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수요목에 의거한 ‘먼나라 역사’ 교과서의 발간과 그 구성 - 朴振東 (韓國敎育課程評價院)
1. 머리말
2. ‘먼나라 역사’ 교수요목의 구조
3. ‘먼나라 역사’ 교과서의 간행 상황
4. ‘먼나라 역사’ 교과서의 구성과 내용
5. 맺음말
본고는 교수요목기 서양사 교육에 해당하는 ‘먼나라 역사’ 교육과정인 교수요목과 그에 의거해서 발간된 검정 교과서 7종을 검토하였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적용된 교수요목에서 중등 역사교육은 동양사, 서양사, 한국사로 구분되었으며, ‘먼나라 역사’는 중학교 2학년에서 교육된 서양사 과목이었다. 이에 대한 연구는 한국 현대 역사교육, 서양사교육의 출발점을 확인하는 작업이 되겠다. 교수요목에서 규정한 먼나라 역사의 내용 범위는 선사 시대, 그리스, 로마, 중세, 근세, 최근세, 양차 세계대전 등 서양사 내용이 시간 순으로 제시되었고, 근현대 비중이 높았다. 여기에 이슬람 지역, 아메리카 지역, 동서 관계사 등 비유럽 지역이 포함된 것은 특이하였다. 7종의 ‘먼나라 역사’ 검정 교과서의 필자는 이해남, 임병삼, 김홍주, 조의설, 김성식, 김성근, 김정학, 최남선 등이었다. 4명이 서양사 전공자였으며, 한국사 등 다른 전공자도 있었다. 이들 중 다수는 이후 시기에도 교과서 집필자로 활약하였다. 검정 교과서는 대체로 교수요목의 강조점을 따르고 있었지만, 따르지 않은 교과서도 검정을 통과한 것을 보면 집필자의 재량이 많이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동양사 교과서인 이웃나라 역사와 비교해 보아도 근현대의 비중이 높고, 시대구분법을 적용하려 한 의도가 보이며, 시각자료, 학습 문제 수록 등 교재 특성을 반영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해방 후 긴급히 역사 교과서를 발간하면서 용어 표기가 통일되지 않았고, 커다란 사실 오류가 발견되는 등 오늘날 기준으로는 부족한 점도 많았다. 선행 연구가 없는 가운데 이상의 연구를 통해서 먼나라 역사의 교수요목과 교과서의 개략을 파악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한국사 교과서’ 조선 후기 신분제 내용의 劃一과 固着 - 洪仙伊 (高麗大)
1. 머리말
2. 학계의 다양한 해석과 교과서 서술의 획일
3. 시각자료 선정과 문장 표현의 고착
4. 획일적 내용 구성의 원인과 개선 방향
5. 맺음말
최근 ‘단일한 관점’이 아니라 ‘다원적 관점’에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이 점점 더 지지를 받는 추세이다. 검정 교과서는 이러한 ‘다원적 관점에 입각한 다양한 교과서 제작’이란 시대적 요구에 부흥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발행된 검정 한국사 교과서 14종 중 상당수가 과거 국정 교과서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으며, 그 결과 서술 내용의 차별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조선 후기 신분제 내용을 서술 관점, 이용 자료, 문장 표현의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조선 후기 신분제를 소재로 택한 이유는 자료에 대한 분석은 물론 최종적인 해석도 분분한 주제이기 때문에, 해석학문으로서 역사학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며, ‘다원적 관점에 입각한 교과서 제작’의 성패를 판단하는 데 시금석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분석 결과 검정 교과서의 조선 후기 신분제 관련 내용이 상당히 획일적이며, 이러한 획일성은 이전 국정 교과서의 내용이 고착화된 결과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구체적으로 검정 교과서가 본문에서 채택하고 있는 학설이 매우 획일적이며, 현재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이해와도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또 객관적 사실로 볼 수 없는 내용을 통계 그래프 형식으로 제시하는 등 사실과 해석 사이의 기초적인 구분도 이루어지지 않고 서술되었다. 시각 자료의 경우 검정제 전환 후 양적으로 증가되긴 하였으나, 거의 모든 검정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에서 이용한 자료들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몇몇 자료를 추가하는 수준이었다. 표현의 경우 국정 교과서와 완전히 동일한 문장을 그대로 전재하고 있는 경우도 발견되었다. 학계에서 검정제의 필요성 주장하며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내세웠으나, 기대만큼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분제라는 주제가 매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검정 교과서의 획일적 내용 구성이 단지 ‘통설’을 반영하다 수반되는 불가피한 현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원인을 교육과정을 통한 국가의 통제, 내재적 발전론에 대체할 대안 담론의 부재,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을 식민사관의 아류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 교과서 집필자들 스스로 이전의 국정 교과서를 典範으로 받아들이면서 활용하고 있는 점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는 한국에서 역사가 생산 · 소비되는 역사가 단일 내러티브를 추구하는 ‘기억으로서의 역사’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으며, 따라서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지양하고 ‘학문으로서의 역사’를 지향하는 것만이 궁극적 해법이라는 점도 알 수 있었다.
● 대한제국기 성균관 정책과 재정 및 운영 실태 - 金鍾俊 (淸州敎育大學校)
1. 머리말
2. 근대적 교육 개혁 속에서 성균관의 위상 문제
3. 대한제국 정부의 성균관 재정 편성과 실제 운영
4. 1904년 이후 성균관 정책과 운영의 변화
5. 맺음말
본 논문이 대한제국기 성균관 재정 및 정책과 운영 실태에 관한 분석을 통하여 밝혀낸 바는 다음과 같다. 먼저 갑오개혁 직후 講學 기능을 상실했던 성균관은 1895년 이를 회복했다. 성균관경학과규칙을 통해 일부 신식학문이 교육과정 상에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부의 지원은 미미했고,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위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정부의 지원은 1896년 시작되었다. 신기선이 학부대신으로 부임한 후 성균관을 최고 학부로 규정하고, 졸업생들의 관직 진출 보장을 명문화하려는 노력이 행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에 대한 반발도 존재했다. 개화파들은 여타의 신식학교들에 대한 지원을 더 중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한제국 정부 역시 갑오개혁 때 만들어진 교육제도의 근간을 부정하지 않았고, 변화된 관리 선발 체계 속에서 성균관 졸업생들에게 특혜를 주기란 쉽지 않았다. 따라서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성균관에 대한 정책은 유생들에 대한 위무책의 성격을 벗어나지 않았고, 실행의 의지도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1899년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고종이 유교에 바탕한 전제군주제를 표방하면서 외형상 성균관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단순한 위무 수단을 넘어서 대한제국이 내세운 구본신참의 정신을 상징하는 기구로 격상되었다.
1899년부터 1903년까지의 시기에 한정해서 보면, 독립협회 해산 이후 고종이 추진한 정책에 대한 반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내장원의 재정 독점에 대해서 정부 내 다른 기관이나 대신들, 지역민들이 일부 반발하기도 했지만, 강력해진 황제권을 바탕으로 무마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당대 정부 정책의 우선 순위 책정은 고종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내장원의 재정 비대화 속에서 대한제국 정부 재정 편성의 우선 순위에서 학교 예산은 밀려나 있었고, 성균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정책의 우선 순위는 외부 세력에 의해 황제권이 손상되기 시작한 1904년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1904년 이후 나타난 교육 정책의 변화에서 역으로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고종 및 대한제국 정부가 학교 설립과 유지를 등한시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1904년 이전에는 재정을 일단 내장원으로 일원화한 후 우선 순위에 따라 사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학교 설립 및 유지의 경우, 아직 거기까지 지출을 확장시킬 여유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국권이 심각하게 손상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에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재원을 지역 사회에 맡겨 스스로 학교를 설립·유지케 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중앙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하는 성균관의 경우 여전히 크게 손댈 수는 없었다. 즉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본래부터 중앙과 지방에서, 전통적 지식인과 개화 지식인들을 두루 포섭하여 교육을 확대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1904년 이후에야 불완전한 형태로 급작스럽게 일부 실현되었던 것이다.
또한 본 논문은 몇 가지 논점을 찾아냈다. 첫째는 ‘근대적 교육’이란 무엇이고, 그 속에서 전통적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위상은 어떠하였는가 하는 문제다. 본고는 근대적 교육의 핵심을 국가의 국민교육으로 보았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갑오개혁 정부와 대한제국 정부 모두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이어지는 근대적 교육기관의 창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책적·재정적 우선순위가 조금씩 달랐고, 특히 두 정부 모두 고등교육기관 설립에 나설 여유를 갖지 못했다. 주의할 점은 근대국가의 필요성에 의해 학교 설립이 이루어질 때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국가가 특정 교육기관에 재정을 지원하고 특혜를 주는 것은 단순히 ‘계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교육 활동에 ‘불순한’ 정치적 입장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를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갑오개혁 정부와 대한제국 정부, 그리고 통감부가 각각 성균관이라는 교육기관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았고, 어떠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우선이다.
둘째, 위 논점과 관련하여 본고는 특히 대한제국 정부의 정치적 입장에 주목하였다. 근래 대한제국 정부가 표방한 ‘구본신참’ 정책 하에 성균관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인식은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실제 성균관 운영이 왜 어려웠는가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은 드물었다고 판단된다. 본고는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 편성 양상을 살펴보고, 당대 정부 공문서 등을 통해 성균관 재원의 마련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을 추적하여 이 부분을 밝혀보았다. 재정 편성을 보면 광무개혁이 본격화되고 유교의 종교화가 표방되며 관립학교 설립도 활발했던 1899년 시점에 성균관비도 늘어났다. 이전보다는 재정적으로 나아진 것이다. 하지만 이후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이 확대됨에도 불구하고 성균관비에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광무개혁으로 마련된 새로운 재원들이 학교 설립보다는 황실 행사와 군대 설립 등 군주권 강화에 먼저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양상은 지방 사회에서 성균관비를 둘러싸고 내장원과 학부(성균관) 간에 빚어진 갈등에서도 확인된다. 궁내부와 지방관들은 이같은 마찰 속에서 양쪽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중앙 정부 부처가 서로 갈등하는 혼란 속에서 지역민들이 수세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는 성균관 재원 뿐만 아니라 내장원이 관여한 영역 대부분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본고는 당대 관원들 간에 주고받은 공문서들을 통해서 이 과정을 재구성해 보았다. 이같은 상황은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제의 침략이 격화되고 내장원의 힘은 약화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 때 고종은 학교 설립 정책을 전향적으로 바꾸어 사립학교 설립을 강하게 권장했다.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대한제국 정부가 근대적 학교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내정 간섭이 커지는 가운데 사립학교 설립을 촉구했다는 것은, 관립학교의 경우 자율적 운영이 어려웠음을 뜻한다.
그런데 통감부 시기 성균관관제는 한층 더 정비되어, 근대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 때 성균관 정책을 정비한 주체는 누구로 보아야 할까? 통감부 관리들은 일면 성균관에 대해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성균관의 변화가 일제의 의도대로만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없다. 고등교육에 대한 통감부의 관점을 포함하여, 척사유생, 개신유학자, 문명개화론자 및 대한제국 정부 관원 등의 입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성균관 정책으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대한제국기부터 통감부 시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성균관에 관한 담론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고, 그러한 담론들이 성균관의 실제 위상과 어떻게 관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별고에서 다루고자 한다.
● 대한제국기 한성부의 가옥 거래와 家?의 역할 - 李昇一 (江陵原州大)
1. 머리말
2. 대한제국 전반기 가옥 거래 방식과 가쾌
3. 대한제국 후반기 거래 방식의 변화와 가쾌
4. 맺음말
이 글에서는 가옥 중개를 전담하면서 동시에 거래사실을 보증하는 역할까지 담당하였던 가쾌의 시각에서 1890년대 이래의 대한제국의 부동산 정책의 추이를 살펴보고 이 같은 부동산 정책이 한성부의 가옥 거래 관행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 보았다. 이를 통해 가쾌가 부동산 거래를 문란하게 만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거래의 전문화, 활성화에 기여하였고 한성부와의 긴밀한 협조와 갈등 속에서 한국적 부동산 관리제도(가계제도+인허 가쾌제)를 운영하였던 주체였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1906년에 가계제도가 폐지됨으로써 가쾌의 성격과 역할도 변화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후기에는 가옥의 매매, 전당, 貸借를 중간에서 주선하는 사람(거간, 가쾌)이 있었으며 가옥을 거래하려는 사람은 이들에게 부탁하여 문기를 작성하거나 보증인으로 내세워 거래를 성사시켰다. 다만, 전통시대의 거간은 부동산의 상태 및 문기의 진실성(부동산의 소재 및 권리관계)을 계약 당사자들에게 알려주는 사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1876년 개항 이래로 주요 도시에서 외국인들의 거주와 상업 활동이 증가하면서 가옥을 비롯한 부동산 매매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매매계약의 증빙 문제가 중요해졌고 또한 외국인들의 불법적 거래에 대해서는 강력히 단속하여야 했다. 특히 한성부에 지방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상업화 및 도시화가 진전되고 부동산의 상품화가 촉진되면서 증빙제도의 정비가 더욱 요청되었다. 부동산 권리자(소유권, 전당권 보유자)들은 종전의 민간 관행만으로는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게 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법제 정비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서 대한제국 정부는 외국인의 부동산 불법적 소유는 금지하되 한국인간 거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거래의 활성화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부동산 정책을 시행하였다. 우선, 한성부는 1893년에 가계를 법제화하는 방향으로 부동산 증빙절차를 강화하였다. 가계는 한성부에서 발급되기 시작한 이후 각 개항지로 확대되었는데 가옥을 매매할 때 구권을 모두 반납하여 종전의 권리관계를 완전히 소멸시키고 새로운 권리관계를 표시할 것을 의도하였다. 종전에는 계약 당사자간에 서로 집문서와 대금을 서로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부동산 거래가 완성되었다면, 한성부의 가계제도는 관의 인허를 받은 가쾌가 거래 당사자와 함께 서명하고 가계를 발급받아야 거래가 성립하는 관 주도 증빙체제였다. 한성부 가계에서 가쾌의 참여와 서명은 거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신제도에 대한 행정절차를 숙지하고 있던 자는 가쾌들이었으며 이 같은 법적 지식을 바탕으로 거래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관에서도 이들을 대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으며 인허 가쾌들에게 부동산 거래의 독점성을 인정하였다.
가쾌의 역할은 매도자와 매수자를 단순히 연결시키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해당 가옥에 대한 상태 및 권리관계 등을 매수인에게 알려줌으로써 거래의 안전함을 보증하는 역할도 맡았다. 뿐만 아니라 한성부 등에서는 중간에서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매매 당사자가 가쾌와 함께 직접 가계를 발급하도록 지도하였으나 실제 거래에서는 가쾌가 계약서 작성, 신권의 신청 및 발급, 대금과 각종 문권의 교환 등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매매 당사자가 관청에까지 직접 출두하는 번거로움을 피한다는 상호 간의 양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이 거래 과정에서 가쾌의 역할이 증대하자 신권 발급 등의 복잡한 행정절차를 대행한다는 명목으로 관행상의 중개 수수료 이상으로 증액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성부의 공인 중개인 제도는 가계제도와 더불어 대한제국 부동산 정책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으며 부동산 거래의 책임성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수단이었다. 대한제국의 의도는 일정한 자격을 가진 자로 하여금 거래의 안정성을 확보할 것을 계획했으나 가쾌는 국가의 통제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한성부의 부동산 정책에 적극 협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옥 거래에서 독점적이고 우월한 지위를 활용하여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였다. 당시 주요 신문들에서는 가쾌의 실수로 가계를 분실하였다거나 가쾌의 부정 또는 농단을 비난하는 기사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가쾌의 부정(盜賣, 이중매매, 이중전당 등)이나 가계의 분실 또는 훼손으로 인한 문제점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토지대장을 정비하고 등기제도를 시행하여 부동산의 권리관계를 정확히 하고 이를 公衆에 공시하는 제도 정비가 필요하였다. 한국정부는 내부적으로 논의하여 토지조사사업과 등기제도 시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으나 일제 통감부가 이를 중단시키고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광범위하게 승인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한국정부는 이토의 강력한 간섭 하에 1906년에 토지가옥증명규칙 및 동세칙을 제정하였다. 통감부가 주도하였던 이 법령들은 외국인(특히 일본인)의 부동산 소유를 전면 합법화하고 증명절차를 대폭 변경하였다. 증명규칙 하에서 가쾌는 공식 문서에서 사라졌다. 부동산 계약서는 통수 및 동장의 인증을 거쳐서 군수 및 부윤의 증명을 받음으로써 거래문서의 효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법률 환경의 변화는 가쾌의 역할과 성격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즉, 토지가옥증명규칙 하에서는 가옥의 단순한 중개인의 역할로 축소된 것이다. 하지만 한성부 인허 중개인으로서의 자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성부는 여전히 토지 가옥의 매매, 전당 등의 중개를 여전히 일정한 자격을 갖춘 자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증명부와 가옥증명부 제도를 운영하기 위한 협조자로서, 그리고 한성부 말단 행정기구를 움직이기 위한 보조자로서 가쾌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한성부는 부동산의 국가공증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계제도와 공인 중개인제도를 통하여 공인절차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이는 국가공증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발급하는 가계와 거래의 진실성을 매매 당사자와 함께 가쾌로 하여금 입증토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일부의 가쾌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복덕방을 공동으로 운영하거나 한성회사 및 보신사 등을 설립하여 부동산 거래의 활성화와 전문화에 기여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대한제국기 가쾌의 주요 역할인 ‘중개’의 실태를 상세히 파악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일부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를 통하여 보완하려고 한다.
● 1850년대 막부의 해군 교육실태: 나가사키 ‘해군’ 전습(1855∼1859)의 시기별 시간표 분석을 중심으로 - 金蓮玉 (서울大)
1. 머리말
2. 제1차 전습 시기 교육 실태
3. 移行期 교육 실태
4. 제2차 전습 시기 교육 실태
5. 맺음말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동아시아사라는 과목이 신설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는 최근 역사학 분야에서 매우 큰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교육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실제적인 방향 제시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최근 학계에서는 동아시아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발굴을 위해서는 전근대-근대를 이분법적으로 파악하여 근대를 더 나은 것으로 규정하는 기준에서 탈피해야 하며, 전근대로부터 근대의 너머를 볼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논의도 제기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 동아시아 중에서도 일본의 막부가 실시한 1855∼1859년에 도입한 ‘해군’ 교육 사례를 통해 근대의 편견으로 덮어쓰기 된 전근대의 평가가 아닌 전근대 당시 시점 그대로의 실태 고찰을 시도했다.
선행연구에서는 나가사키 해군 교육 사례를 明治維新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일본은 서양의 해군 교육제도를 도입해 이른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보는 ‘성공신화’의 맥락에서 평가해 왔다. 그러나 교육실태를 당시의 시각으로 되짚어 보면 막부의 의도와 방침, 당대의 고민 등이 여실히 드러난다.
네덜란드 교관은 해군창설의 핵심을 해군사관양성에 두면서 함대 전반의 전문적 지식을 광범위하게 가르치려 했으나, 참가자 및 막부는 해상전투를 전제로 한 해군 기술보다 海防에 주안점을 둔 포대축조, 대포, 소총 훈련 등과 같은 陸戰 방어 기술 습득을 우선시했다. 또한 근대교육시스템처럼 누구에게나 열린 교육장이 아니라 실제로는 막부 참가자의 학습을 우선시했으며, 諸藩 참가자에게는 부분적으로만 개방했다. 諸藩이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키우는 것을 경계하는 막부의 우려도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이례적으로 단행한 나가사키 전습은 諸藩의 군사적 성장과 서양 세력의 來航에 대응할 수 있는 군사력을 시급히 갖춰야 하는 필요성에서 시작되었으며,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처럼 해군교육에만 특화된 교육이 아닌 육·해군 기술을 두루 배우는 막부 중심의 ‘육해군’ 학습장이었던 것이다.
● 고조선 기자정권의 쇠망과 그 유민들의 국가재건: 부여와 고구려의 경우 - 金容燮 (大韓民國學術院)
1. 서
2. 기자정권 쇠망시기의 국내외사정
3. 고조선 유민들의 문명전환과 국가재건 원칙
4. 부여와 고구려의 국가재건 경위
5. 부여와 고구려의 국가체제와 농업 사회사정
한민족은 북방민족의 일원으로, 遼河文明圈의 외곽 遼東 遼陽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 한반도에 걸쳐 고조선문명 고조선 국가를 건설하고서, 오랜 세월동안 살아왔다. 그 고조선은, 전기고조선 단군(壇君·檀君)조선=단군정권과 후기고조선 箕子조선·辰國=기자정권으로 구성되며, 단군조선이 원시 농업공동체 농촌공동체를 기반으로 초기국가로 출발한 이래, 기자조선은 殉葬관행을 동반하는 수직형의 동방형 노예제의 고대사회 고대국가로 까지 성장하였다. 기자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쇠퇴 멸망하고, 한반도 남부로 남하하여 三韓[馬韓·辰韓·弁韓]으로서 당분간 여명을 유지하자, 고조선 유민들은 만주지역에서 그들의 고유문명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고조선을 계승하는 국가를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기간은 우리민족으로서는 문명전환의 분수령이었고, 국가 민족 존망의 분수령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고조선 유민들은 그들 자신의 고유문명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중국문명을 적극 수용하는 가운데, 이로써 국가 또한 새로운 체제로 건설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고조선 기자정권의 고대적 노예제적 사회질서 농업체제 국가조직은, 점진적으로 중세적 사회질서 농업체제 국가조직으로 전환되어 나갔다. 더 이상 고대국가의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 유민들은 점진적으로 중세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그 기반을 마련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이러한 원칙에 의하여 국가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 自國史의 帝國性을 묻는다: 한중일 3국의 동아시아 지역사 비교 - 柳鏞泰 (서울大)
1. 머리말
2. 동아시아 지역사의 출간 경위와 현황
3. 인식체계의 양대 축: 동서대비와 대응적 방어
4. 帝國, 帝國夢, 帝國化
5. 征伐, (戰)役, 藩屬
6. 자성사관의 가능성과 한계
7. 맺음말
본고에서는 근대일본의 제국화 기점을 재검토하면서 동대판 동아시아사의 가능성과 한계를 살펴보았다. 그와 함께 주요 쟁점들에 관하여 장춘판?창비판의 인식과 서술을 간략히 소개하여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중국과 일본은 각각 전근대와 근대의 제국경험으로 인해 직시해야할 제국성이 한국에 비해 훨씬 강렬하다. 그럼에도 동대판이 그것을 직시하고 성찰할 수 있는 자성사관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지역사회에서 소통될 수 있는 역사인식”을 향한 일보 전진이라 할 수 있다. 창비판은 베트남전쟁 인식에서 의미있는 진전을 보였다. 이에 비해 장춘판의 근대사 부분에는 그러한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3국을 비교해 보면 자기성찰의 정도는 제국경험에 반비례하고 사회의 민주화 정도에 정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동대판 동아시아사의 일보 전진이란 개별 사건의 서술에 한정된 것일 뿐 그 근대사 인식체계는 앞에서 확인한대로 동서대비와 대응적 방어를 양대 축으로 삼고 있다. 이 점에서는 장춘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컨대 동대판과 장춘판 모두 19세기 말 자국의 조선에 대한 정책을 상대국을 포함한 열강의 위협에 대한 대응적 방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제국의 논리(帝國談論, 帝國夢, 帝國化)와 화이사상의 논리(征伐, 役, 戰役, 藩屬)가 이 양대 축을 견고하게 묶어주는 연결고리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역할은 일본에서 가장 크고 중국에서는 그 다음이며 한국에서는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미약하다. 이런 차이도 작용하는 속에, 1920年代 이후사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체계가 동서대비 구도를 벗어나 中日對峙(일본의 침략과 항일전쟁) 구도로 바뀌었으나 일본인의 그것은 여전히 동서대비의 미일대치(대동아공영권과 대동아전쟁) 구도를 유지하였다. 이런 엇갈림은 일본인의 역사인식에서 일미전쟁의 피해기억이 일중전쟁의 가해기억을 부정하고 억누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