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세계사 교육과정 개정 현황과 쟁점: 6차 교육과정에서 2015 교육과정까지 - 金悳洙
이 논문은 최근 10여년 동안 개정된 고등학교 세계사 교육과정들의 주요 특징에 대한 비교 연구이다. 1990년대 이후 역사학계나 역사교육학계는 세계사 교육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해 왔지만 세계사교육의 기회나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사회과 선택교과 중 하나인 고등학교 세계사 과목은 학교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수능에서 최하위의 ‘비인기’과목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학입시에서 국영수 위주로 대학입시를 치르는 우리 국내 사정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용적 측면에서 보면 세계사교육에서 중요한 문제는 교육과정과 교과서이다. 문제는 어려운 교육과정 세계사 교육을 어렵게 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 나온 2007 세계사 교육과정은 지역, 지역경제 등의 개념을 내세워 서구중심주의, 중국부중심주의의 극복, 그리고 다양한 문화권이 어떻게 교류나 상호작용을 통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 발전시켰는지를 균형있게 보자는 글로벌 히스토리 관점이 반영되었다. 이러한 기조는 2011교육과정에서 비록 대단원이 한 개 줄어들긴 했지만 대체로 유지되었다. 문제는 지역세계를 키워드로 해서 상호교류를 강조한 2007/2009, 2011 교육과정은 1999년판 일본세계사B의 세계사과목 학습지도요령을 모방한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경우는 각 지역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잘 되어있는 반면에 우리는 지역세계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축적되지 않은 채 교육과정에 성급하게 반영하다보니 세계사 교육을 아주 어렵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나온 2015 교육과정은 2-4단원을 아예 동아시아지역, 인도 서아시아지역, 유럽 아메리카 지역으로 나뉘어 편성해서 각 지역문화가 고대부터 19세기까지 어떤 내용과 특징을 만들어왔는지 그 흐름을 이해하기 좋게 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동시대 각 지역간의 상호교류와 영향이 잘 드러나지 않는 단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앞으로 각 시대 지역의 기초연구를 통해 해결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 영국 공공기록물 선별체계의 역사적 흐름과 의미 - 崔在熙
일반적으로 공공기록 중 보존기록으로 선별되어 아카이브로 이관, 보존, 활용되는 기록은 대략 3% 전후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보존기록 평가 선별의 주체와 기준, 목적은 기록을 통한 역사 해석과 재해석을 위한 토대를 이룬다. 이 글은 1838년 이래 약 180년간 기록 평가 선별과 관련된 이론과 실무의 변화를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영국의 사례를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기록과 역사학의 관계를 조망하고자 했다. 현대 기록관리 전반에 걸쳐 영국의 기록 생산기관은 기록의 선별 평가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선별 평가에서 기록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커짐에 따라 역사학의 소양을 갖춘 PRO의 아키비스트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지만, 생산자는 기록의 내용과 맥락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여기에 젠킨슨은 보존기록이 역사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사실의 증거라는 이론적 인식을 덧붙여 주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기록의 양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자 그리그 시스템이 도입된다. 생산자가 기록 선별을 책임지게 되었으며 기록의 효율적 대량 폐기가 가능해졌다. 역사연구를 위해 일부 선별된 보존기록이 아카이브로 이관되어 보존되는 체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현재 전자기록 시대에 들어와 영국의 선별 평가 체계는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평가시점이 기록 생산 이전까지 앞당겨지고 기록에 담긴 정보가 아닌 기록을 생산한 기능과 업무를 평가하게 된다. 평가 주체 또한 생산자, 아키비스트, 이해관계자와 더불어 일반 국민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반면 전자기록 시대에 따른 생경한 용어와 요구되는 전문성은 일반 국민은 물론 역사학과 같은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환경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역사학계와 같은 이해집단이 기록 선별 평가에 의식적이고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록에 대한 관심이 크고 기록의 내용과 맥락을 파악하기 용이한 역사연구자 선별 평가 참여가 요구되며, 이는 역사교육을 위한 또 다른 실천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프랑스 역사교과서의 레지스탕스 서술(1962~2015) - 李龍雨
본 논문은 레지스탕스에 대한 戰後 프랑스의 역사교육을 살펴보기 위해 1962년부터 2015년까지의 프랑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들에 실린 레지스탕스 서술을 분석한 것이다. 이러한 서술이 보이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드골과 드골주의 레지스탕스의 압도적 우위였다. 드골파 레지스탕스(‘자유 프랑스’)의 영향력이 초기 독일강점기에 매우 제한적이었고, 드골 주도하의 국내 레지스탕스 통합이 늦게서야 이루어졌으며, 국내 레지스탕스가 겪은 위험과 희생이 국외 레지스탕스보다 훨씬 컸던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우위는 역사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1960~70년대의 교과서들이 레지스탕스 역사를 군사적 측면과 소수의 주요 조직들을 중심으로 서술했다면, 1990년대 이후의 교과서들은 레지스탕스 활동가들의 다양한 참여 동기와 다양한 사회적 지위 및 다양한 정치성향, 그리고 이들이 벌인 다양한 활동을 강조했으며, 1차 사료, 사진, 포스터 등의 풍부한 보조자료도 수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초기 레지스탕스 조직들 일부가 보인, 비시 정부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레지스탕스 내부의 갈등 문제 같은 부정적 측면들은 1990년대 이후에도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드골의 역할에 대한 강조와 함께, 이러한 부정적 측면들에 대한 서술의 누락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중등역사교육의 속성에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레지스탕스의 역사를 신비화하고 왜곡할 위험은 언제나 경계해야 할 것이다.
● 충숙왕대의 征東省官 - 金蘭玉
충숙왕의 재위 초반은 上王인 충선왕의 간여로, 중반부는 立省策動과 國王印 回收 등으로 국왕권의 행사가 힘들었으며, 후반부는 忠惠王과의 重祚로 인해 정상적인 王權에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고려에 부임한 정동성관은 대략 20명이었다. 충숙왕대 고려인 省官의 대다수는 원나라에 일정한 연결고리를 가진 인물이면서 동시에 충숙왕과의 개인적 관계가 돈독하였다. 또한 일부 가문에서는 省官이 ‘承繼되는’ 특징이 드러났다. 고려 출신 省官들은 충숙왕의 통치 기간 동안 국왕의 안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원 출신 성관은 이와 달랐다. 원의 法制를 고려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여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고려에 行省을 설치하자는 이른바 ‘立省策動’에 앞서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각종 비리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충숙왕대 정동성관의 활동에서 정동행성 관원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즉, 성관들의 정치적 행위가 고려 관료라는 지위로서 행해진 것인지 아니면 정동행성의 관리로서 수행된 것인지 불분명하다. 게다가 고려인 성관의 경우 대다수가 충숙왕의 지지세력이었으므로, 과연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를 통제 내지 복속시키려는 방법이 유효했는지 의문이다. 元나라는 고려 내에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使臣을 파견하여 처리하는 방식을 지속하였다. 이것은 征東行省이 麗蒙關係의 주요 현안을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반증이다. 따라서 ‘麗蒙關係의 확립기’에 양국관계를 조율하고, 고려를 통속시키는 방식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 태평양전쟁기 조선인 전문학생·대학생의 학도지원병 동원 거부와 ‘학도징용’ - 이상의
이 논문은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제의 학도지원병 동원을 거부한 조선인 대학생들이 ‘징용학도’로 동원된 과정과 작업현장에 배치된 이후의 징용생활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일제는 일본인 대학생을 징병한 데 이어 1943년 10월 조선인 전문학생과 대학생을 학도지원병으로 모집하였다. 일제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거나 전쟁에서의 희생을 꺼린 조선인 대학생들은 학도지원병 동원에 반대하면서도 관헌의 압력과 사회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어 다수가 지원병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일부 학생들은 지원을 거부하였고, 지원에는 응하였지만 적성검사를 기피하여 의도적으로 지원병에서 탈락된 학생들도 있었다. 학도지원병은 명목상은 지원의 형식을 지녔지만, 동원을 거부한 학생들은 이른바 ‘비국민’ ‘사상범’으로 낙인찍혔고, 지원병 동원이 끝나자마자 바로 노무자로 징용되었다. 학도징용이었다. 3차례에 걸쳐 행해진 학도징용은 학도병 거부자에 대한 처벌로서 행해졌으므로 징용학도들에게는 가혹한 정신적·육체적 응징이 뒤따랐다. 노동현장 배치에 앞서 제일육군병지원자훈련소에서 2주간 강도 높은 정신훈련을 받고 ‘비국민’을 훈계하는 명사들의 강연을 들어야 했다. 작업현장에 배치된 이후에도 전직 일본 군인의 엄격한 감시 속에서 이들에게는 끊임없이 황국신민으로 단련시키기 위한 정신개조 훈련이 행해졌으며, 채석장에서 돌을 나르고 시멘트회사에서 독극물을 운반하는 등 가혹한 노동으로 육체적인 고통이 계속되었다. 해방이 될 때까지 20개월 가까이 이어진 징용생활로 학생들은 부상과 질병에 시달렸으며 정신이 완전히 피폐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징용학도는 약 400명 정도로 숫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일본제국주의가 자국과 식민지의 물적 자원은 물론이고 사람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소진시켜 간 총동원정책과 침략전쟁을 거부했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다. 학도징용은 이러한 조선인 지식인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한편, 가혹한 노동을 통해 그들의 신체를 억압하고 감시하고 처벌하여 저항의식을 말살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추진된 정책으로서, 일제의 전시 총동원정책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교육정책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 사마천에서 볼테르까지: ‘趙氏孤兒’ 이야기의 進化 略史 - 金成奎
원대 기군상의 잡극(元曲)『趙氏孤兒』는 중국의 4대 비극의 하나로 꼽히며 중국인들은 이를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비교해 손색없는 것이라 한다. 『조씨고아』의 의협적 내용이 주는 인간적 감동은 義와 忠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발현하였다고 평가된다. 단지 이 작품의 주제와 내용이 기군상 개인의 독창이 아니라 그때까지 전승되어온 고사에 입각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역사 사실에 입각한 ‘삼국’의 이야기가 당?송시대 민간에서의 오락적 요소를 가미해 『삼국지연의』로 발전한 것처럼,『춘추좌전』에 연원한『조씨고아』는 『사기』에서 극적 요소가 가미된 이후 민간에 전승되다가 특히 송대의 역사적 특수성을 반영하여 기군상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청대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유럽으로 소개되어 특히 볼테르의 각색을 거친『중국고아』를 출현시켰다는 것은 단순한 동서문화의 교류를 넘는 ‘조씨집안’ 이야기의 강한 보편적 호소력을 웅변한다. 하지만 동시에 ‘조씨집안’의 이야기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역사 사실을 附會하는 경향이 나타나, 결국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를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조씨고아』와 『중국고아』에서는 노골화되지만 『사기』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화된 관점이다. 이와 같은 위상과 역사성을 갖는 만큼 ‘조씨고아’ 이야기가 일찍부터 중국인의 주목을 받아온 것은 당연하며 관련 연구 또한 부지기수에 이른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연구의 상당한 축적에도 불구하고 ‘조씨고아’에 관한 문제를『춘추좌전』에서『중국고아』까지 포괄적으로 언급해 통시적인 조망과 관점의 부여를 시도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으며, 하물며 한국에서는 물론이다. 특히 국내 역사학계에서 ‘조씨고아’는 아직도 생소한 주제로 여겨지며, 최근 영화로 소개되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이 이야기의 원형과 변형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각 ‘버전’의 상관관계와 의의에 대해 아직 충분한 소개가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소론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조씨 집안’의 이야기가 『좌전』에서부터 볼테르의 『중국고아』까지 어떠한 요소를 배경으로 어떻게 변용되어 갔는지를 주로 중국의 연구를 기초로 정리, 개관하여 나름의 사견을 보탰다.
● 거창지역의 기록과 지역사교육 - 愼鏞均
이 논문은 지역사교육이 학생들의 다양한 역사인식에 기여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거창지역의 기록을 검토하고 새로운 지역사교육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거창지역의 전근대 기록은 정사, 지리지, 읍지, 문집, 족보, 비문 등이 있고, 근ㆍ현대의 기록은 일제 관헌 자료와 신문ㆍ잡지 자료가 주를 이룬다. 그 중 읍지는 지리지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향촌에 대한 자부심이 반영된 기록이다. 이러한 읍지의 성격은 해방 후 지역에서 편찬된 향토지로 계승되면서 향토사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 거창지역의 향토사는 전근대 왕조에 대한 충절을 강조하고 근ㆍ현대사를 충실히 서술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거창지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의 유물과 유적이 남아있고, 가야,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각 시대의 기록에서 지역세력의 존재양태와 그 변천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지역세력과 지역민의 상호관계 및 지역과 중앙, 지역과 외세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역사를 통사로 재구성될 수 있다. 지역사교육에서 지역사의 기록은 학생들에게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국가사와 다른 이해관계와 시각을 보여주기 때문에 학생들의 다각적인 역사인식에 도움을 준다. 또한 학생들이 한국사와 지역사를 비교함으로써 다층적인 역사인식에 접근할 수 있다. 거창의 사례에서 군(郡) 단위에서 전체사로써의 지역사 교육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므로, 다층적 다각적 역사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지역사교육을 역사과교육과정과 연결시켜 논의할 필요가 있다.
● ‘논쟁성’에 기초한 근현대사 수업 사례? 고등학교 <한국사> 토론 수업을 중심으로 ? 李東郁
근현대사 교육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역사라는 인식이 강하며, 이해 당사자 간의 의견이 엇갈리며, 논쟁 중인 주제가 많다는 점에서 ‘논쟁성’을 가지고 있다. 근현대사가 갖는 논쟁성은 토론식 등 전면적으로 논쟁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설계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사실의 진위 여부, 사료의 맥락, 역사 해석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학문임을 학생들로 하여금 가장 실감나게 경험해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방식의 근현대사 수업을 통하여 학생들은 국가 중심의 서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다양한 인식과 해석의 가능성을 확인하며, ‘과거와 현재에 대한 통찰’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학생들은 역사수업에서 역사적 사실의 진위 여부보다, 수많은 과거의 사실들 가운데 교과서에 기록된 사실들이 왜 선택되었으며, 선택된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는 학생들이 역사교육의 주체로서 역사교육의 내용을 메타적으로 파악하고 스스로 역사 인식의 주체로 서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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