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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44輯 (2017. 12. 30.)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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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기 입헌군주제 논의와 한국사 교과서 서술 - 金 鍾 俊

 

본고는 대한제국기 군주권, 민권, 국권의 관계와 관련하여 새로운 시각들을 반영하여 두 가지 쟁점을 뽑아 보았다. 첫째는 대한제국 시기 군주권 강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고종은 나름대로 서구 정치체제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고, 서양인 고문을 통해 과도기적 절대군주제를 실시하면 더 효율적이라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독립협회 입헌군주제 논의의 한 축을 담당하던 윤치호 역시 이러한 생각을 일부 수용하고 있었다. 둘째, 서구와 동아시아의 입헌정체론이 너무 도식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다. 우리가 받아들인 독일형 입헌군주제는 그저 상대적으로 ‘후진적’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독일에서 보편적 자유·평등의 개념보다 강력한 군주권 하에 애국심 고취를 중시하는 정치체제가 자리잡아 가는 맥락, 그리고 동아시아 개화지식인들이 국권 상실의 위기감 속에서 이같은 입헌군주제를 수용해 가는 맥락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독립협회 활동기 입헌군주제 관련 서술을 검토하였다. 최근의 검정교과서들을 보면 학계의 연구성과들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교과서들은 근대적 정치 체제를 추구했지만, 민중관에서 한계를 드러냈다면서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특히 각종 탐구 활동을 통해 독립협회가 지향한 정치 체제와 대한제국이 지향한 정치 체제의 차이점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 경우 입헌군주제와 절대군주제를 이항대립적으로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근래의 새로운 연구시각과도 어긋나고, 역사적 사고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교과서 내에서 광무개혁의 ‘근대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고종을 항일운동의 중심에 놓는 서술과도 모순된다. 그렇다면 당대 강력한 군주권을 바탕으로 한 국권이 기대되었던 맥락과 그러한 국가주의가 갖는 문제점을 함께 다루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그렇게 해야 이상형으로서의 입헌군주제와 현실태로서의 대한제국을 병렬적으로 긍정하는 이중적 시각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 변법운동시기 개혁파의 의회제도 개설과 立憲君主制 논의 - 이춘복

 

변법운동시기 개혁파가 제기한 정치주장은 ‘設議院(의회를 설치하다)’, ‘立憲法(Enactment of Constitution, 헌법을 제정하다)’이라는 두 가지 그들의 정치강령에 부합하는 핵심 가치이다. 공민의 선거권에 기반을 둔 의회 개설 주장은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적 관료주의 체제라는 폐쇄적인 빗장을 여는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또한, 강유위 등 개혁파가 주장한 근대적 군주입헌제는 비록 당시 영국의 입헌군주제의 유형에는 못 미치지만, 독일과 일본의 군주입헌 유형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할 수 있다. 물론 개혁파가 강유위의 「제6차상서」이후 상원위주의 정치노선으로 전환하긴 하였지만, 민선하원(Elected Lower House) 개설이라는 정치이상 자체를 결코 부정한 것은 아니고, 단지 하원 개설시기를 制度局(bureau of institution, 즉 상원) 설치와 흠정헌법 제정이후의 사안으로 유보하고, 미래에 실현할 향후 목표로 남겨 둔 것이다. 이는 主權在民과 같이 군주권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의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청말 당시 고도로 집중된 전제 군주제와 전혀 다른 시스템인 절차적 민주주의 시대로 나아갈 첫 번째 정치적 실험이었다는 측면에서 획기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2009 개정 교육과정 시기 고등학교 역사(사회과) 교육과정 편성 현황 및 특징 - 김성자

 

본 논문에서는 2009 개정 교육과정 시기, 2013 개정 교육과정의 적용을 받는 2015학년도 고등학교 1학년 입학생의 사회(역사/도덕 포함) 교과군의 교육과정 편성표를 바탕으로 단위학교의 교육과정 편성 현황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2009 개정 교육과정의 핵심 아이디어가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파악하였다. 먼저 집중이수제는 정책적으로 폐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 현장에서도 거의 실시되지 않고 있었다. 단위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권이 확대되면서 학교 현장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사회과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과정의 경우 사회과에 배정된 이수 단위가 매우 적어 학교간의 차별성이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과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이는 단위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권 확대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현된 사례로 볼 수 있다. 고등학교 전 학년으로 선택 교육과정을 확대한 명분이 되었던 학생의 선택권 문제의 경우, 선택 이수 단위 및 선택 과목수, 선택군 편성 방식 등을 통해 볼 때 학생의 자유로운 과목 선택은 일정 정도 제한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사 필수화는 일반사회·지리 영역보다는 세계사와 동아시아 과목 편성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처럼 사회과의 경우 단위학교의 교육과정 자율성 확대 정책은 총론에서 의도한대로 구현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흥미와 진로에 따른 학생의 선택권 확대’, ‘학습량의 감축’이라는 총론의 의도는 대학 입시(수능에서의 유불리 여부), 단위 학교의 교육과정 편성의 용이성, 사회과 4영역간 세력 균형 추구라는 현실적 요인에 의해 굴절되고 있었으며 때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 예비교사에게 사료란 무엇인가?: 객관성, 사실, 그리고 증거 - 이미미, 박지원

 

 

사료에 대한 이해와 역사 연구에 대한 지식은 역사 교사가 갖추어야 하는 교수내용지식 중 바로 이 영역, 역사학의 본질 영역에 속하는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역사 교사는 이렇듯 사료에 대한 이해를 갖추어야 하지만, 역사 교사가 사료에 관해 어떤 이해를 갖추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를 어떤 도구로 평가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런 연유에서 본 연구에서는 모종의 기준을 설정하고 교사들이 이 임의적 기준에 도달하였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살피기보다는, “교사들은 사료에 대한 어떤 이해를 갖고 있는가?”를 탐구하는 연구를 설계하고 수행하였다. 본 연구는 교사 중에서도 예비교사에 주목하였다. 현직에 종사하는 교사의 사료나 사료학습에 대한 인식은 다양한 현장 경험과 교직 경력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현직 역사 교사에 비해, 예비교사는 현장 경험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사료와 사료학습에 대한 이해, 곧 교사로서의 사료와 사료학습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을 보여줄 수 있다. 곧 본 연구에서는 현장 경험이 영향을 미치기 이전 상태, 곧 출발선(baseline)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예비교사의 사료 이해에 천착하였다. 교사가 사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사료학습은 무엇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지에 대한 교사의 인식은 사료학습 실천에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사료학습의 향상을 위해서는 이와 같은 교사의 인식을 면밀히 탐구하고, 이로부터 사료학습의 개선 방안 및 역사 교사 양성 과정의 개선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목적 하에 본 연구는 1개 교육청 소재지에 위치한 6개 사범대학 교사양성과정에서 4학년 역사교육 과목 수강 중인 예비교사를 대상으로 사료에 대한 인식을 설문 조사하고 사료학습과 교사양성과정에 대한 시사점을 제언하였다.

 

● 세계사 교과서에서 서양중세사의 의미: 검토와 제안 - 홍용진 

 

본 논문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 서양 중세사 내용구성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언급은 세계사 교과서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 세계사 교과서는 전통적인 구성방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중세사의 내용은 현재 한국 사회에 유의미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최신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서양중세사의 내용적 특성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 삶의 다양성과 통일성(크리스트교를 중심의 통일화 과정과 다양한 삶의 방식들의 공존), 2) 권력의 파편화와 보편성(제국/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꿈에도 불구하고 탈중앙화되어 있는 현실 권력들), 3) 가치의 내재성과 초월성(속인 공동체 내부의 합의와 신과 같은 초월적 가치에 의한 정당화 사이의 대립). 각 특징들 중 삶의 다양성과 권력의 파편화, 가치의 내재성이 역사적 현실과 연관된다면 이것들의 대립쌍인 통일성과 보편성, 초월성은 중세인들의 이상들을 반영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세계사 교육의 현재적 의미를 모색할 수 있는 교과서 재구성의 계기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를 통해 다양한 지역 문화와 다문화 사회를 이해하고 여러 세계의 여러 다양한 공동체에서 필요로 하는 세계시민적 가치관들을 함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2016·17학년도 역사 중등교원 임용시험과 중국 근·현대사 사료문항의 부정확성 - 허원

 

본 연구는 2016, 17학년도 역사 중등교원 임용시험의 중국 근?현대사 사료 문항 가운데 문제가 있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임용시험 사료 출제 방식의 바람직한 개선과 보완 방향을 모색코자 시도된 것이다. 2016학년도의 근대사 신축조약 관련 문제와 2017학년도의 현대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 강령 문제 모두 제시문의 내용이 원 사료와 부합하지 않거나 번역이 부정확하여 오해와 혼선을 빚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번역된 사료를 원 사료와 엄밀하게 대조하지 않은데서 오는 착오로 보여진다. 임용시험 문제의 신뢰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이러한 실수는 재발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 출제자와 검토자의 사료 해독과 활용에 대한 보다 진지한 주의와 함께 출제?검토 인력의 보완, 전공구성의 효율화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관련 부분의 개설서 내용들도 사료에 기초하지 않은 잘못된 기술이 상당수 발견되어 조속히 시정해야함을 지적하였다.

 

● 선조대 경인통신사의 사행과 조정의 대응방식 - 김돈

 

 

본고는 선조대에 이루어진 경인통신사의 사행 결정과정, 사행이후 상반된 보고를 둘러싼 당시 조선의 대응,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실제로 이루어진 대비태세와 그 한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 선조 23년(1590) 3월부터 1년간 이루어진 경인통신사의 사행은 세종 25년(1443) 이후 147년 만에 이루진 사행이었다. 경인통신사의 사행 결정부터 이후 임란 직전까지의 자료를 잘 살펴보면 조선은 주도면밀하게 사행을 결정했고, 또한 사행이후 일본 침략 가능성에 관한 내용을 명나라에 알리는 데에도 조정의 논의를 거쳐 통보하였다. 선조 24년(1591), 경인통신사가 돌아온 이후 조정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탐지하고자 하였다. 전한 오억령은 일본 사신을 통해 전해들은 병화의 가능성을 상계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정에서는 곧바로 체직하였다. 그리고 상반된 보고를 한 황윤길과 김성일을, ‘비변사의 논의에 따라’ 은밀히 일본 사신들에게 보내 탐지했을 때도 일본 사신들이 말한 사유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비변사가 중심이 되어 일본의 병화 가능성을 탐지하고 있었음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선조도 사신들의 상반된 의견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 조정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엄밀히 단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조정은 당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무인으로서 국방과 무치에 밝은 인물들을 발탁하거나, 성곽수축과 병비순시 등의 실질적인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어떠한 효과를 거두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설령 정사?부사의 일본 침략 가능성에 관한 정형 보고가 동일하여 실제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었다면 당시에 과연 일본의 침략을 초전에 격퇴하여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조선은 일본이 1세기에 달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이 어떻게 어느 정도 변화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신무기인 조총에 대한 인식의 결여와 함께 막상 전란이 일어나자 병력운영체계의 혼란으로 인해 출병할 수 있는 제대로 정비된 병력 자체가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 지금까지 임진왜란사의 서두에 등장하는 경인통신사에 대해서는 당시 이들이 일본의 정황을 어떻게 파악했는가 하는 보고여부에 마치 조선왕조의 모든 명운이 걸려있는 것처럼 인식해 왔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개설서는 임진왜란사의 서두에 정사와 부사간의 입장 차이를 거론하고, 그 입장 차이는 당파가 달라서이며, 이로 인해 일본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탓으로 엄청난 피해가 야기되었다는 식으로 서술해 왔다. 정상적인 국가의 조정이라고 할 때 이렇게 까지 무대책일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조정은 실제로 일본 가능성에 대해 무방비로 일관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이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것은 전국시대를 거쳐 통일을 달성하여 중세국가로서 최고도에 달한 일본 무치(武治)의 군비 수준 및 침략의지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비하였음에도 그에 관한 논의자료가 누락된 것은 무엇보다 인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논의과정을 비밀리에 진행했다고 할 수 있고, 다음으로는 임란이후 전란에 대한 책임회피와도 일정한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南山의 二元的 神社 體制 確立: 朝鮮神宮의 建立과 京城神社의 對應 - 비온티노 유리안

 

본 논문에서는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과 경성신사의 경쟁관계가 ‘이원적 신사 체제의 확립’이라는 방식으로 해결되어 간 양상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남산의 변화와 그것이 조선인에게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주요한 관심사였다. 선행연구를 통해 남산이 일종의 일본식 신역으로 개발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성과를 토대로 이 논문에서는 남산의 신사 시설들의 개별적 역할보다는 그 상호 작용에 주목하여 신사시설의 경쟁과 공존 관계가 국가의 신사정책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갔는가 고찰하였다. 대한제국기인 1898년 일본 거류민단이 남산에 세운 南山大神宮은 ‘移民神社’로 운영되다가 일제강점 이후 京城神社로 이름을 바꾸고 경성을 대표하는 신사가 되었다. 한편 1912년부터 설치가 계획된 朝鮮神宮은 1925년에 조선 전체를 대표하는 신사로서 정책적으로 건립되었다. 경성신사는 이에 압박을 받아 여러 시책을 통해 스스로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두 신사가 상호 경쟁하면서 공존하는 가운데 남산 지역의 신역화가 진행되어 갔다. 경성신사에 攝社로 天滿宮, 八幡宮, 稻荷神社가 세워졌고, 남산의 다른 지역에는 乃木神社가 만들어졌다. 이 시설들은 점차 동화정책과 ‘황국신민화’의 상징물로 변모해갔다. 경성신사와 조선신궁은 조선인을 포섭하기 위해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경성신사는 조선인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려 한 반면 조선신궁은 참배를 강요하는 방식을 택했다. 두 신사의 성격 차이는, 조선신궁이 일제가 국가신도 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된 시설인데 비해 경성신사는 ‘이민신사’라는 전통을 가졌다는 점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신궁은 ‘神社神道非宗敎論’에 입각하여 국가의례로서의 ‘국가신도’를 표상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반면 경성신사는 신도의 종교성을 부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신사의 전통성, 신도의례의 관습성과 오락성을 대표할 수 있었다. 조선신궁은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받은 만큼 속박도 받았다. 그러나 경성신사는 기부금에 의존했지만 국가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았고, 조선신궁이라는 국가 시설 옆에 위치하여 경쟁 관계에 있었다. 경성신사는 우지코(氏子) 조직, 섭사 운영, ‘조선신’ 제신 등, 조선신궁이 할 수 없는 시책을 전략적으로 실시하여 경쟁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조선신궁은 단체 참배의 강요 등 국가권력이 작동하는 ‘엄숙’한 장소였다. 그에 비해 경성신사는 아키마쓰리(秋祭)와 같이 ‘활기’를 표상하는 의례 행사를 저잣거리에서 펼쳐 한바탕 놀이공간을 열고 일본인과 조선인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려고 하였다. 조선신궁과 경성신사가 가진 각각 다른 목적과 성격은 남산의 신사체제가 이원적으로 정착해갔음을 보여준다. 두 신사는 처음에는 경쟁적 관계를 형성했으나 점차 각자의 역할이 분명해지고 다른 성격을 가진 장소가 되면서 공존 관계로 변모해갔다. 이처럼 남산은 일제 당국에 의해 轉用?專有되어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억압당하고 일본인으로서 삶과 죽음의 방식을 강제 당하는 장소가 되었다.

 

● 동부 유라시아의 元帥大旗: 독?둑(纛) 그리고 툭?톡(tuγ)의 遺傳 - 김성수

 

전근대 집권 세력 또는 집권자의 상징물로서 다채로운 器物이 고안되었다. 그러나 문헌자료에 나타난 정치, 사회?경제적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 그간 역사학의 연구 분야에서 이러한 기물의 역사성을 검토해 보는 일은 그리 각광받는 주제는 아니었다. 근래 중국 正史 중 「禮樂志」를 역주하는 연구 모임이 활발한 활동을 마쳤고, 머지않아 그 결과물이 출간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근대 중국의 국가 의례 전반, 의례에 사용된 유형의 기물, 무형의 기술이 어떠한 역사성을 가지고 계승 발전되었는지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소지자의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성과 본래 기물의 기능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으로 기물의 다양한 형태, 소재, 색 또는 문양이 다채롭게 개발되었다. 이를 통해 등장한 용기, 의복, 탈것 등 다양한 기물 중 깃발은 긴 장대에 특별한 표식을 한 장식물을 매달아 둠으로써 멀리서도 그것을 소지한 집단의 성격, 집단 통수권자의 신분, 지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특히 전쟁에서는 군기의 획득과 상실이 전쟁의 승패를 가를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독?둑(纛) 그리고 톡(tuγ)으로도 불렸던 깃발은 최고위 수장을 상징하는 元帥大旗로서 고대 중국은 물론 위구르, 몽골에 이르는 초원 정치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간 중앙아시아 또는 중국 주변의 내륙아시아를 연구해 온 학자들은 독?둑(纛) 그리고 톡(tuγ)이 같은 연원을 갖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였는지, 어떤 특정 지역에 연원을 두고 계승 또는 확산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라우퍼(B. Laufer, 1874~1934)는 이란에 미친 중국 고대 문화의 내용 중 독?둑(纛)을 언급하였다. 독?둑(纛)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이른 문헌 기록이 『周禮』와 『漢書』인 점도 원인이겠지만, 동아시아 문명의 출현과 확산에 대한 학계의 상식에 기반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中原과 주변부 사이 문명 교류의 방향이 대개 중화문명에서 주변부로 퍼져나갔다는 것인데, 대체로 이는 사실에 기반 한 것이나 때로는 이것이 거스를 수 없는 보편적 가치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그간 황하 유역과 초원 세계의 문명 교류에서 독?둑(纛) 그리고 톡(tuγ)이 차지한 위상을 추적하는 일은 거의 한 세기 동안 답보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필자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高麗史』나 『朝鮮王朝實錄』을 통해 우리 역사와 독?둑(纛)의 관계를 연결시켜 볼 수 있음을 확인하면서부터였다.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뚝섬”의 명칭이 독(纛)에서 유래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현재 뚝섬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독(纛)에 대한 제사 “독제(纛祭)”가 거행되었다. 또한 왕이 수렵을 행할 때 독(纛)은 왕의 대가(大駕)를 뒤따랐고 이를 수렵지에 세워 왕이 수렵하고 있음을 원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조선 시대 독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흡사 몽골의 술드(s?lde)나 톡(tuγ)을 연상하게 했으며, 특히 톡은 그 독음까지 유사해서 서로의 상관관계에 대해 추적해 볼 부분은 없는지 필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쉽게도 현재까지 해외학계에서는 한국의 독?둑(纛)에 대해 언급하거나 이를 초원 세계의 톡(tuγ)과 연관지어 보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독?둑(纛)은 어떤 유래를 갖는 것인가? 고대 중국, 또는 튀르크, 위구르 이래 초원 세계의 독?둑(纛) 그리고 톡(tuγ)과 연결된 것은 아닌지 궁구해 보고자 한다.

 

<書評>

 

● 김한종 지음,『민주사회와 시민을 위한 역사교육』,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 강화정

 

● 키쓰 바튼, 린다렙스틱 지음(김진아 옮김),『역사는 왜 가르쳐야 하는가』, 역사비평사, 2017 - 방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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