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 文
다문화 사회의 세계사 교육
鄭 東 然 … 1
세계사 교육은 다문화 사회의 곤경을 해소할 대안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세계사 교육을 통해 다문화 관점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세계사의 보편성과 자국사의 특수성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한다는 ‘관용’이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세계사 교육 또한 다문화 관점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다문화 관점은 단지 슬로건에 그치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집단과 문화를 객체화하고 타자화하기도 한다. 일부 혁신적인 교사들이 다문화 관점을 드러내기 위한 수업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이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세계사 교육을 통해 다문화 관점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통합’과 ‘연계’가 필요하다. 초등학교에서는 세계사와 관련된 일부 내용이 한국사에 통합될 수 있고, 중학교에서는 세계사와 한국사가 각 학년마다 한 과목으로 통합될 수 있으며, 고등학교에서는 비록 세계사와 한국사가 분리되어 가르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연계의 방식을 통해 다문화 관점을 함양할 수 있다.
학생의 과목선택권 확대 속 역사 선택과목에 대한 학생 인식조사 및 교육과정 개발 방향
– 고교학점제 선도학교 D고등학교의 사례를 중심으로 -
俞 得 順 … 29
고교학점제의 전면 도입과 새로운 교육과정의 개정을 앞둔 상황에서 역사과는 학생의 선택을 받지 못하여 과목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내적인 문제와 교육과정 편제에서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다는 외적인 문제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 주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기에 학생들이 역사 과목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파악하고자 고교학점제 선도학교인 D고등학교의 학생을 대상으로 인식조사를 실시하였다.
인식조사는 예비조사와 본조사로 나누어 2021년 12월부터 2022년 1월까지 진행하였으며, 1·2학년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하되, 학습 배경에 따라 집단을 세분화하였고, 총 349명이 설문에 응하였다. 조사 결과는 예비조사와 본조사로 나누어 제시하고, 본조사는 학생의 학년, 과목 선택의 경험 유무, 문·이과계열 선호도 차이, 교육과정상 선택 가능한 과목 등에 따라 구분된 (가-1), (가-2), (가-3), (나-1), (나-2), (나-3)집단에 대해 각각 살펴보았다.
인식조사를 통해 첫째, 학생들이 역사 과목을 외면하는 가장 주된 요인은 역사 과목 자체에서 기인한 것으로, 학생들이 역사 과목의 내용을 너무 많고 어려운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 둘째, 학생들이 과목 선택 과정에서 과목 간 연계성을 비롯한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요인을 고려한다는 점, 셋째, 역사 과목을 선택했거나 선택할 학생의 요구는 교사의 수업 역량에 집중되었다는 점 등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첫째, ‘많고 어려운 내용’ 그리고 ‘내용을 중심으로 진술된 성취기준’에 대한 대안으로 ‘교사의 내용 선정’과 ‘성취기준의 선택적 구성’이라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둘째, 실용적 관점의 학생 인식을 고려하여 공통과목과 선택과목의 연계성 제고 및 선택과목 간의 관계를 고려한 과목 구성, 친근하고 접근성 높은 과목 개발의 필요성을 제안하였다. 셋째, 교사의 수업 역량과 재량권을 고려한 선택과목의 개발 방향을 제안하였다. 무엇보다 학생의 과목선택권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역사과 본연의 성격을 지키면서 기본적인 내용으로부터 파생되는 내용, 즉 이미 배운 공통과목의 내용에서 파생된 내용을 다루는 선택과목의 개발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개항기 ‘未通商口岸’ 문제 관련 규정과 조선 정부의 대응
閔 會 修 … 77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당시 未通商口海 상행위의 금지는 6개월 뒤에 체결된 <통상장정>에서 규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적발시 무역 물품과 대금 전체의 몰수 및 신병 인도의 원칙과 더불어 예외로 조선 측에서 일본 선박을 고용할 경우는 미통상구안의 운항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1858년 중국과 영국 간에 체결된 <天津條約>의 제47관을 원용한 것으로, 그 이후인 1882년에 체결된 조미통상조약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제3조에서 상기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나, 상선 고용에 대한 언급은 누락되었다.
이후 1883년 제정된 <朝日通商章程>의 33관에서 규정된 미통상구안 관련 내용에는 적발 시 상품의 몰수 이외에 선장에게 일정액의 벌금을 물린다는 내용 및 피난 선박에 대한 인도적 구호의 경우 예외라는 내용이 추가되었으며, 이후 이 규정은 대한제국기까지 일본인에 대한 미통상구안 관련 지침으로 계속 유효하게 작동하였다. 서구 열강의 경우 1883년 체결된 제2차 조영조약에서 ① 미통상구안에서의 밀무역 금지, 적발시 체포·조사·화물 몰수 및 화물 대금의 2배 벌금 부과, ② 외국인 상선 고용시 미통상구안 항행 허용, ③ 군함의 미통상구안 항행 허용이 규정되어 이후 여타 국가들과의 조약에서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1899년 체결된 <韓淸通商條約> 역시 대동소이하였다. 벌금 부과 양상은 일본 측의 경우 500,000文이라는 정액제, 일본을 제외한 여타 열강의 경우 상품 가격의 두 배라는 정률제의 이원적 구조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수호조약에 규정된 조선인에 의한 외국 선박의 고용이라는 예외의 허용을 악용하려는 경우에 대비하여 1886년에 고용의 형태로 운항하는 서양 선박이 실제 미통상구안을 항행할 때 적용하는 규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르면 미통상구안에 대한 모든 운항은 통상구안, 곧 부산·인천·원산 등의 개항장을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특정 미통상구안에 고용 외국 선박이 운항할 경우 반드시 그 인근의 통상구안에 소재한 海關을 경유하여 통행증의 발급 및 적재 화물 검사를 수행하고 매번 이동 시마다 빈틈없이 적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한강의 마포·양화진에 대해서도 인천해관을 경유하는 유사한 성격의 규정이 제정되었다.
이와 같은 규정에 입각한 당시 한국의 미통상구안 문제 관련 사안의 단속 실태를 살펴보면, 개항장이 부산·인천·원산에만 있던 초창기에는 대상 국가는 청국과 일본에, 내용은 밀무역에 국한되어 있으며, 지시의 형태는 그때그때 현안이 발생하면 대응 조치를 내리는 식이었다. 즉 전국적인 대대적 지시와 같이 진행되지는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주도하였지만 관련 규정 제정을 주도한 해관 또한 나름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개항장·개시장의 증설에 따른 무역량의 증가로 인해 대상 국가에 러시아가 추가되었으며, 단속의 양상 또한 밀무역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內地行商이나 부지 건물 구매 등에 대한 금지 등이 수반됨과 더불어 보다 전국적 차원의 규모에서 내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 단속 지시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의 정서에 기반한 지방관들의 소극적 대응과 더불어 내국인 명의 임대의 관행 등으로 인해 그 이행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일제하 사립고등보통학교의 재단법인화와 재단 운영 - 조선인 설립학교를 중심으로 -
禹 址 旼 … 113
일제하 사립고등보통학교 재단은 대체로 조선인 교육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설립 주체에 따라 재단의 운영 구조 및 임원진 구성에서 차이가 있었다. 대한제국 황실 관련 학교인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는 재단의 역할이 광범위하게 규정되어 있었으며, 일본인 관료가 중심이 되어 재단을 운영하였다. 중앙학원 재단은 김성수와 그 측근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사립고등보통학교가 조선인 사회의 공적인 기관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학교 운영자를 견제하고자 했다. 한편 지역 주민의 협력으로 설립된 오산학교는 평의원회를 통해 지역 사회 다수의 인사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고대 로마의 연설가와 수사학 - 모의연설 교육의 의의 -
金 基 勳 … 149
이 글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몰락 이후 수사학과 연설가의 몰락이 지배적이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에 대해 재론하고자 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정치 체제를 유지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민들은 말과 연설을 통해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을 수 있었다. 광장(ἀγορά; forum)은 공간적으로 개방되어 있었던 만큼, 정치적으로도 공동체 구성원이 일정 정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정치 현장으로 기능했다. 그런 점에서 광장은 민주정과 공화정이 태동하고 작동한 터전이었고, 이곳에서 언변을 통해 활약한 유능한 인물들은 정치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이자 모범, 그리고 선생 역할을 했다. 후속 세대는 광장의 집회와 재판, 설전을 몸소 지켜보면서 성장했고, 다양한 계기와 다채로운 인물 군상을 겪으면서 시민이 되어 갔다. 고대 로마 공화정기의 사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기원전 146년 이래 공동체 전체를 단일하게 결속시킬 만한 “외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metus hostilis)”이 사라지자 공화국에는 내부의 위기와 재난 그리고 내전이 잇따랐다. 기원전 1세기말, 더 이상은 말과 연설이 온전한 기능을 다 하지 못한 시대에 피로 얼룩진 제국과 광장에 아우구스투스가 가져다준 평화가 찾아왔다. 혹자는 이 무렵부터가 로마 연설가-정치가의 위상은 실추되고 연설술/수사학은 쇠퇴 일로를 치닫게 되었다고 평한다. 자유로운 연설 공간이 줄어들거나 사라진 이래 세기가 바뀌어 수사학의 역사는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본고에서 간략히 논의한 것처럼 기원후 수사학은 학교 수사학 중심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 학교 수사학에 대한 비판도 문채나 기교만 수련하려 한다든가, 현실 적용성이 떨어진다든가 하는 식에 초점을 맞추면 일리 있는 논의이지만, 이는 비단 학교 수사학에만 적용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고전기 아테네 소피스트들의 활동이 그 선례가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제정기 로마의 학교 수사학은, 문학과 역사에서 추출해낸 전형적인 사례를 찬반 양쪽의 입장에서 숙려하고 대변하는 식의 모의연설에 중점을 둠으로써 이제는 광장이 다하지 못한 체험의 기회를 학생들에게 풍요롭게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이제는 체제 내에서 통용될 법한, 거대한 제국 내에서 있을 법한 일(res)들과 겪을 법한 인물(persona)들을 추체험함으로써 로마 시민(civis Romanus)으로 성장하는 시기를 거치게 되었다. 공화정 몰락 이후에도 수사학은 여전히 말하기와 토론을 통해 로마인을 로마인답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書 評
양호환, 『역사교육 논의의 진전과 명암』, 책과함께, 2021
白 銀 珍 … 173
윤종배, 『역사수업 살림』, 비아북, 2021
禹 州 姸 … 181
彙 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