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사료 활용 방식의 특징과 문제점 - 金 成 子
1. 머리말
2. 교과서의 사료 활용 방식과 사료의 기능
3. 교과서 사료 활용 방식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
4. 맺음말
이 글에서는 2011 개정 ‘한국사’ 교육과정에 따라 개발된 8종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제시된 사료를 분석하여 사료 활용 방식의 특징, 사료의 기능과 역할, 사료 활용 방식의 문제점 및 개선 방안을 탐색하였다. ‘한국사’ 교과서에 수록된 사료의 상당수는 본문의 내용을 ‘실증’·‘입증’하거나 사료를 통해 본문의 내용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사료 활용 방식은 과거와 사료 또는 역사 설명 간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한편, 교과서의 내러티브, 역사 해석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교과서 사료 활용 방식에 있어서 교과서의 해석을 상대화하고 역사의 구성적 성격을 드러내며, 역사학의 절차적, 방법론적 지식에 대한 이해를 향상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의 개선이 필요하다. 대립적인 관점을 포함한 사료를 병치함으로써 역사적 설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확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사료를 활용한 탐구활동의 구성할 때 사료의 출처를 확인하고 증거 능력을 평가하는 과제를 포함시키고, 맥락적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료와 과제를 제시하며, 이러한 사료 분석을 토대로 탐구과제로 제기된 질문에 대해 증거에 토대를 둔 자신의 역사적 설명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것은 이를 위한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고등학교 역사학습 부진학생의 문항 풀이 과정 분석 - 金 秀 美
1. 머리말
2. 역사학습 부진학생과 역사학습의 특성
3. 역사학습 부진학생의 문항 풀이 과정의 분석
4. 역사학습 부진학생의 문항 풀이 과정의 특성과 시사점
5. 맺음말
이 논문은 고등학교 역사학습에서 ‘학습부진’ 현상이 나타나는 노력형 학습자로 한정하여 학습부진 학생의 특성을 살펴 역사학습 부진아를 지도하는데 시사점을 주고자 하였다. 연구의 방법으로 역사학습 부진학생 6명을 선정하고 14개 문항을 풀게 하였으며, 이후 질문지 조사와 심층면담을 통해 역사학습 부진학생의 특성을 분석하였다. 역사학습 부진학생의 문항 풀이과정에서 역사학습 부진학생은 기본적인 역사지식, 일반 어휘력, 리터러시 능력이 부족하고, 역사학습 자료에 대한 친숙성은 직접 경험에 따라 기억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첫째,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용어를 사용함과 동시에 어려운 용어의 사용 빈도를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한자로 되어 있는 역사용어를 쉽게 풀어 이해시키는 방향에서 역사교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둘째, 문장 이상의 단위에서는 내용 파악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분석적인 읽기 습관의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 셋째, 역사 체험학습을 통해 문화재를 직접 보고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으며 역사 이해를 높인다는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역사학습 부진학생들이 자신의 생활경험을 통해 역사지식을 내면화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것이라 본다. 역사학습 부진학생을 조력하는 방향에서 성장을 지원하는 교수 학습 방법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겠다.
● 헝가리 한반도사 연구 시론: 한반도사 관련 출판물과 한국사 교육을 중심으로 - 초머 모세(Csoma M?zes)
1. 머리말
2. 한반도 헝가리 관계의 태동기(1890년~1948년)
3. 북한·헝가리 관계의 발전기(1948년~1989년)
4. 한헝 관계의 부흥기(1989년~현재)
5. 헝가리의 역사교과서 동향과 해외 한반도사 서적 출판의 어려움
6. 헝가리 엘떼(ELTE)대학교 한국학과의 한국사 교육 현황
7. 맺음말
헝가리의 국내 정세와 남북한과의 시대적, 정치적 관계는 헝가리 내 한반도사 서적 출판에도 영향을 끼쳐왔으며 특히 한국사 교육은 소수 한국학자들에 의해 그 명맥이 겨우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본고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헝가리에서는 근대 이전부터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근대 이후 한반도사에 대한 서적들이나 연구서들이 출간되었으며 사회주의 시절 북한과의 교류를 통해 한반도사에 대한 서적들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1989년 한국과의 수교 후에 본격적으로 한반도사 즉 한국 역사에 대한 연구와 서적들이 출간되고 있으며 헝가리에서 한국사 서적을 출판하는 데는 양국 역사학자들의 견해 차이와 경제적인 문제 같은 어려움이 있다.
본고에서 살펴 본 헝가리에서의 한반도사 서적 출판 현황과 한국사 교육 현장은 헝가리에서의 한국학 연구의 현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헝가리에서 한국학 연구는 활발하지 않으며 한국학과는 수십 년 동안 운영되고 있는 중국학과와 일본학과에 비해 역사가 짧다. 그러나 한국학과에서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체계적으로 강의하고 있으며 단시간 내에 빠른 성장을 이루며 헝가리 내 한국사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헝한 학자들의 교류를 통하여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후속 학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발전을 위한 일차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 16세기 양반가 婢 乭今의 일상과 乳母 使喚 『默齋日記』를 중심으로 - 李 蕙 汀
1. 머리말
2. 돌금과 야찰 부부의 일상
3. 유모 사환, 기회와 감내
4. 맺음말
16세기 星州牧에 거주한 婢 乭今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고자 노력하였는데, 이는 그녀가 삶의 과정에서 행한 다양한 선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奴主의 지속적인 家內使喚 요구를 거부하다가 이후 乳母로서의 삶을 선택하였다. 남편과의 사별 이후 그녀는 또 다른 혼인관계를 맺고, 노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녀의 남편 야찰은 主家에서 가내사환 하였지만, 아내 돌금은 그녀의 어미와 형제들이 거주하는 고향 보은에서 살기를 원했다. 결국 남편 야찰은 성주와 괴산을 오가면서 아내가 있는 보은에 잠시 머물가 갔고, 노주 이문건은 야찰이 보은에 들르는 탓에 일정이 늦어진다며, 자주 야찰에게 매를 때렸다. 당시 노주는 그녀를 가내사환 시키고자 하였으나, 그녀는 매번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돌금은 가내사환 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乳母의 역할을 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사대부가문의 유모는 ?麻의 服을 논할 정도로 특별한 존재로 인정되었고, 이는 유모의 배우자와 그 소생에게도 적용되었다. 유모 가족은 노주의 재산분재 때에도 가족 단위로 분재되도록 배려되었고, 유모의 자식들은 교육이나 免賤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모의 자식들은 영양 부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유모가 되는 일은 자식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결정이었다. 한편, 양반가의 유모에게는 유모로서 적합한 행동 양식과 도덕적 기준이 요구되었고, 다른 노비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유모가 양반의 생활 규범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따른 것은 아니었다. 돌금은 남편 야찰의 사망 이후 비부 종년과 또 다른 혼인관계를 맺었다. 당시 돌금과 종년은 모두 배우자가 사망한 상태였기에 이들의 결합은 재혼에 해당되었지만, 이문건은 이를 통간으로 간주하며 종년을 집에서 내쫓았다. 하지만 돌금은 이후 노주의 눈을 속이고 몰래 종년과의 혼인관계를 유지했고, 다른 노비들 역시 노주의 눈을 속이고 이들을 도왔다. 유모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녀를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일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삶의 일부를 저당 잡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이후 자녀에게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줄 수 있는,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돌금은 자신의 삶에 마주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자기 의지를 가지고 때로 순종하고 때로 반항하며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 1910년대 공립보통학교 취학욕구의 고조-學歷의 資格化에 주목하여- - 나카바야시 히로카즈(仲林裕員)
1. 머리말
2. 공립보통학교 취학욕구의 고조
3. 식민권력의 學歷 자격화
4. 상향적 사회이동을 위한 보통학교 취학의 전개
5. 맺음말
식민권력은 식민지 조선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사립학교와의 헤게모니 경쟁에 승리하여 관공립학교제도를 정착시킬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식민권력은 學歷을 진학·문관임용 자격으로 설정해서 관공립학교를 주류로 하는 학교체계를 편성하고, 이를 문관임용제도와 연계함으로써 조선인을 관공립학교로 유도하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통감부시기에 크게 진전되었으며 병합 후 1910년대에 완성되었다. 이전에 과거제도를 채용했던 조선사회에는 교육을 상향적 사회이동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學歷 자격화는 이들에게 아주 강렬하게 작용했다. 문관임용에 직결되는 관립 고등학교·고등보통학교 입학을 둘러싸고 이미 1909년부터 치열한 경쟁이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보통학교 졸업을 고등보통학교 입학자격으로 하는 법규상의 규정은 1910년대에 실제로 정착되어 있었다. 또 졸업한 후에 관공서에 취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보통학교에 취학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와 같이 1910년대에는 보통학교 취학을 희망하는 조선인들이 점차 증가해 갔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상황에 발맞추어 1918년에 3면1교정책을 계획하고 다음해부터 실시했다. 이것은 이미 증가하고 있었던 취학희망자들에게 취학 기회를 확대 제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보통학교 취학자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 1920년대 전반기 조선인 노동자의 구직 渡日과 부산시민대회 - 金 銀 英
1. 서언
2. 구직 도일 희망자 증가와 일제의 도일 규제
3. 부산시민대회의 개최와 도일 노동자 문제의 공론화
4. 도일 노동자 문제의 전국적 확산과 도일 규제의 완화
5. 결어
본고는 1924년 부산시민대회를 계기로 조선인 노동자 도일 문제가 조선인 사회 안에서 민족적·계급적 문제로 확산되어 간 상황을 살펴본 글이다. 1920년대 전반기에 일제의 농업정책이 가져온 모순으로 인해 수많은 조선 농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살길을 도모하였다. 특히 경상도, 전라도 등 남부 지방의 많은 농민들은 단신으로 渡日하여 비정기적으로 노동에 종사하는 계절노동자가 되었다. 조선 노동자들의 도일은 제1차 세계대전기 독점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한 일본 산업계의 저렴한 노동력 수요로 인해 가능했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자의 급격한 유입이 일본의 실업 및 치안 문제로 연결되자, 일본 내무성은 조선총독부와 공조하여 여행증명서 제도 등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의 도일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1924년 봄, 구직 도일을 희망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부산항으로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는 전년도의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귀향했다가 국내의 일자리 부족으로 다시 도일하기를 원하는 노동자들도 상당수였다. 그러나 까다로운 규제 때문에 쉽게 도일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부산을 유랑하면서 지역사회의 문제가 되었다. 이에 부산 지역 유지들이 주축이 된 부산청년회는 조선인 노동자 도일 제한 폐지를 주요 안건으로 삼아 1924년 5월 부산시민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독립운동가 안희제를 비롯한 부산시민대표의 활약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조선인 노동자 도일 제한 문제는 부산 지역 문제에서 조선인 전체의 문제로 부상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도 이에 가세하면서 조선인 사회는 공동의 목소리를 내었고, 이에 이 문제의 확산을 꺼린 일제 당국에 의해 도일 규제 완화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부산시민대회는 1920년대 전반기 도일 노동자 문제를 공론화하고 조선인 사회의 힘을 하나로 모아 표출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플루타르코스의 『코리올라누스』에 나타난로마 귀족의 권위와 기반 - 金 昌 成
1. 서언
2. 선거제도와 귀족의 권위
3. 곡물배급과 권력의 창출
4. 토지소유와 귀족의 기반
5. 결어
플루타르코스의 『코리올라누스』는 로마 귀족에 관한 이야기로 허구로 간주되었다. 여기저기에 드러나는 시대착오적인 역사상으로 인해서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는 이 이야기가 만들어지던 기원전 1세기 이후의 상황을 기술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런 경향에 의문을 제기해온 학자들이 여럿 있어왔다. 이들에 따르면 ????코리올라누스????는 당시의 사정을 어느 정도 반영한 역사물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하였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기원전 5세기 공화정의 수립을 전후한 사정에 관한 전승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 몇가지 이론을 적용해 보았다. 첫째, 귀족의 권위 문제와 관련하여 한나 아렌트의 아욱토리타스 이해를 적용해 보았다. 즉 로마사에서 권위라는 것은 아우게레 즉 땅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히고 이를 분배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코리올라누스의 행위는 전형적인 귀족의 행태가 아닐 수 없으며 선거제에 따른 권위의 창출과는 비극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곡물배급의 문제와 관련하여 폴 벤느의 에우에르게티즘에 대한 분석을 적용해 보았다. 17세기 설립된 宣惠廳에 따라서 필자는 이 단어를 선혜로 번역해 보았다. 코리올라누스는 곡물의 무상배급에 반대하였다. 그는 곡물이야말로 군사력과 연관되는 것이고, 당연히 전쟁에 참여한 자들이 몫이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곡물배급을 단순한 권력창출의 수단이 아니라 국가팽창의 동력으로 파악한 그는 폴 벤느의 분석을 넘어선다. 이것 역시 귀족의 권위와 관련된다. 마지막으로 귀족의 경제적 기반과 관련하여 카포그로시의 로마 토지에 관한 분석을 적용해 보았다. 로마 귀족들은 일반 시민과 달리 국가의 호구조사에 파악되지 않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코리올라누스와 같은 귀족은 그런 토지를 보유함으로써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았다. 공화정 후기까지 피호민을 무장하여 전쟁에 나서는 귀족의 존재가 있었던 점이 이를 입증한다. 이런 점들에 비추어보면, 『코리올라누스』는 귀족의 권위와 그 기반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수업은 단순한 정보만을 제공해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역사가와 마찬가지로 이론과 사실이 어우러질 때에야 학생들의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응용력도 높아질 수 있다. 본고는 특히 사료학습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론을 적용하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고는 역사교육의 한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 농노제와 노예제의 개념 규정에 대한 재검토 - 李 琪 榮
1. 머리말
2. 농노제와 노예제의 개념에 대한 기존 학계의 규정
3. 기존 개념규정의 문제점과 새로운 개념규정의 모색
4. 맺음말
이 글은 농노제와 노예제의 개념 규정에 대한 기존의 몇몇 사례를 검토하여 농노제와 노예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문제가 없는지 따져보고, 있다면 그들 개념이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지를 모색해 보고자 하는 시론적(試論的) 성격의 논문이다. 농노제와 노예제의 개념에 대해 기존 학계는 이들 제도의 경제외적인 인격적 예속관계를 중시하여 법적?신분제적 특징을 중심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들 제도의 개념을 이처럼 규정하게 되면, 주요 특징이란 것이 지역과 시대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고, 법적인 규정과 역사적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크게 벌어질 수 있으며, 인격적 예속관계는 생산관계의 실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농노제와 노예제의 개념은 법적?신분제적 특수개념보다는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을 표현하는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하고 법적?신분제적 측면을 보충적으로 고려하여 규정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특히 노예제로부터 농노제로의 이행이나 노예제와 농노제의 비교 등 거시적인 문제를 다룰 경우에는 이와 같은 개념규정이 더욱 요구된다. 이런 면에서 노예제란 사회의 일정한 인간집단이 지배세력으로부터 일체의 소유와 인격 및 권리를 박탈당하고 사적 폭력의 지배 아래 노동을 무제한으로 수탈당하는 소모적인 착취체제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고전적 형태의 농노제란 생산의 여러 조건을 점유한 소농의 잉여노동이 영주층의 토지와 경제외적 강제력 독점으로 인해 지대의 형태로 지주에게 수취되는, 지속성이 비교적 강한 착취체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