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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43輯 (2017. 9. 30.)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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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이 세계사에서 '중요한 역사'를 판단하는 기준 - 金珍??

 

 

본 연구는 학생들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세계사의 중요한 역사를 판단하는지를 살펴본 연구이다. 40명의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과제 수행 중심의 인터뷰를 실시하였다. 인터뷰 결과 학생들은 다음의 네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세계사에서 중요한 역사를 판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째, 학생들은 오늘날의 글로벌 체제가 이루어진 과정을 보여주는 사건을 중요한 세계사의 내용이라고 판단하였다. 둘째, 학생들은 한국 사회 및 문화와는 ‘다른’ 사회와 문화를 이해할 필요성을 바탕으로 세계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선택하였다. 셋째, 학생들은 시련 극복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사건을 중요한 세계사로 생각하였다. 넷째, 학생들은 한국사의 특수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세계사의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생각에는 두 가지의 모순된 관념이 함께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학생들은 글로벌 시민으로서 오늘날의 글로벌 체제가 형성된 과정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또 나와 다른 사회와 문화를 폭넓은 관점으로 이해하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속에서 세계사를 이해하고 또 한국사 이해의 틀인 ‘시련과 극복’이라는 내러티브 템플릿을 은연중에 세계사 이해에 적용하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역사교육은 좁은 개념의 국가 정체성을 극복하기 위한 민주 시민 교육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세계사는 한국사에 등장하는 국가 중심적 지배 담론을 재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하며, 나아가 한 가지 사안을 둘러싸고도 다양한 해석과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는 교과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2015 개정 교육과정과 <동아시아사> 교육과정 검토 - 池牟善?

 

 

교육과정 개발은 특정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 과정임에도, 역사교육계는 교육과정 개발 과정이나 과정 속에서 어떠한 논의가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연구에 인색하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2015 <동아시아사> 교육과정에 참여한 연구진들을 인터뷰하여 개발 과정 중에 발생한 내용과 경험을 ‘체계적이고 공식적인 기록물’로 만들어 다음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하는 연구?개발진들을 위한 연구 기록물로 제시하고자 한다. 2015 <동아시아사> 교육과정은 이전 교육과정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개발되었던 것과 달리 한국교육과정 평가원에서 개발되었으며, 이는 교육과정 전문기관으로서 컨트롤타워 기능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개발에 참여한 연구진은 성향이 고려되었으며, <동아시아사> 교육과정 연구진이 아닌 역사과 교육과정 연구진으로 섭외되어 한국사 전공자의 부재, 근현대사 연구진의 편중의 문제점이 발생되었으며, 교사 연구진들의 경우 다른 교과에 비하여 높은 참여 비율과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동아시아사> 과목을 가르쳐 본 적이 없다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또한 총론의 이상과 달리 추후 투입된 교사 연구진의 경우 기존의 연구진들은 이전 연구에 대한 설명의 부담감이, 추가 투입된 연구진의 경우 개발과 동시에 이전에 논의?검토 된 논의를 함께 파악해야 하는 부담감이 존재하였다. 2015 <동아시아사> 교육과정에 참여한 연구진들은 짧은 개발 기간과 잦은 교육과정 개정에 공감하지 못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동아시아사> 교육과정 개정 자체에 부정적 인식도 갖고 있었다. 연구진들은 총론의 일방적인 가이드라인에 어려움을 느꼈으며, 역사교육계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던 개념들에 대해서는 나름의 이해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아야만 했다. 2015 <동아시아사> 교육과정에서 가장 큰 특징은 대단원의 통합으로 주제사적 성격이 더욱 강조되었으며, 연구지들의 의도와는 달리 다른 교과에 교육 내용 적정화의 ‘상징’이 되었으나, 교과서 집필진들에게 집필 시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세계사적인 맥락과 연결된 동아시아의 ‘은 유통’에 방점을 두어 성취기준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존의 잘못된 교과서 서술인 ‘사대부와 무사’의 경우는 특집 코너로 축소되어 전체적으로 일본사의 축소가 이루어졌다. 베트남의 경우 학생들이 통사적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처음 받아들이는 점과 연구의 부족, 교사들 역시 부담스럽다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율령, 유교, 베트남 전쟁’을 중심으로 서술할 것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2015 <동아시아사> 교육과정 연구진들은 계열화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외면하였으며, ‘임진전쟁’과 ‘병자전쟁’을 ‘왜란’과 ‘호란’으로 표기함으로써 <동아시아사> 교육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동아시아사>가 등장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들에 대한 대안의 과목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대답은 힘들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부터 철저히 연구되고 분석되어야 하며, 이와 관련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 고등학교 『세계사』·『동아시아사』 교과서의 일본 근현대사 서술 - 元智姸?

 

 

2007, 2011 교육과정에 기초하여 출간된 세계사와 동아시아사는 ‘새로운 세계사’의 담론을 구체화하는 작업으로 혁신적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근현대사의 부분에서는 유럽중심주의가 극복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산업혁명과 국민국가의 형성을 거쳐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일체가 되는 지구’라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15년 교육과정은 학습분량의 경감을 시도하였지만, 학습요소는 그대로인 채 서술 분량만이 줄어들었기에 오히려 학습자의 부담은 증가하였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침략전쟁이라는 매우 적은 분량에서 등장할 뿐이다. 동아시아사에서는 1945년까지를 국민국가의 수립과정으로 파악하기에 메이지 유신에서 패전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과정들을 읽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현대부분의 기술에서는 국가와 경제정치사회라는 분야별로 서술이 분리되면서 하나의 사건이 가지는 여러 측면이 분리되면서 이해를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또한 동아시아사에서 제시한 ‘평화와 공존’은 교역과 교류의 증대로 상호이해와 연대가 촉진될 것이라는 1990년대의 낙관적 시대인식에서 출발하였지만, 실업과 무역전쟁, 배외주의, 군사적 긴장이 심화된 2017년의 상황에도 과연 유효할 것인가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 ‘민족 정체성’ 교육으로서의 중국의 초등 역사교육 - 尹世炳?

 

 

본고는 중국의 초등학교에서 실시되는 역사교육의 내용을 ????사상과 품덕???? 교과서를 통해 확인해 보는 작업이다. 5학년 1학기의 지리 내용과 결합된 역사, 5학년 2학기의 전근대사, 6학년 1학기의 근현대사를 분석하였다. 첫째, 지리 내용과 결합된 역사는 중국에 관한 자연 지리 및 인문 지리 속에 역사 내용이 삽입된 형태이다.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중국의 영토는 인격화된 유기체로서 존재하며 그 존재의 의미를 타이완이나 황화 등을 통해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영토를 배경으로 살아온 여러 민족들은 각기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일구어 왔으나 크게 보면 ‘중화민족’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여러 민족들은 염제와 황제가 동일한 조상이며, 오랜 동안 한족과 소수민족이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전근대사는 의식주, 도자기, 한자, 책 등 생활사와 문화사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의 삶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요소들을 통하여 학생들의 눈높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 구성에 담긴 문제 인식은 중국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중국의 우월적 지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자폐적 인식을 키울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셋째, 근현대사는 아편전쟁 이후 주권이 침해당하는 굴욕적 상황이 배경으로 설정된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침략으로 중국의 수난이 극대화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민족의 수난에 이어 외세에 맞선 민족의 영웅적 투쟁을 서술한다. 그리고 수난을 당하고 있는 민족의 확실한 구원자 역할은 중국 공산당이라는 구도로 내용이 전개된다.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항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하고 해방을 맞는다는 로망스 서사 형식이다. 해방 이후에는 다시 중화민족이 우월적 지위를 회복하고 세계 속에서 그 위상이 높아진다는 내용 구성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보면 중국의 초등 역사 내용에서 긍정적인 요소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전근대사를 의식주를 통해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고 탐구 활동을 전개하기 용이하게 구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근현대사 영역에서도 확인된다. 삶의 방식이 어떻게 변하였으며 그것을 통해 시대를 읽어낼 수 있도록 어머니와 딸의 가계부를 비교하는 방식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런데 ????사상과 품덕????을 통해 본 중국의 초등 역사교육은 전반적으로 중화민족의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국가주의적 경향이 짙다. 그래서 역사교육에서 견지해야 할 성찰의 측면은 상당히 취약하다. 학생들에게 민주시민보다는 스스로 중화민족의 일원임을 확인하고 애국자로 성장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올바른 민주시민으로의 성장을 위해서는 우월적 존재로서의 중화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민주주의, 인권, 평화 등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끊임없는 비판적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민족도 건강한 공동체로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고려시대 ‘교과서 서사’의 해체적 읽기와 역사적 사고 과정의 구현 - 金玟政?·崔鍾奭?

 

 

 

본고에서는 고려시대 교과서 서사를 몇몇 주요 주제를 사례로 하여 그 형성과 현황에 대해 비판적으로 살펴보았다. 연구 성과를 검토하여, 교과서 서사가 단순화시킨 당대 역사상과 논쟁적인 해석의 지점을 사료 속에서 찾아보고 의견을 구성하도록 인식의 경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인지적으로 도전하고, 역사적으로 사고하게 하는 경험에 초대하는 것은 중심 질문의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본고는 역사교육의 내용이 역사 탐구 속에서 체득될 수 있도록, 역사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학습 내용을 역사적 사고력의 함양과 같은 당위를 구체화하는 인지 과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학습자가 역사적 인식과 사고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수업을 구상할 때 참고할 수 있는 다양한 사례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여. 역사 지식 형성의 근간이 되는 ‘사료’를 읽고 사고하고 연구하는 방법을 놓고, 역사 수업에서 적용 가능한 방안에 대한 일 사례를 제시하였다. 역사교육의 입장에서는 교육과정의 내용 구성 등을 통해 역사 이해의 맥락을 재구성하여 역사연구의 방향에 시사점을 제공하는 측면도 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식으로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의 서로 다른 지점에서 상대 학문에 대한 요구를 증진시킴으로써 앞으로 양자의 접촉점이 점점 확대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 교과서의 고려시대 사회사 쟁점 연구 - 姜恩景?

 

 

‘2010-2013년간 사용된 역사교과서’를 사회사 중심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2014년도부터 사용한 『고등학교 한국사』 8종과 정부에서 제시한 지침안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사회사에서 가장 중시된 분야가 신분제도였는데, 지침안에는 철저한 4신분제를 관철하고 있지만 1970년대 이후 이미 양천제가 바탕이 되어 있어서 각 교과서에서는 양천제에 입각하면서도 표면상으로는 4신분제를 혼용하고 있었다. 현 연구 상황이 제대로 반영되고 있지 않은 대표적 사례이다. 반면 너무 오래된 관념으로 논쟁이 요구되는 사항으로 귀족제론이 있는데, 각 교과서에서는 지침안대로 ‘귀족’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제 시행에도 주목하고 있었다. 즉 관료제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 연구 성과와 상관없이 용어가 바뀐 경우도 있었으니 ‘중간계층’을 ‘중류층’으로 바꾼 사례이다. 사회사에서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용어를 일부 연구자들이 너무 쉽게 용어를 바꾼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연구 성과의 결과를 교과서에 그대로 표현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 ‘농민과 천민의 봉기’이다. 긴 연구 과정에서 선택된 용어로서 가치가 있지만 교과서의 체계화된 신분제도에서는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특이한 것은 가족 제도와 여성의 지위에 관해서 지침안의 의도와 내용은 매우 상세하고 의미 있게 제시되었는데, 오히려 각 교과서는 너무 평이하게 서술하여 가치를 잘 드러내지 못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쟁점에 대하여 제언을 붙이면 첫째, 귀족 사회라는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고려에서 처음 시도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던 과거를 통한 관리의 등용, 그리고 그들에게 경제적 기반으로 제공되었던 토지의 분급 등은 바로 본격적인 관료제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째, 신분제도에서 용어의 문제이다. 우선 사회사 연구에서 잠정 사용되고 있는 중간계층은 아직은 대안이 없는 관계로 그대로 사용하고 ‘중류층’으로 변경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반대로 너무 오래 사용되었던 ‘농민과 천민’의 봉기는 제대로 된 용어로 바꿀 필요가 있다. 교과서 지침대로 한다면 바로 ‘양민’과 ‘천민’으로 바꾸는 게 알맞는 용어일 것이다. 이와 아울러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고려국가가 파악했던 당시의 용어 정호와 백정을 살려 쓰는 건 어떨까 하는 제안도 해본다. 무엇보다 고려사회의 특징으로 잘 나타나는 부분이 가족제도와 여성의 지위에 관한 것인데, 이 분야는 현재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보다 다양한 사례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서술되었으면 한다.

 

● 교과서의 고려시대 대외관계사 쟁점 연구 - 金順子?

 

 

이 논문은 2013년에 검정을 통과하여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등학교 한국사』(8종)의 고려시대 대외관계사서술의 구성을 검토하고, 그를 토대로 몇 가지 쟁점을 검토한 것이다. 앞으로 역사 교육 과정 개정이 개정되거나 교과서를 집필할 때 개선할 점을 제안하였다. 고려시대의 대외관계사는 ① 동아시아세계질서론, 혹은 책봉·조공 관계, ② 항쟁사, ③ 교류사의 세 영역으로 연구되어 왔다. 현행 교과서의 서술 분량과 체제 구성에서 검토하면 ①은 2.2~7.8% 비중, ②는 55.8~58.0% 비중, ③은 36.4~39.8% 비중으로 되어 있다. ①은 지나치게 소홀하게 다루어진 반면, ② 항쟁사는 8종 모든 교과서에서 50% 이상의 비중으로 다루었는데, 이는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의 경향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대외관계사의 쟁점 사항이 교과서에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지 검토하여 아래와 같이 5가지를 제안하였다. 첫째로. 고려시대의 동아시아세계질서론, 혹은 책봉·조공 관계를 당시의 사실 그대로, 보다 비중 있게 서술하여야 한다. 둘째로,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에 대한 항쟁사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서술을 지양하고, 강화 이후 평화 기간과 대외 관계에 대하여도 좀더 중요하게 서술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여진족을 야만시해온 당시인들의 화이론에서 벗어나야 하며, 한국사에서 여진족을 어떻게 서술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셋째, 고려 전기의 다원적 세계질서와 고려의 황제국 체제를 보다 중요하게 서술해야 하며, 넷째, 현행 교과서에서 전혀 서술되지 않은 고려-명 관계의 다양한 측면도 서술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국가, 종족에 대한 인식은 대외 노선과 정책을 결정하는 기반이므로 고려시대의 대외 인식에 관하여 보다 비중 있게, 객관적으로 서술하여야 할 것이다.

 

● 일제강점기 직원록과 신문자료를 통해 본 교원 배척 동맹휴학의 양상 - 1920년대 보통학교를 중심으로 - 金廣珪?

 

 

본 논문은 1920년대 보통학교 학생들의 교원 배척 동맹휴학에 대하여 교원 배척의 원인과 맹휴의 전개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학생들이 처해 있던 교육 여건과 학생들이 특정 교원을 배척하는 집단행동을 전개하도록 추동했던 힘을 규명한 것이다. 본고는 맹휴 연구에서 일제측의 자료에 의존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신문 기사 검색 웹사이트를 이용하여 1920-1929년 보통학교의 교원 배척 맹휴 186건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원 배척 맹휴의 결과를 파악하기 위해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에서 배척 대상이 된 교원의 맹휴 이후 전보, 휴직, 사직, 감봉 등 인사 상의 변화를 확인하였다. 이로써 1920-1929년 보통학교 교원 배척 맹휴 186건 각각에 대하여 발발 시기, 배척 사유, 배척 대상 교원의 민족과 성별 및 인사 조치 여하, 맹휴 참가 학생의 학년과 징계 여하, 기타 전개 과정 상의 특징 등의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일제측의 자료가 맹휴를 막고자 하는 통치자의 관점에서 수집·분석된 것인 반면, 이와 같이 확보한 맹휴 관련 신문 기사와 배척 대상 교원의 직원록 상 인사정보는 조선인의 관점에서 본 맹휴의 실태와 일제측의 대응을 보여주고, 개별 맹휴 건에 대하여 발발에서부터 종결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맹휴 연구에 필요한 심층사료라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이 심층사료를 통하여 맹휴에 대한 전체상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본고에서 규명한 보통학교 교원 배척 맹휴의 특성과 역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원 배척의 가장 큰 이유는 수업 문제와 폭력 등 교원의 비교육적 언행이었다. 교원-학생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학교의 특성 상, 수업을 포함한 학교 생활에서 교원이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둘째, 배척 대상 교원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행태에는 민족차별적·민족모욕적 언행이 포함되어 있었다. 학교 내의 민족 대립, 학생의 민족의식·항일의식이 맹휴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셋째, 학생들은 맹휴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겨 진행해 가는 데서 중등학교 학생이나 성인의 단체활동에 못지 않은 실행력을 보여주었다. 그 동인은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성장, 맹휴 주도층인 고학년 학생 중에 나이가 10대 후반인 학생들이 많았다는 점, 상급학교 진학이 불가능한 형편의 학생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이들이 진학을 위해 교원의 부당한 행태를 참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 등이었다. 넷째, 학생들이 맹휴를 일으키면 학부형회가 나서 학생을 지원하였다. 거듭 회의를 열어 여론을 환기하고, 학교에 찾아가 교원의 비행을 질의하고, 학부형대회를 개최하여 학교측을 압박하는 등 맹휴를 지원하는 학부형회의 활동은 일제강점기 평범한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의 일례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교원 배척의 가장 큰 이유가 불성실 교수, 교수 능력 부족, 폭언과 폭행, 학생을 대하는 비교육적 태도였다는 것은 학생들이 교원에게 보다 나은 수업, 친절한 응대를 요구했음을 의미한다. 1920년대 보통학교 교육이 조선인 사회에 안착되어 가면서 조선인들은 보통학교 교육을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로 전유해 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학교와 교원에 대해 보다 높은 교육의 질을 요구하였고, 그 요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과감히, 또 당연히 맹휴를 실행할 수 있었다.

 

● 南宋代 四川 官僚의 향당의식과 인적 교류망 - 裵淑姬?

 

 

사천 출신인은 조정에서 사천 지역의 이익을 위해 발언하였으며 특히 유성시를 계속 실시하는 것에 찬성하여 소흥 27년 송 조정에서 사천유성시를 폐지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남송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사천 출신인이면서 유성시 급제자인 위료옹은 사천 사인이 과거 取士에서 선발율이 높으며 남송 과거 취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나 選人의 改官에 어려움이 있으며 대다수의 유성시 출신자들의 仕途가 순탄하지 못하며 적체되므로 “冗官”현상이 심각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유성시가 사천출신자에게 기회인 것은 사실이지만 관계 진출에 있어선 오히려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남송대 사천관료의 중앙정계 진출은 장준이 중용되었으나 진회가 재상으로 있을 때 배척되었다가 진회 사후에 효종의 “회복”정책으로 다시 중용되면서 재기되었다. 사천 출신인은 대체로 진솔·충직·정치세력에 쉽게 부합하지 않고, 이적과 화의에 반대하는 성향이 있었다. 蜀士들이 중앙정계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한 시기는 효종의 “회복”정책으로 북벌의지가 강하던 기간에 중용되었던 우윤문에서부터 조웅까지라 할 수 있다. 그 이전은 진회, 이후는 王淮가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시도 화의의 안정 위주였기 때문이다. 이 이십여 년의 기간을 본고에서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사천출신인의 성향이 전환되는 시기라고 보았다. 왕회가 재상에 오른 이후, 더 이상 중앙정계로 추천되었던 인물은 없었던 것 같다. 유성시 출신자들은 대부분 회피제와 무관하게 사천지역 내에서 사환하였다. 특히, 이종 때 위료옹을 중심으로 촉사들은 사천 지역에서 광범위한 교류망을 형성하였다. 본 논문에서 위료옹의 『鶴山文集』의 묘지명에 수록된 유성시 출신자들과의 교류를 살펴본 결과 이들은 유성시에 합격한 후 위료옹과 인적인 교류망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본 논문은 기존에 사천 출신인의 중앙정계 진출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거나 소략하게 다루었던 부분에 대한 보충이다. 재향 사대부로 정착된 것은 국가 정책과 관련이 있으며 효종 중후기의 정책 변화로 사천 사인들은 사천지역에서 광범위한 사회적 교류를 가지면서 학술이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일조하였던 것이다. 

 

<書評>

 

● 김정인 지음,『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민주주의 개념으로 독립운동사를 새로 쓰다-』, 책과함께, 2017 - 洪宗郁

 

 

● 김종학 지음,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일조각, 2017 - 玄明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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