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역사 수업에서 ‘정동행성’은 왜 학습되고 있을까?
– 2015 개정 교육과정 역사 교과 ‘학습 요소’ 설정의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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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개정 교육과정 중학교 역사 교과에서 고려-몽골 관계를 다루는 소주제 [몽골의 간섭과 개혁]은 <정동행성, 권문세족, 공민왕의 개혁, 신진 사대부> 4개의 학습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공민왕의 개혁>을 중심으로 관계성을 갖는데, 이 가운데 ‘정동행성’은 몽골의 ‘간섭’을 대표하는 학습 요소로서 <공민왕 개혁>의 대상이 된다.李 命 美 … 1
한 가지는 정동행성이 대표하는 ‘몽골의 내정 간섭’이라는 내용이 다른 후보 학습 요소들(일본원정, 공녀, 쌍성총관부)이 대표하는 인적·물적 피해나 영토의 침탈에 비해 공민왕의 개혁을 기점으로 한 정치세력의 변화상에 대한 이해를 주요 학습 내용으로 삼아 설정된 성취기준에 비추어 적합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다른 한 가지는 정동행성이 해당 소주제의 학습 요소군에서 중심을 이루는 <공민왕의 개혁>, 특히 공민왕 5년 개혁을 기점으로 한 고려-몽골 관계의 변화를 잘 드러낼 수 있으며, 그러한 변화의 의미를 강조할 수 있는 지속성을 가진다는 측면이다.
즉, 몽골과의 관계 초반인 1280년에 설치되어 유지되다가 공민왕 5년 개혁 과정에서 그 기능이 축소된 정동행성은 몽골의 고려 내정 간섭 기구라는 성격을 부여받음으로써 몽골과의 관계가 고려에 미친 부정적 영향력의 ‘지속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공민왕 5년 개혁이 고려-몽골 관계에서 갖는 단절적 의미를 부각하는 데에 매우 적합한 학습 요소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교과서에는 정동행성 외에도 몽골의 ‘간섭’ 사례로서 10여 가지가 열거되어 있고, 정동행성 이외 다수가 교육과정 개정 과정에서 몽골의 ‘간섭’을 대표하는 학습 요소로서 후보에 올랐다. ‘정동행성’이 다른 사례들과의 경쟁을 거쳐 최종적으로 몽골의 ‘간섭’을 대표하는 하나의 학습 요소로 선정된 데에는 두 가지 요소가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한국과 대만의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 비교 분석
본고는 한국의『동아시아사』와 대만의『역사2』교과서의 구성방식과 서술내용을 비교 분석하여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2장에서는 동아시아의 지역범주와 각 국가별 서술비중을 살펴볼 것이다. 3장에서는 교과서 목차를 통하여 『동아시아사』와 『역사2』의 내용구성 방식을 확인하고, 각 교과서에서 강조되는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4장에서는『동아시아사』와 『역사2』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된 주제와, 각각의 교과서에서 특히 강조된 주제에 대한 서술내용을 비교 분석하여, 서술내용상의 특징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金 裕 利 … 33
한국과 대만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경험했고, 현재 북한과 중국이라는 사회주의국가와 무력 대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특히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은 한국과 대만의 역사교육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반추하는 거울이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동아시아사』와『역사2』는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한국과 대만의 역사교육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전후 미국학계에 소개된 한국사 연구와 식민주의 역사학
2차 대전 이후 냉전 체제의 구축에 따라 동아시아 지역은 물론 냉전의 최전선인 한국에 대한 미국학계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1950년대 들어 미국의 대학에 동아시아를 연구하기 위한 연구소, 한국학 관련 강좌와 정규 교수직이 마련되고, Korean Studies Guide와 같이 한국 관련 문헌만을 대상으로 하는 문헌 목록집이 등장하는 것은 2차 대전 직후부터 미국학계에서 동아시아와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영문 한국사 개설서가 거의 없었던 시절 영역·출간된 스에마쓰의『朝鮮史のしるべ』(1936)와 하타다의『朝鮮史』(1951)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자장 속에 있다고 평가되는 저작이라는 점에서, 그것의 유입 및 확산의 경위, 그리고 이후 영역본이 출간되기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Korean Studies Guide와 그 집필진에 의해 미국학계에 알려진 이 두 책은 처음 소개되었을 당시부터, 그 영역본이 출간된 이후에도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A Short history of Korea는 영문으로 된 한국사 개설서가 없는 상황에서 교재, 참고자료로서 환영할만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제국주의적 정치선전”이라는 혹평에 직면했던 반면 A History of Korea는 사회경제적 관점에 입각해 있을 뿐만 아니라 식민통치를 준엄한 비판의 자세에서 서술했기 때문에 신선하고 객관성을 담보한 한국사 개설서로 평가된 것이다.
裵 民 才·鄭 尙 雨 … 69
결론적으로 A Short history of Korea와 A History of Korea는 한국사에 대한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에 입각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통해 일본과 대륙의 역사적 관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전전 일본인 역사가들의 시각에 충실한 한국사 개설서라 하겠다. 이들 책자가 영역되어 미국 사회에 유통될 수 있었던 것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정책적 파트너로 하여 이 지역의 안보와 미국의 국익을 관철하려 했던 미국의 정책이나 근대화론 등에 식민주의 역사학의 논의가 쉽게 부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이 두 책은 그 서술과 구성에서 확연한 차이를 드러냈지만 전전 일본인 연구자들의 한국사 연구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부정적으로 그린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었다. 사회경제적 관점에 입각한 하타다의 저작은, 한국사에 드러나는 생산 관계는 발전적 면모를 보이지만 조선 후기까지도 고대적 생산 관계가 중심이었다는, 과거 일본인 역사가들이 주장했던 봉건제 결여론과 맞닿아 있었다. 이러한 논의는 20세기 초반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처음 등장했을 당시부터 봉건제를 통하여 일본만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던 원인을 찾던 것으로, 전후 미국학계에 등장했던 근대화론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두 책은 모두 한국에 미친 외세의 압박과 침략을 중요한 역사적 결절점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는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본사의 전개를 설명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한사군의 설치, 원구, 임진왜란이 그것으로, 이는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한국을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섬나라 일본과 대륙의 역사적 관계를 드러내는 주요한 국면으로서 서술되었다. 이는 일본을 동아시아의 역사에 참여시켜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했던 전전 일본인 역사가들의 연구에 입각한 것이자 전후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한 축으로 하여 미국의 패권과 국익을 관철하려던 미국의 정책과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몽골제국 大都의 탄생과 발전
– “사람과 말의 궁정(人馬之宮)”, 그리고 不在의 권력 –
薛 培 煥 … 109
본고는 兩京之制 아래에서 大都, 곧 칸발릭(Khanbaliq)의 역사상과 개방성을 분석했다. 몽골인의 계절 이동 풍속은 쿠빌라이 카안의 상도와 대도, 곧 여름과겨울 수도를 탄생시켰다. 두 수도는 몽골제국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을 카라코룸에서 兩都로 옮겼다.
양도 관계에서 “京師” 혹은 “帝都”로서 대도(칸발릭)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논자의 인식과 달리, 대도는 상도의 최대 물자공급지였다. 상도의 물자는 연경 帑藏을그대로 옮겨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도는 몽골 황실의 정치·경제 상황에 따라겨울에 諸王 등에게 쿠릴타이 금·은·鈔·金段을 하사하는 歲例賜與의 장소로 기능했다. 아유바르와다 카안 등 일부 군주는 대도에서 즉위했다. 대칸의 상도 순행은 대도에서 留守 재상과 관원의 巡山과 巡倉이라는 새로운 여름 문화―“대도에서 여름 나기”[大都住夏; 京都住夏]―를 창조했다. 여름 대도는 ‘상도의 거울’이라 칭할 만하다.
카안의 부재는 여름 대도를 유수와 종교인, 상인이 연출하는 경제와 문화의 장소로 만들었다. 매년 가을 신민은 대도로 귀환하는 대칸을 환영했다. 대칸을 향한 신민의 순응과 환호는 장관(splendor)의 정치·의례 행위이자, 경제적 기대였다. 대칸의 부재와 귀환이 대도 주민의 일상과 경제 질서를 가동하는 시계추였던 한편, 신민의 환호는 대도성 밖 이동 군주에게 권력을 확신시켰다. 한인 지식인은 대칸의 부재에서 “무위의 정치”를 발견했다. 대칸의 “부재의 정치(politics of absence)”와 경제는 유연한 개방적 권력과 초원 전통의 소산이었다.
요컨대 양도 체제에서 대도는 “神京” 상도의 거울이자, 제국 각지와 상도를 잇는 연결고리(node)였다. 대도는 고려인에게는 개성과 상도를 잇는 접점이었다. 대칸은 대도에서 문화·종족·생태·경제 다원성과 조화를 추구했다. 대칸의 정치 이상은 “사람과 말의 궁전” 대도의 御苑과 施水堂에 투영되었다. 대도는 동시대인에게 종종 공간·정치·경제·문화의 유토피아로 승화했다.
대도는 정치·경제·문화·생태에서 반드시 상도와 동일한 지위나 역할에 있지않았다. 하영지 상도가 몽골의 전통과 유산을 기억, 재현하는 여름 쿠릴타이의 장소로서 몽골인에게 중요했던 반면, 동영지 대도에서의 조회는 한자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중시되었다. 이들의 관점은 행정적 관점의 양도론이나 몽골 시각의 상도중심론을 외면하며 대도 “定都”論을 강화했다.
대도의 지리와 역사는 주례 「고공기」의 도성 모델로 온전히 설명되지 못한다. 대도 지리의 중심은 황궁이 아닌, 中心臺와 鼓樓였다. 대도성과 그 구조물은몽골·‘중국’·이슬람 등의 복합 설계와 다원적 구성의 산물이었다. 대칸은 황궁에거의 머물지 않았다. 황궁과 대도성에서 대칸의 부재는 계절 순행과 쿠릴타이, 사냥 등 스포츠를 즐기는 유목 전통인 동시에, 대도를 잠재적 반란과 불신의 장소로 간주한 대칸의 주술적·정치적 의식에서 기인했다. 카안은 반란을 불식하고자 재산이 많고 관직을 보유한 이를 新城의 이주민으로 우선 선발했고 행정기구와 군사조직과 법령으로 신민을 통제했다.
批評論文
해방 후 似而非『韓國痛史』의 탄생
金 泰 雄 … 165
박은식의『韓國痛史』는 주체적인 자세에서 아픈 망국의 역사를 근대적인 서술 방식으로 집필한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해방 직후 번역되거나 복간된 이 책을 둘러싼 제반 사정과 사회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1946년『한국통사』를 번역하여 출간한 박노경은 일제 말기 경상북도 대구의 대표적인 부일협력 활동을 벌인 인물로서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차례를 손대고 내용을 첨삭하거나 누락하는 등 번역 과정에서 원문의 맥락을 왜곡하고 원저자의 취지를 훼손했다. 김영세는 경성법학전문학교 출신으로 일찍이 조선총독부 도서 검열을 담당하였다. 그는 한국통사를 복간하는 과정에서 원저자를 은폐하고 자기 편저로 둔갑시켰다. 그들의 과거 행적을 추적한 끝에 자신의 부일 협력 행위를 은폐하거나 호도하고자 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이후 그들은 반민특위의 해체로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심지어 김영세 편의『한국통사』는 1960년대 어느 신문 지면에서 3・1운동 관계문헌 가운데 대표적인 저서로 소개되었다.
書 評
김태웅,『대한제국과 3·1운동』, 휴머니스트, 2022
彙 報河 明 埈 … 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