 이용되었음을 포착해낼 수 있다.

 

◆ 『조선의 농촌위생』을 통해 본 일제하 조선의 농민생활과 농촌위생(이 상 의)

 

1. 서언

2. 『조선의 농촌위생』의 간행 경위와 구성

3. 보고서에 나타난 달리 농민의 생활

4. 달리의 위생상태와 조선의 농촌위생

5. 일제하 위생정책의 특징─결어에 대신하여

 

이 논문은 일제하 의대 학생들의 조사 보고서를 분석하여 1930년대 조선 농민의 경제, 위생, 건강이 지니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검토한 연구 결과이다. 교육과정 중에 있는 학생들의 사회적 인식수준과 역사 사회상을 통합적으로 검토한다는 측면에서 교육사와 사회사, 정책사를 연결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 글은 1940년에 출판된 『조선의 농촌위생』이라는 자료를 분석하여, 일제하 조선 농민의 생활과 농촌의 위생문제를 구체적으로 고찰한 논문이다. 『조선의 농촌위생』은 1936년 최응석을 비롯한 동경의 의대 학생들이 경상북도 울산 달리에 방문하여 한달간 경제구조와 인구구성, 식생활과 주생활, 부녀자와 유유아 문제, 체격과 발육, 농민의 질병을 조사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조사자료를 가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에 근거해 조선농촌의 현실을 사회위생학의 시각에서 해석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울산 달리는 양극화가 심한 빈촌으로서, 그 열악한 경제여건은 농촌의 위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다시금 농촌지역의 생산력과 생산구조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 조사단의 결론이다. 달리 지역에서 확인되는 농촌위생의 실상에 비추어 보면, 조선의 농촌은 의료의 사각지대에 지나지 않았으며, 농민 대다수는 근대 의학 발달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일본이 조선 식민지배의 성과로 과시하고자 했던 위생정책은, 지역별로 또 계층별로 차이를 보이면서 근대와 전통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부조화를 드러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달리의 사례를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조선에서는 일제 지배의 말기에 이르기까지 위생정책의 목표가 건강한 국민의 양성이라는 적극적 범주 보다는 피식민지민의 생명 유지라는 소극적 범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 淸朝 乾隆∼嘉慶年間 蘇州출신 관리의 朝廷 요직 진출 양상과 그 배경(韓 承 賢)

 

1. 머리말

2. 乾隆年間 蘇州출신 관리의 朝廷 요직 진출

3. 乾隆帝의 蘇州人 인식

4. 嘉慶年間 이후 蘇州출신 관리들의 약진과 그 배경

5. 맺음말

 

본고는 청대 건륭∼가경년간 蘇州 출신 관리들의 조정 요직 진출 양상 및 그 배경을 분석한 것이다. 소주는 강남지역에 위치한 청제국의 경제·문화 중심지였으며 명청시기 동안 다수의 進士 학위 소지자를 배출하였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단지 소주의 이러한 과거제상의 성공만을 강조했으며 그 결과 소주 출신 관리들의 경력이 청대를 통해 늘 성공적이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어 왔다.

그렇지만 소주인들의 과거제 상의 성공이 그들이 항상 조정의 요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조정 요직에 오르는 관리의 임명은 황제의 의지와 계획에 달려 있었으며 여러 황제들은 각기 특정 지역 관리들을 선호하거나 혐오할 여러 이유를 가지고 있었기에 소주 출신 관리들의 官運 역시 부침을 겪게 되었다. 건륭 전반기 30년 동안, 소주는 대학사, 군기대신, 부원대신 등 조정의 요직에 오른 다수의 관리들을 배출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소주 관리들의 성공적 요직 진출은 건륭 후반기 30년 동안 갑자기 단절기를 맞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소주 관리들이 연루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황제는 이 지역 출신 관리들에 대해 부정적 편견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시기 건륭제가 소주 출신 관리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한 ‘蘇州習氣’라는 말은 황제의 이러한 부정적 인식을 잘 표현해 준다.

그렇지만 가경년간부터 소주는 다시 한 번 그 지역 출신들을 조정의 요직에 진출시키기 시작했고 이러한 경향은 19세기말까지 계속되었다. 본고는 소주출신 관리들의 정치적 성공의 재개가 19세기 청조 황제들이 소주 관리들에 대해 더 이상 전형화된 부정적 이미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가경년간은 또한 조정 내 관료 가운데 다수를 차지한 남인 관료들의 권력을 통제하기 위한 황제의 노력이 강하게 행사되지 않은 시기이기도 했다. 소주 출신 관리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소멸과 그들의 조정 요직 진출 재개는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 다윗의 역사성에 대한 탐구(鄭 技 抆)

 

1. 서언

2. 수정주의자의 도전

3. 다윗의 등장과 골리앗과의 대결

4. 다윗이 왕이 되기 이전의 행적

5. 결어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통합성은 약했으며 이질적인 성격을 가진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북쪽은 물산이 풍부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지역과 교통하기 편리하였다. 반면에 남쪽 지역은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으며, 산의 경사가 가팔라서 농사를 짓거나 포도, 올리브를 재배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았다. 때문에 북쪽 주민들은 일찍부터 농경을 시작했으며 페니키아와 접촉하면서 선진문물을 활발히 받아들었다. 반면에 남쪽 유다 지역은 인구가 희박했으며 거주지의 규모도 적었으며, 농경이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이런 이질적인 두 지역이 팔레스타인 족속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서 잠시 통합된 것 같지만 솔로몬 사후에 두 지역은 다시 분열되었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상당기간 번성을 누렸지만 아시리아의 압박이 더욱 거세어지자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자 유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중심지로 북상하였다. 많은 주민들이 북쪽에서 유다 지역으로 이주하자 예루살렘이 갑작스럽게 팽창하였고, 남왕국 유다는 왕국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유다가 이스라엘의 유일한 계승자로 떠오르는 시기 유다의 지도자들, 특히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체감을 강화하고 그를 통해서 아시리아에 맞서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나안 정착에서 바빌론 유수에 이르는 역사를 담은 이른바 ‘신명기 역사서’가 저술되었다. 신명기 역사서는 신명기의 관점에서 쓰인 역사서들, 즉 신명기,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의 5권을 말한다. 이 역사서들은 야훼만을 섬기며 순종한 자는 야훼의 보호를 받고 번영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벌을 받고 멸망한다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신명기 역사서는 요시아(기원전 640경~609경 재위) 왕 시절에 편집되기 시작하였다. 그가 집권하기 이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에 대한 신앙심을 잃고 우상 숭배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요시아가 통치에 오른지 18년째 되던 해에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도록 시켰다. 그때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안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였다. 학자들은 이 때 발견된 책이 신명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요시야는 이 신명기에 근거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우상 숭배를 타파하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야훼 숭배 부활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런 개혁의 일환으로 신명기 역사서의 편집이 추진되었고, 그 작업은 이후 바빌론 유수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렇게 남왕국 유다가 대위기에 봉착했을 때 편찬된 ‘신명기 역사서’에는 유다 지도자들의 신학적 관점이 깊게 채색되어 있었다. 신명기 역사서의 저술자들은 남왕국 유다를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에 두었다. 이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은 비도덕적이고 패악하며 야훼를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할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했고 반면에 유다 왕국은 야훼의 진정한 선택을 받은 왕국으로 아시리아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번성시킬 것이라고 묘사했다.

이렇게 남쪽 유다 왕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이 완수되자 또 다른 과제가 대두되었다. 그것은 유다 왕국의 성립자인 다윗을 신화적인 인물로 격상하는 일이었다. 유다 왕국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정통 왕국이라면 그 왕국의 창립자인 다윗은 야훼를 모범적으로 숭배한 위대한 신앙인이어야 했다. 따라서 다윗의 행적 가운데 신앙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이야기들은 축소되었고, 그의 신앙심을 부각시킬 수 있는 이야기들은 부풀리고 과장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다윗은 또 다른 업적을 가진 인물이어야 했다. 기원전 8세기 이래 유대 민족은 외적의 억압과 침입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왜소해졌고 민족 전체가 소멸할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런 대위기 속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 ‘희망’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위대한 과거를 제시하고 하느님이 머지않아 그 ‘황금 시대’를 다시 복원해주실 것이라고 선전하는 것이었다. 이런 필요를 절실하게 느낀 유대의 지도자들은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바로 그 ‘위대한 과거’로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위대한 제국의 시대로 가공하고 각색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이렇게 신명기 역사서들이 특정한 의도 속에서 편집되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역사와 전설, 그리고 신화가 섞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본문에서 설명했듯이 다윗에 관한 기사에 여러 모순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彙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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