企劃論文: 역사교육의 학습 내용 선정과 체계화 방안(2)
중·고 역사 교육과정의 중국사 학습 요소 체계화 모색
崔 宰 榮 … 1
중‧고 역사 교육과정의 계열성 논의에서 동양사 영역의 계열성 연구가 많지 않은 상황이다. 본고에서는 중국사 부분에 한정하여 중‧고 역사 교육과정에서 배워야 학습 요소를 살펴보고 그것을 체계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학습 요소의 선정과 관련하여 ‘역사용어’를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역사용어는 고유 명사와 더불어 역사 서술의 핵심적 구성 요소이다. 역사 교육과정의 학습 요소에는 역사용어가 많이 제시되어 있어 역사용어와 학습 요소의 상관 관계가 밀접하다. 이런 점에서 역사용어는 ‘역사용어’를 활용하여 학교급별 학습 요소의 체계화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 중국사의 역사용어는 2015년에 출판된 『역사용어사전』에서 추출하였다.
『역사용어사전』은 국내 다수의 역사학자가 참여하여 국내 역사역계의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있다. 『역사용어사전』의 편찬으로 ‘역사용어’를 활용하여 학습 요소의 선정 및 그 체계화가 다소 용이해졌다. 『역사용어사전』에 수록된 중국사 관련 ‘역사용어’는 모두 294개이며 대항목-중항목-소항목의 층위별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용어사전』의 중국사 역사용어 가운데 중학교 역사 교육과정의 중국사 관련 학습 요소가 중국 왕조의 대외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사 관련 용어를 중학교의 학습 요소로 하고 중국사의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를 고등학교의 세계사 학습 요소로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학교급별 학생 학습 수준을 고려하면서 중‧고 역사 교육과정의 중국사 학습 요소의 체계화를 모색할 수 있다.
서양사 학습내용 선정과 계열성 제고를 위한 논의
- 계열성 확보를 위한 고교 심화학습의 내용 선정 기준을 중심으로 -
金 政 煜 … 29
방대한 지식을 포괄하는 서양사 부문에서 교과서의 내용선정과 계열성 확립은 그 시도 자체로 논쟁적인 작업이다. 그럼에도 중고교 교과과정이 분리된 구조 하에서 통사의 반복 교육을 달리하는 근본적인 대안이 정착하지 못하고 분량의 제한으로 서양사 부분의 압축이 필요한 가운데 학교급별 차별성이 요구된다면 이러한 제한된 상황에서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 내용선정과 계열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본고는 학교급별 학습내용과 요소의 세부적 지정보다는 고교과정의 심화 학습내용 및 요소의 선정에 있어서 필요한 기준을 추리고 범주화해 봄으로써 교과서 집필에 있어 현실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내용선정과 계열성 확보를 위한 심화학습 내용 선정 기준을 논의할 때 우선적인 원칙은 이러한 기준이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목표와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몇몇 부가된 단원들이 이러한 교육 목적에 조응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단원들이 이과 별 연관이 없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는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교육과정이 지구사를 구성 원리로 수용하면서도 교류 관련 외의 장들이 그 취지를 실현하는 것과 무관하거나 심지어 역행하는 방식으로 기술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렇듯 내용의 간소화 경향을 반영하여 중학 과정의 내용지식을 일단 지금 수준으로 한정한다는 가정 하에 전체 내용에 대한 교육과정 목표의 실현 정도를 강화하는 고교 심화학습을 구성함으로써 계열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구체적인 예시를 제시하려고 시도하였다.
서아시아·이슬람 관련 중·고등학교 역사 학습 내용 계열성 연구
金 正 明 … 77
본 연구는 서아시아와 이슬람 관련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세계사의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내용 비교 분석을 통해 학교급 간 계열성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가를 검토하고 향후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했다. 그리고 이 같은 연구 목적을 위해 다음 3가지 사항을 검토했다. 첫째,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제시된 서아시아‧이슬람 지역 관련 학습 요소와 성취기준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교급 간 계열성이 충분히 확보되었는지 검토했다. 검토 결과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육과정 모두 학습 요소와 성취기준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거나 일부 단원에서는 제시하지 않는 때도 있어 중·고 간 계열성이 역전되거나 아예 계열성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둘째, 2017년 검정 고등학교세계사 교과서가 2015년 개정 교육과정이 제시한 서아시아‧이슬람 지역 관련 학습 요소와 성취기준을 충실히 반영하여 집필되었는지 검토했다. 검토 대상인 2종의 고등학교 교과서는 교육과정이 제시한 학습 요소와 성취기준을 충실히 반영하여 집필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는 교육과정이 제시한 학습 요소나 성취기준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뿐이며, 실제 교과서 집필 상황에서 집필진의 재량에 따라 추가되는 내용이 자의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셋째, 서아시아‧이슬람 지역과 관련하여 2012년 검정 중학교역사 교과서 2종과 2017년 검정 고등학교세계사 교과서 2종 사이에 학교급 간 계열성이 나타나는지 검토했다. 검토 결과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는 분량, 주제 선정, 내용 수준에서 대동소이하여 뚜렷한 계열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향후 서아시아‧이슬람 지역 역사 관련 교육과정 수립과 교과서 집필 시 중‧고등학교 간 계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학습 요소와 성취기준 숫자를 현재보다 훨씬 많이 증가시켜야 하고, 교육과정에서 수립된 기준이 실제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충분히 반영되었는지 검증하는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 또한, 집필자가 창의성을 발휘하고 지면의 제약을 우회할 수 있도록 교과서 집필 시 본문과 구분되는 특별코너나 특집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거나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학습 요소가 선정되지 않도록 철저한 내용 검증도 병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論 文
‘역량’과 역사 교육과정 구성: ‘2015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鄭 鎭 慶 … 113
본 논문은 교육과정 연구의 역량에 관한 이슈들을 역사교육 연구의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역사과 핵심역량’은 역사교육에 2015 국가 교육과정의 전망을 수용하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교사와 학생들에게 역사교과의 핵심을 보여주는 데에 그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다. 왜 ‘역사과 핵심역량’은 역사 교수와 학습을 해명하는 주요 도구가 될 수 없는가? 본 논문은 두 가지 측면을 조명한다. 첫째, 학교 역사는 내용과 지식 면에서 과다하다. 역사교육에서 사고나 기술을 지식과 조화시키는 것은 까다로운 문제이다. 역량이 역사 교육과정에 들어오면 역량과 사고나 기술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 역량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구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역량은 직업교육과 훈련에서 유래하여 아직 학교 교육과정에 적합한 형태로 변형되지 못했다. 본 논문은 이념형으로서 역량의 개념을 검토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역사교과와 호응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을지, 그리고 역사교육이 어떻게 교육과정적 개념으로서 역량과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를 다루려고 한다.
일본인 다문화가정 자녀의 위치성과 역사인식에 관한 사례 연구
張 로 사 … 163
한국 사회가 세계화와 더불어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게 되면서 ‘多文化’는 더 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학교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 되었으며, 교실 내 ‘차이’와 ‘다름’의 존재는 다양성과 평등의 가치를 체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역사수업에서 다문화가정 자녀는 자신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학교에서 학습하는 ‘공식 역사’가 서로 충돌을 일으킬 때, 지적인 갈등을 넘어 정체성의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일본인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둔 다문화가정 자녀의 경우, 다문화적 배경 위에 한국과 일본이라는 역사적 갈등 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그러므로 학생의 역사인식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한 위치, 즉 사회·문화적 배경이나 입장인 ‘위치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본고는 7명의 일본인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사회·문화적 위치성이 공식적·비공식적 역사 학습을 통해 어떤 역사인식의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사전 설문조사 선택형 문항과 사후 면담, 그리고 심층면담을 통해 탐색한 질적 사례 연구이다. 주요 논의점으로 ‘일본인 다문화가정 자녀의 위치성이 역사인식의 기저로 작동될 때 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무엇이며, 역사인식 상의 특징은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가, 그리고 이들의 역사인식의 양상이 역사학습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로 집약할 수 있다. 본 연구가 제안한 ‘관용의 태도로 학습자의 위치성에 거리두기’를 통해 다문화적 환경에서 모든 학생들이 자신과 타자를 이해하고 인정 및 존중하면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 또한 학생은 과거나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인식의 주체로서 자신의 역사적 관점을 돌이켜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위한 성찰적 역사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15세기 관영수공업의 변동과 私匠
高 恩 慶 … 211
본고는 15세기 조선왕조의 官營手工業 政策의 수립과 변동에 대해 검토하고, 私匠의 정의와 성격을 재정리한 글이다. 조선은 건국 후 체제 정비 과정에서 관영수공업 제도를 정비하여 수공업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하였다. 국가는 전업 기술인을 官匠으로 등록하고 국가의 체계와 기반을 갖추는 여러 사업에 동원하였는데, 이들 官匠은 번을 정하여 교대로 복무하고 복무일 외에는 工匠稅를 부담하며 자유롭게 물건을 제작하고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현실에서 관영수공업 정책은 국가의 의도대로 전개되지 않았으며, 당대 사회경제적 변동과 맞물려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도성 상업의 발달을 배경으로 관공장은 私的 營利를 추구하는 활동의 비중을 늘려갔으며, 나아가 관영수공업 제도에서 이탈하여 私匠이 되기도 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 私匠은 16세기 이후 등장한 독립적 기술인으로서 官匠에 대비되는 존재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 전기 官匠에게 私的 활동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점, 16세기 이전 민간 교환경제에서도 수공업제품의 조달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私匠은 ‘민간에서 활동하던 모든 工匠을 統稱’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5세기에 ‘官匠으로서 私的 營利활동을 하던 자’ 역시 私匠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다. 私匠의 활동 유형은 크게 ‘상인과 연계하여 활동한 자’, ‘자기 자본으로 사업장을 운영하며 제작과 판매를 겸한 자’, ‘영세규모로서 농업을 겸한 자’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가는 私匠의 성장에 대응하여 필요 물품을 市廛에서 구입하는 것으로 조달 방식을 변화시켜 가면서도, 한편으로 武器 제조나 최고급 왕실 물품 생산 등에 있어서는 관영수공업 방식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의 변동은 조선의 集權的 경제 정책 아래에서도 끊임없이 민간 교환경제가 발달하고 官匠․私匠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던 현실에 조응하여, 국가가 수공업 정책 운용의 범위를 주체적으로 재편성해간 과정이었다.
1910~20년대 대구상업회의소 구성원의 연대와 갈등
– 지역철도부설운동과 전기부영화운동을 중심으로 –
金 希 眞 … 239
경상도의 전통적 행정, 상업 중심지였던 大邱는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회경제적 위상의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이주와 정착으로 강고한 일본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상업적 측면에서도 근대적 교통망의 구비와 대일무역의 확대로 인해 수치상 큰 성장을 이루었다. 대구의 일본인들은 조선총독부의 지원과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지역 상권을 장악하였고, 지역 사회의 경제적 상층부를 차지하였다. 여기에 소수의 상층 조선인 지주, 상공업자들이 참여하여 상업 회의소라는 지역의 경제 기구가 설립되었다. 상업회의소의 동향은 지역 사회, 지역 경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안에 따라 연대, 갈등하는 상업회의소 구성원들의 모습은 당시 지역사회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사안에 따라 조선총독부 에 ‘우리 지역’ 위주의 정책을 청원하는 모습은 기존 지배자로서의 단일한 권력집단으로 비쳤던 재조일본인 사회를 다면적, 다층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실제에 가깝다는 의견에 힘을 실어준다. 기존의 민족 간 지배와 저항의 구도로만 설명해 왔던 일제강점기를 연대, 경쟁, 암묵적 동조 같은 보다 다양한 관점과 시각에서 구체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이라는 공간에서 지역 발전을 둘러싼 조선총독부, 지역사회, 지역 상업회의소라는 세 주체의 관계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민족 모순이 완전히 탈각된 연대는 현실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근대적 교통망의 확충, 대일무역으로 인한 성장 등 대구의 외면적 변화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변화는 민족별 격차를 벌리는 중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대구상업회의소의 회원자격 강화로 탈락된 많은 조선인 상공업자들이 조선인 경제의 발전을 위해 대구상공협회를 결성하여 대구상업회의소에 대립했다는 사실은 지역 또는 업종 등의 이해관계로 인한 연대가 일제강점 하에서 언제든지 민족 간 대립으로 대체될 수 있는 불안정한 것이었음을 의미했다.
批評論文
1894년 농민군 진압자의 政局 認識과 政治的 行路의 分岐
–『甲午軍功錄』 등재자를 중심으로 –
金 泰 雄 … 291
1894년 농민전쟁 이래 1910년 국망에 이르는 시기는 한민족 전체의 삶뿐만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시기였다. 특히 농민전쟁 진압에 가담한 인물들은 공훈의 대가로 출세가도를 달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진압자 내부 구성원들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가 착종된 가운데 정치·사상적 기반과 지향 목표가 상이한 까닭에 외세와 연계되기도 하고 끊임없이 상쟁하면서 각종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었다. 민씨척족과의 관계 여부, 조세 징수권을 실질상 장악한 향리층과 조세개혁을 추진한 갑오 개화파 정권의 충돌, 위정척사파와 급진개화파의 상쟁, 근왕주의 세력과 친일파의 대립·갈등 등이 심화되면서 인간 군상의 다양한 행로를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이들 각각의 정치집단은 을미의병과 춘생문사건, 아관파천, 환궁운동 등을 거치면서 파란만장한 집단생애사를 수놓았다. 한편, 광무정권이 군인과 유생, 일반 백성들의 군왕에 대한 충성을 장려하기 위해 장충단 건립을 추진하는 가운데 1895년에 수합된 軍功經歷書類를 母本으로 1900년경에 편찬된 최종판 『갑오군공록』도 광무정권의 이러한 의도 속에서 집성된 군공자 명단이었다. 따라서 군공록에는 을미의병에서 활약한 반일 의병 지도자들이 대거 등재된 반면에 농민전쟁 진압에 공훈을 세웠음에도 을미사변에 가담한 인물들은 제외되었다. 광무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 등재된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제의 배척과 탄압으로 인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으며 일부는 일제에 저항함으로써 대중의 뇌리에서 철저하게 망각되어야 했다. 반면에 최종판 군공록에 등재되지 못한 친일 인물들은 1907년경 복권하여 출세가도를 달렸다. 비록 이들 친일 인물이 취한 정치적 행보는 일제의 침략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들 스스로가 일제의 사주를 적극 받아들일뿐더러 능동적으로 협력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근대 국가 건설과 국권 수호 과정에서 쓰러져 간 많은 민인들의 희생과 1910년 국망에 대해 책임져야 할 몫이 적지 않다.
書 評
이성시(박경희 역), 『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 삼인, 2019
文 敬 鎬 … 321
彙 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