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文 - I
企劃論文: 동아시아 냉전과 역사학
역사학자 박시형의 민족과 과학
洪 宗 郁 - 1
경성제국대학에서 역사학을 배운 박시형은 진단학회에 참가하여 과학적인 근대 실증사학을 전개하는 동시에, 종합잡지에 민족의 문화와 전통에 관한 계몽적인 글을 다수 발표했다. 식민지 시기 박시형의 역사학은 과학과 민족을 추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해방 직후 좌우합작 분위기 속에서 박시형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서 활약했다.
1946년 월북한 뒤에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원과 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 등을 맡아 북한 역사학 정립을 주도했다. 1960년과 1961년에 펴낸 『조선 토지 제도사』는 봉건적 토지국유제론에 입각해 경성제대 졸업논문 이래 자신의 토지 제도사 연구를 집대성한 과학적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성과였다.
박시형은 1960년대 고대사 연구로 전향한다. 1962년에 발표한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는 발해를 한국사 속에 자리매김한 기념비적인 논문으로서, 이후 남북한 학계의 발해사 연구의 기틀을 잡았다고 평가된다. 아울러 박시형의 광개토왕릉비 해석은 정인보의 해석을 계승한 것이었다. 과학에서 민족으로 역사학의 초점이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냉전 질서가 동요하면서 동아시아 역사학 교류가 본격화했다. 박시형은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여 남북한에 공통된 민족주의 역사학을 주창하는 역할을 맡았다. 1980~90년대 남한 언론에서도 박시형은 민족의 역사학자로 소개되었다.
范文瀾의 학술궤적과 『中國通史簡編』저술 배경
- 중화인민공화국의 흠정사서는 어떻게 탄생했나? -
吳 炳 守 - 47
이 글은 범문란이 중국통사를 집필하기 까지의 과정을 지성사적으로 분석함으로서 현재 중국 역사학의 성격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중국은 스스로의 역사 경험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 서술이 필요하였다. 범문란의 『중국통사간편』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흠정 사서라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중국통사간편』의 저술 배경과 내용 및 특색을 통해 현재가지 이어지고 있는 중화민국시기 자국사 서술의 한 측면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중국통사간편』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전통 학술을 맑스주의와 결합시켜 자국사를 서술하였다는 점, 특히 스탈린의 오단계설에 기초하여 아시아적 생산 양식론 등 중국사의 특수성을 부정하고 나아가 민족투쟁과 계급투쟁을 역사동력으로 삼아 중국 봉건사회의 장기적 지속성을 발전사관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특히 『간편』은 오랫동안 당의 권위 있는 저술로 군림하였데 거기에는 역시 전통적인 풍부한 서사를 적극 활용하면서 자국의 전통 문화와 유산을 충분하게 긍정하였기 때문이었다. 중국식 맑스주의를 내세우며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최근 시진핑 정권의 역사정책과 맞물려 해석할 부분이 많다.
최후의 초극전, 혹은 중국적 근대의 그림자
-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의 중국사상사 연구와 동아시아론 -
沈 熙 燦 - 91
이 글은 일본의 저명한 중국사상사 연구자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의 생애와 주요 업적을 정리하고 그 현대적 의미를 생각해본 것이다. 미조구치는 서구의 관점이나 일본의 상황에 따라 중국을 이해하는 기존의 논의를 거부하고 중국에 내재하여 중국을 인식하기 위한 방법의 고안에 노력했다. 특히 중국의 근대를 서구보다 뒤처진 것으로 보거나, 혹은 서구를 뛰어넘는 것으로 보는 태도를 지양하고 ‘중국적 근대’를 강조하고자 했다. 명말 청초의 사상가 이탁오를 중심으로 서구 기준이 아닌 중국적 사상을 연구했으며, 이를 통해 아편전쟁이나 5.4운동을 중국 근대의 기점으로 여기는 기존의 논의를 비판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조구치는 과거 ‘근대의 초극론’과 유사한 주장을 펼쳤으며, 80년대 이후 중국이 세계적 대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최후의 초극전’을 준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미조구치는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비판했는데, 정작 다케우치가 마오쩌둥과 중국혁명을 역사의 실체로 상정했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러한 미조구치의 다케우치 해석은 이후 유행한 동아시아론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 미조구치는 혁명에 담긴 희망과 가능성 대신 장기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 이를 희석시키는 논리를 만들었고, 결국 ‘중국의 충격’이라는 개념을 통해 현실 중국을 지지하는 담론을 형성했다.
중국 ‘개혁개방’ 이전, 고대 농민전쟁에 대한 인식
- 양보정책론을 중심으로 -
李 裕 杓 - 131
모택동은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에서 농민폭동과 농민전쟁을 역사 진화(발전)의 진정한 동력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농민 폭동(혹은 전쟁)이 성공하더라도, 봉건 통치 체제는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은 이른바 ‘양보정책’론을 내세웠다. 즉 농민 폭동(혹은 전쟁)이 ‘지배계급’에 압박을 주어 그들로 농민들에게 어느 정도 양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논쟁의 여지도 있었다. 바로 ‘지배계급’의 ‘농민’에 대한 ‘압박’보다 ‘지배계급’의 ‘양보’에 초점을 맞추면 역사 진화(발전)의 주체는 ‘농민’이 아닌 ‘지배계급’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지지하는 것은 봉건 지배 계급을 지지하는 반동으로 규정되었고, 이 비판론은 계급투쟁론과 맞물리면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맹목적인 폭력성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폭력적으로 되었는가? 이는 이른바 ‘신중국’ 성립 이후, 중국공산당은 다소 보수적인 새로운 통치이념을 설정해야 했지만, 여전히 급진적인 혁명 이데올로기를 계속 강조한 것에서 기인한다. 투쟁 대상에 대한 어떠한 행위도 계급투쟁론을 반영하는 혁명 이데올로기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論 文
역사적 사고 역량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독일 HiTCH 프로젝트의 시도
高 裕 卿 - 161
이 논문의 목적은 독일에서 역사적 사고 역량 평가의 도구로 개발된 HiTCH(Historical Thinking―Competencies in History)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것이다. HiTCH 프로젝트의 이론적 기원은 1970년대 Jeismann의 역사의식 연구에서 출발했다. 독일의 역사의식 이론은 Pandel과 Rüsen으로 계승되었으며, 21세기에 들어와 ‘성찰적 역사의식의 진흥과 발전’을 의미하는 FUER 역량모델로 발전했다. HiTCH는 FUER 모델이 지향하는 역사적 사고 역량의 배양을 측정하기 위해 개발된 대규모 평가 프로젝트이다.
2012-2015년 진행된 HiTCH 프로젝트는 FUER 역량모델의 네 역량영역인 질문역량, 방법역량, 지향역량, 사실역량별로 15개 과제블록과 91개 문항을 제작했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파생 연구로 내러티브 역량, 해체역량, 구술사 학습의 효과를 진단하는 문항이 개발되었다. ‘역사과를 위한 PISA 테스트’를 지향하는 HiTCH 테스트는 현재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벨기에의 독일어권 지역에서 활용되고 있으며, 국제 역사적 사고 역량 평가의 모델로서도 주목받고 있다.
역사교육 ‘현장’의 의미와 2022 개정 역사 교육과정에서의 역할
- 한국사 영역을 중심으로 -
辛 素 然 - 197
2022 개정 역사 교육과정은 고교학점제의 전면 시행과 관련한 국가 교육과정 정책에 따라 개발되었다. 기존과 다른 점은 현장 교사의 자율성을 존중하여 현장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현장의 요구에 따라 현장 교사들이 주축이 되었으므로 ‘현장’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때 현장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과거 현장은 이론과 대립되는 역사담론으로서 현장 교사들은 역사교육 이론이 현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하였다. 국가 교육과정 체제의 강제성, 계열성을 구현하지 못한 내용 체계 구성,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서사가 주요 내용이었다. 이제 현장 교사들은 빈번한 교육과정 개정과 국정화 교과서 파동 등을 겪으면서 학문적인 이론 연구자가 되었다. 현장 교사들은 실천적이고 현장적인 역사교육 이론을 창출하여 직접 교수학습 과정에 반영하는 한편 교육과정 정책을 수립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현장과 이론은 더 이상 대립적일 수 없으며, 현장이 이론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현장적’ 이론이 역사교육 이론의 대세로서 그 성과가 총체적으로 반영된 정책의 결과물이 2022 개정 역사 교육과정이다.
그렇다면 현장적 이론은 2022 개정 역사 교육과정에 어떤 형태로 적용되었으며, 이제 현장에 도움이 되겠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2 개정 역사 교육과정의 시안과 최종 고시안을 분석한 결과 첫째, 기존 국가 교육과정에 대해 비판했던 개발 방식과 성격의 문제가 개선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국가 교육과정 체제가 유지되는 이상 개발 방식이나 성격이 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계열성 구현을 위해 학교급별로 구성한 전근대사와 근현대사의 내용 체계는 실제 연계성을 갖지 못하였다. 오히려 고등학교 단계의 전근대사는 중학교 역사의 내용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셋째, 국가주의적 서사로 점철되었다고 비판받았던 전근대사의 서사 구조는 대체되거나 극복된 것이 아니라 기형적으로 축소되는 한편 근현대사의 연속성 상에서 학습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최종 고시안에서 비록 내용 체계가 수정되긴 하였으나 민주시민 양성을 목표로 한 근현대사 강조의 기조가 유지되었다는 점이 주요 특징이다. 더불어 근현대사가 강조되다 보니 근현대사 학습에 적합한 논쟁과 토론이 교육과정상 주요한 역사교육 방법이 되면서 전근대사 학습은 더욱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현장적 이론이 적용된 2022 개정 역사 교육과정 역시 현행 교육과정과 큰 차이는 없으며, 근현대사 강화라는 특징만 남았다.
근현대사를 강조하는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결국 민주시민 양성이라는 교육적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한 소재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근현대사에서 역사적으로 어떤 내용 지식이 중요한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논의가 부재한 탓에 새로운 개정 역사 교육과정은 현장적 이론의 적용을 주장하는 주축이 추구하는 가치를 반영한 결과물이 되어버린 듯하다. 새로운 교육과정에서는 학문적 성과에 기반 한 역사지식이 아닌 탐구능력을 통해 형성할 수 있는 역사지식을 강조하다보니 역사 해석의 다양성과 논쟁성만이 부각되고 있다. 교육과정 논의에서 수업방식이나 학생의 활동만을 중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역사 교육과정의 개발에 있어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학문적으로 강력한 힘을 갖는 역사지식에 대한 논의와 이를 토대로 한 핵심 내용 요소의 선정이다. 지금까지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빈번했던 개정되었던 역사 교육과정들과 2022 개정 역사 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떤 지식이 역사학적으로 중요한 내용이고 개념인지에 대한 논의에 천착한 적이 있었던가.
역사교육 이론 전문가이자 교육과정 정책을 수립하는 역할을 하게 된 현장 교사들이 역사지식의 중요성을 인지해야 한다. 신념과 가치로서 역사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여기에 맞지 않는 내용 요소를 삭제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현장적인 역사교육 이론이 교육과정 정책으로 현실화된 지금, 과연 새로운 이론이 현장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書 評
前田勇樹, 古波藏契, 秋山道宏, 『つながる沖縄近現代史: 沖縄のいまを考えるための十五章と二十のコラム』, ボーダーインク, 2021
金 玟 煥 - 235
彙 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