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文
● 교사가 파악하는 역사적 중요성과 교수학습적 중요성 -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 李美薇
최근 중·고등학교 세계사는 거대사(Big History), 새로운 지구사(New Global History), 새로운 세계사(New World History) 등 학계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며, 교육과정 및 교과서 서술 측면에서 많은 연구자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세계사 교육은 “사회과 통합과 국사 과목 독립화라는 양대 흐름의 결절점에 서서 축소를 동반한 구조 개편을 거듭당해” 왔으며, 아직도 “국사교육에 비해 변방”에 위치하고 있다.
본 연구는 중요성 문제를 통해 교사는 무엇을 가르칠 만큼 중요하다고 파악하고 있으며 왜 그렇게 판단하는지를 면담 자료 분석을 통해 살펴보았다. 또한 교사가 특정 사건을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분석하고, 예비교사와 경력교사가 수행한 논증에서의 차이를 밝혔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교사 양성 프로그램의 효율성을 높이고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경력 역사 교사의 내용 지식 양태와 그 활용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며, 본 연구는 이러한 지식의 한 양상을 구체적이면 분석적으로 밝혔다.
● 학생들은 중요한 역사를 어떻게 판단할까? - ‘내러티브 템플릿’ 사용이 역사 이해에 미치는 영향 - 金珍?
본 연구는 월취(James Wertsch)의 내러티브 템플릿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이 이론을 토대로 학생들이 역사적 중요성을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서울 지역의 4개의 고등학교에서 모두 28명의 학생이 과제 수행 중심의 인터뷰(task-based interviews)에 참여하였다. 연구 결과 한국 학생들은 ‘고통과 시련’, ‘저항과 극복’, ‘국가의 발전’이라는 테마를 토대로 하여 역사적 사건의 중요성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련?저항?발전’이라는 내러티브 템플릿은 학교 역사교육과정 뿐만이 아니라 미디어, 박물관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흔히 발견되는 역사 이해의 구조인 만큼, 학생들은 이 내러티브 템플릿에 상당 부분 의존하여 과거의 사건을 해석하고 평가하고 있었다. 비록 이 내러티브 템플릿은 한국의 정체성과도 닿아 있는 중요한 역사 해석의 틀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만 의존하여 역사를 이해한 결과 학생들은 과거 사회의 복잡한 모습을 단순화시키거나 왜곡시키게 되고, 또 선악의 자명한 구조를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학생들의 역사 이해의 제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역사교육자들은 여러 다른 종류의 내러티브 템플릿, 혹은 내러티브가 아닌 다른 종류의 문화적 도구를 이용하여, 학생들이 더욱 복합적이고 다면적으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 일본차기학습지도요령에서 ‘역사종합’의 신설과 역사교육 개혁 - 후쿠다 요시히코(福田喜彦)
본고에서는 차기 학습지도요령에서 신설되는 ‘역사종합’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역사종합’은 일본의 중등교육에 있어서 21세기형의 자질과 능력을 익히기 위해서 역사교육을 앞으로 어떻게 진척시켜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다. 글로벌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역사적 과제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익히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이지만, 일본 학술회의의 제언을 바탕으로 진행되어 온 여러 개혁이나 문부과학성 연구 개발 지정학교에 의한 ‘역사기초’의 연구 수업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지 검증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앞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글로벌 시점에서 생각해 가기 위해서도 한국의 ‘한국사’, ‘세계사’, ‘동아시아사’의 동향을 바탕으로 양국의 역사과 과목을 비교하는 것이 일본의 ‘역사종합’의 과목이 보다 풍부한 내용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일 것이다.
●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사 - 청일전쟁 이후 中國 中小學 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 오우즈지엔(區志堅)
近年 학계는 동아시아 각국의 주체적인 시각에서 각국의 역사를 연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晩淸 民國시기 中小學 중국사 교과는 모두 중국 중심주의를 기초로 하였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 여전히 淸代의 藩屬으로서 한국 문화와 정치를 서술할 때는 중국과 연동되어 있음을 강조하였고, 中日 관계도 늘 일본 문화가 중국 문화를 계승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이는 하나의 시대적 ‘역사 사실(fact)’이지만 만약 지나치게 이 관점을 강조한다면 일본이 강대해진 원인을 명확히 볼 수 없고, 일본과 한국의 주체적 시각에서 當地의 역사 문화를 연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금세기 아시아 학계가 全球본토학(Golcaloy)의 관점에서, 地方(local), 區域, 全地球(global) 層次를 결합하여, 동서양의 상호 영향이라는 생각 아래 각국 학자들이 속한 지역에서 자기 국가를 위해 본국의 역사를 分期하는 표준을 설계하길 기대한다. 동시에 현재 중국, 일본, 한국의 삼국학자가 편찬한 ????동아시아 삼국의 근현대사????가 아시아 지역에서 출판되었지만 초보적인 작업이며, 장래에 3국 학자가 함께 편찬한 보다 심화한 전문 교과서가 많이 만들어지길 굳게 믿는다. 삼국 학자의 서술 내용에 대한 國族主義 영향이나, 또 각지 학자들이 모두 자신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아시아 국가 간에 모순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역사 사실과 사료에 위배되지 않는 하에 삼국 학자가 만족하는, 전지구화의 관점과 각국 본토화의 특색을 모두 갖춘 기본 교과서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미래의 삼국 학자가 해결하여야 할 문제이다.
● 고려 후기 ‘師號’의 운영과 그 특징 - 朴胤珍
‘師號’는 ‘大師’라는 호칭과 법호를 연결시켜 某大師라 지칭하는 것으로 師號를 하사한다는 의미로 ‘賜師號’로도 불렸다. 이는 고려가 만들어낸 승려의 위계 질서인 僧階와는 구분되는 것이며 하위 승계인 大師와 다른 직함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 특히 원간섭기 이후에 고려 승려들은 고려 자체의 승계와 함께 ‘師號’를 보유하였다. 고려 전기의 ‘賜紫’ 혹은 ‘賜紫沙門’과 고려 후기의 ‘師號’ 혹은 ‘賜師號’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제도였으므로 고려에서는 처음에 국제적인 교류를 하는 승려의 직함으로 이용되었다. 전기에 ‘賜紫’가 많이 사용된 것은 승계인 大師와 구분되지 않는 ‘師號’ 대신이었다. 반면 원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원과의 교류 속에서 ‘師號’가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중국에서 ‘賜紫’ 이후 ‘師號’를 하사하여 상대적으로 ‘師號’를 높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선호했다. 또한 유가종이 어느 종파보다 원과의 접촉ㆍ교류가 빨랐던 것이 원인이 되어 그 소속 승려들이 ‘師號’를 많이 보유했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다른 종파의 승려도 ‘師號’의 직함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원과의 관계 속에서 고려 승계의 위상이 줄어들고 원과 공통적으로 이용하는 ‘師號’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점차 이에 대한 이용이 늘었다. 한편 고려 후기에 고려 승려의 직함으로 이용된 ‘師號’가 중국의 영향 때문인 것처럼, 승려가 封君이나 文散階를 하사받게 되는 것도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즉 승려가 ‘師號’의 직함을 하사받고 이것을 승계 대신 자신의 지위로 표현하거나 봉군 혹은 문산계를 하사받는 것은 원과 공통적인 제도를 지향했던 당시의 불교계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원간섭기 이후에 ‘師號’가 많이 사용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서 승려에게 중복적으로 법호를 하사하던 것과 관련되어서 고려의 ‘師號’는 중국과 달리 여러 字의 법호를 연칭하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중국에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師號’ 등을 매매하기까지 했던 것과 달리 고려는 이에 대한 매매는 없었다. 이 점들은 고려 불교계의 독자적인 면모였다.
●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행적과 조선 연구 - 朴羊信
이 글은 일본 교토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가와이문고’의 원소장자인 가와이 히로타미(1872-1918)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행적과 조선 연구를 고찰한 것이다. 1898년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가와이는 대만협회의 기관지 ????대만협회회보????의 편집주임으로 식민지와 연관된 일을 시작하였다. 이후 대만협회학교 교사를 거쳐 1907년 동양협회전문학교(대만협회학교의 후신) 경성분교의 주임으로서 조선에 건너왔다. 그는 조선에서 조선고서간행회, 조선연구회 등 여러 조선 연구 단체에 참여하는 한편, 총독부의 사업에도 관여하여 관습조사, 도서해제 작업에 참여하였다. 일본에서 세계 식민사에 대해 연구하고 있던 가와이는 조선으로 건너온 후 식민지 조선의 역사, 특히 조선시대 사회경제사를 연구하였다. 그의 조선 연구는 당국의 식민통치에 도움이 되기 위함이라는 목적에 의해 동기 지워졌다. 그 연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조선의 관습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종래의 관습-예컨대 계나 결부제 등-을 없애지 말고 그대로 식민통치에 활용하라는 이른바 ‘구관존치(舊慣存置)’의 주장이었다. 둘째로 그의 조선 연구가 지향한 것은 식민지로서 조선사회의 후진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가와이는 조선의 현 역사발전 단계가 일본의 후지와라 시대(10~12세기)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서 가족제도를 들었다. 즉 조선 사회에 특수한 ‘본(本)’제도와 분화되지 않은 ‘호(戶)’ 등을 고대 씨족제도의 유제로 파악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후진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한국사 정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체된 한국역사상을 제시함으로써 가와이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식민사관 형성에 한몫을 했으리라고 판단된다.
● 공자의 관을 덮고 나서: 중국 왕조의 공자 평가 2000년 簡史 - 金成奎
본 연구는 공자 사후 오랜 기간을 통해 중국의 각 왕조에서 제기된 다양한 평가와 그 배경을 정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중국에서는 공자의 역사적 비중이 매우 큰 만큼 관련 연구가 수없이 존재하며 이것은 본고가 이들의 연구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다만 중국 학계의 경향이 때때로 그러한 것처럼 공자 평가에 대해서도 연구의 축적은 시대(왕조)나 분야별로 집중되어 나타나고, 중국사 전체를 통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감이 있다. 이 점에서 일정한 의미를 찾으려는 본문은 2000년에 달하는 중국 왕조의 복잡한 공자 평가의 역사 과정에서 어떠한 문제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파악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통해 필자 나름의 통찰을 부여할 것이다. 공자의 영향은 한국사에서도 지대하며 따라서 관련 연구가 역시 적지 않지만 그것은 공자를 직접 논평하기보다 주로 文廟를 둘러싼 문제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중국과 달리 공자를 독자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웠던 한국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묘는 공자의 평가 문제에 직결되는 불가결한 요소이므로 본고가 국사 이해에도 접점을 갖고 있음은 물론이다. 본문은 국사와의 관련 여부를 떠나 孔廟(즉 文廟) 내부에서 전개된 從祀制를 공자 평가 문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서 함께 검토할 것이다. 공자를 ‘공자’이게 만든 그의 제자 및 후학으로 구성된 ‘공자 師團’에 대한 제사 제도인 종사제의 발달 과정은 공자에 대한 중국 왕조의 인식과 예우를 그대로 반영한 프리즘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