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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66輯 (202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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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文 - I

 

企劃論文: 재난, 문명, 그리고 역사교육

 

1930년대 前半 일제의 재난 관리금 운용방식과 조선인 이주 시책

- 1934년 낙동강 유역 대홍수 대응을 중심으로 -

金  泰  雄 - 1


1934년 대홍수로 빚어진 낙동강 유역 주민의 심각한 피해는 돌발적이고 우연한 자연현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재난을 예방하고 대처하는 과정에서 대다수 조선인 소작농을 긴급하게 구제하기보다는 일본인 농장의 장기적인 복구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대응 방식의 계급 불평등성과 민족 차별성이 오히려 심화되었다. 특히 일제의 계획 이주・이민시책이 식민지 지주제의 온존과 식민통치의 안정화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1934년 대홍수는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계획 이주·이민 시책을 본격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韓國戰爭期 중국 동북 지역 학교의 반세균전 애국위생운동

李  恩  珠 45


1952년 미국이 북한과 중국 동북지역에 세균에 감염된 독충을 살포하였다는 소식에서 시작된 반세균전 투쟁은 세균전에 대항하는 유효한 무기가 위생이라는 인식 하에 애국위생운동으로 이어졌다. 중국 정부의 주장과 달리 세균 살포로 인한 대규모 전염 병이 발발하지 않았기에 이 운동에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정부가 활용한 방법은 항일전쟁기 일본이 감행한 세균전으로 인해 전염 병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무수한 사람이 죽었던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었다. 특히 동북민은 그 경험을 직접 겪은 당사자였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더 큰 울림을 낳을 수 있었다. 신문은 그들의 목소리를 지면에 실기 시작하였고, 이 목소리로 되살아난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은 문자를 통해 재생산되었다. 

그리고 세균을 억제하는 과학적 방법이 위생이라는 주석과 총리의 호소가 전국 단위의 애국위생운동을 촉발시켰다. 이 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소년아동대였다. 소년아동대는 학교에서 선발된 소수의 모범 학생이었기에 또래 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소년아동대는 隊-團-黨으로 이어지는 위계의 하위를 차지하고, 청년단이 조직적으로 관리하였다. 그래서 이들의 활동은 정치적 경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훈련일, 여름 훈련 캠프를 통해 위생 상식과 방역 운동을 학습하였고, 동학들을 선도하여 애국위생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학생들을 선도해 위생 방역을 선전하고, 독충 잡기 경쟁에 돌입하였다. 이렇게 정부는 소년아동대를 필두로 학교 안팎의 애국위생운동을 진행하였고, 대원들은 정부의 시책에 참여함으로써 청년단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동학들 사이에서 위신을 높일 수 있었다.

소년아동대의 활약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 학교의 역할이었다. 교사는 위생 상식을 가르칠 때, 이를 정치적 구호와 연결시켜 위생이 곧 미군을 격퇴하는 무기라는 인식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교내에 각종 위생(방역)조직을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교내 청결 운동, 개인위생 습관 검사 등을 진행하였다. 뿐만아니라 학교 밖의 애국위생운동에도 학생과 교직원이 참여하였다. 그들의 역할이 특히 강조되었던 부문은 선전과 전염 병 매개체 잡기였다. 학생들은 거리에서, 마을 공터에서, 주민의 집에서 위생 상식을 선전하였고, 파리, 쥐, 구더기, 모기 등을 잡아 없애는 임무에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흑사병과 종파 갈등 

- 1665년 런던 대역병 시기 잉글랜드 국교회-비국교도 논쟁 -

朱  義  暾 - 83


본 논문은 1665-6년 런던 대역병 시기에 나타난 종파 갈등을 다룬다. 이 시기 흑사병은 영국에서의 흑사병 중 ‘마지막’ 유행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1665년 흑사병은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기억될 만한 것 이상의 독특한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17세기 중반의 청교도 혁명기와 뒤이은 크롬웰(Oliver Cromwell)의 통치기에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독점적인 지위가 무너지고 청교도가 득세하였다. 하지만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국교회 역시 귀환했다. 1662년의 통일법(Act of Uniformity)은 국교회의 의식과 기도서를 따르지 않는 종교활동을 금지했고, 통일법을 따르지 않는 성직자들은 직을 박탈당했다. 이제 청교도는 국교회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비국교도(Nonconformists)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1665년부터 런던을 휩쓴 흑사병에 대한 독특한 맥락을 제공한다. 종교적 세계관이 아직 지배적이었던 17세기 유럽인들에게 전염 병의 대유행과 같은 재난은 신의 처벌을 의미했고, 사람들은 특별히 누구의, 어떤 죄 때문에 신의 처벌이 내려졌는지 찾고 싶어했다.  그 죄를 제거하면 신의 처벌 역시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교회와 비국교도 양측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재난을 해석했다. 국교회 성직자들은 청교도 혁명기의 의회파 청교도를 반란자로 간주했고, 그들이 찰스 1세를 비롯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신이 흑사병의 재앙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또한 잉글랜드의 국가적인 죄악으로서 비국교도가 국교회로부터 갈라져나간 분열의 죄가 심각하다고 지적하면서 비국교도를 비난하였다. 반면 비국교도의 인식은 이와는 딴판이었다. 그들의 눈에 흑사병이라는 신의 처벌은 통치 세력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순전한 신앙을 추구하는 비국교도의 종교활동을 금지하는 법령은 신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비국교도 논객들은 흑사병의 빠른 종식을 위해서 비국교도에 대한 부당한 박해가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論 文


박물관에서 어려운 역사의 재현과 어려움 

- 지식의 타자성과 지식의 관계성 -

姜  鮮  珠  - 109


2000년대 이후 독일이나 미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나라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어려운 역사에 대한 염증이 감지되 있으며 어려운 역사의 해석을 둘러싼 사회적·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물관의 전시는 어려운 역사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가? 본고에서는 감정적 전시, 논쟁선호적(agonistic) 전시, 양가적(ambivalent) 재현 전시의 사례를 소개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시 방법에서 어려운 역사와 포스트메모리(post-memory) 비경험 세대의 만남이 어떻게 불안정할 수 있는지 고찰했다. 전시를 보면서 관람객이 겪는 정서적·심리적·사회적 ‘어려움’은 전시와 관람객의 만남을 불안정하게 하여 전시가 의도한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도 있고 또 전시를 회피·거부하게 할 수도 있다. 본고에서는 어려운 역사와 관람객 만남의 불안정성을 브리츠만(Debora Britzman)과 피트(Alice Pitt)가 정의한 ‘지식의 타자성(otherness of knowledge)’의 개념과 필자가 개발한 ‘지식의 상관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미국 뉴욕주 역사/사회 리전트 시험(Regents Exams) 문항 분석 및 시사점

- 선택형과 서답형 문항 -

千  恩  修 - 143

 

연구자는 뉴욕주 교육과정 기반 성취도를 측정하는 고교졸업시험인 리전트 역사 시험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뉴욕주의 고등학교 졸업시험인 리전트는 오랜 경험을 축적하며 역사 선택형 시험뿐만 아니라 서답형 시험을 함께 채택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 선택형 및 서답형 문항의 유형 및 루브릭 제작, 역사 평가 목표와 문항 개발과의 관련성에 대해 유용한 시사점을 줄 것으로 사료된다. 

이 글의 목적은 뉴욕주 졸업시험인 리전트 역시/사회 시험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고, 평가 문항이 도달하려고 하는 역사사고나 역사지식에 대한 프레임워크를 살펴보며, 기출 문항 유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며 우리나라 역사과 선택형 및 서답형 문항개발 및 채점에 적용할 수 있는 시사점을 얻는 데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뉴욕주 리전트 평가 체제와 프레임워크에서 제시하는 평가 요소 검토, 변경된 리전트 시험의 체제와 기출 문항 분석,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역사 선택형과 서답형 평가 문항 유형 개발에서 얻을 수 시사점을 제안하였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의 ‘정통국가’ 강조와 평양 정통론 부상의 궤적

李  廷  斌  - 195

 

2013 교육강령에서는 정통국가란 새로운 용어가 보인다. 정통국가는 한국사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국가를 의미한다. 고조선ㆍ고구려ㆍ발해ㆍ고려ㆍ조선을 정통국가라고 하였다. 이외에 부여ㆍ구려ㆍ진국 및 백제ㆍ신라 등은 병존국가라고 하였다. 2013 교육강령은 정통국가를 골간으로 하였다. 초급 중학교에서는 정통국가 인식을 목적으로 하고, 고급 중학교에서 폭을 넓혀서 병존국가의 윤곽적 표상을 갖게 한다고 하였다. 정통국가 중심의 한국사 체계를 제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정통국가의 영역과 문화는 평양을 중심으로 계승되었다고 하였는데, 계보의 중심은 고구려였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정통국가의 선후 계보를 설정한 것이다.

정통국가의 의미는 2000년대 후반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정통국가의 중심으로 제시된 고구려는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중시되어 왔다.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이해의 변화와 밀접하였다. 1950년대 후반~1970년대 후반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수정ㆍ부정하며 마침내 고구려 중심의 삼국시대론이 대두했던 것이다. 고구려 중심의 삼국시대론은 1950년대 후반부터 단초를 보였다. 평양의 재건과 더불어 그 역사와 문화를 주목하였던 것이 그 계기였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1970년대 고고학ㆍ고대사 연구의 축적과 더불어 평양 중심의 한국사 인식이 심화되었는데, 1974년 동명왕릉의 발굴은 그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1980년대 전반에 고구려 중심의 삼국시대론이 정립되었다. 

1990년대 전반 평양 중심의 한국사 인식은 경화되었다. 일련의 사업으로 개건된 단군릉ㆍ동명왕릉ㆍ왕건릉이 그를 상징하였다. 특히 단군릉의 발굴이 주목된다. 이로써 평양은 반만년의 수도로 격상하였고, 대동강 유역은 인류 문명의 발생지ㆍ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그런데 동명왕릉ㆍ단군릉에 대한 북한 학계의 주장은 무리했다. 동명왕릉ㆍ단군릉 발굴은 일종의 정책 사업이었다. 동명왕릉은 1970년대 주체사상의 확립 과정에서 민족주의적 고고학ㆍ고대사 연구가 요청된 데 대한 응답이었다. 

동명왕릉 발굴에 기초한 고구려 중심의 삼국시대론은 평양에 민족사의 정통성을 부여하였다. 남북의 분단 속에서 민족사의 정통은 평양에 수도를 둔 북한으로 계승되었다고 하는데, 그 정점은 김일성이었다. 1993년 발굴된 단군릉도 마찬가지였다. 민족사의 정통성은 김일성ㆍ김정일의 정치권력과 계승을 정당화하였다. 평양에 민족사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이를 정치권력이 전유한 것이다. 2013 교육강령의 정통국가는 평양에 부여한 민족사의 정통성을 일원적인 한국사 체계로 확립시킨 것으로, 지금은 김정은의 정치권력과 계승을 정당화하고 있다.




일제 말기 ‘파시즘적 교육’의 개념화 문제

金  鍾  俊  - 229


1930년대 전반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된 졸업생지도와 간이학교 제도는 농촌사회 안정을 목적으로 한 것이자 사회교육, 공민교육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식민당국은 케르셴슈타이너의 공민교육론과 근로주의 교육론을 직접 인용하였는데, 그의 교육론에서 국가는 ‘정의의 실체’이자 ‘이상적인 도덕공동체’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공민관념과 국체관념을 동일시하려는 일본인 교육자들에게 활용되기 좋은 교육론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아직 공민사상과 국가사상이 완전히 동일시되지는 않았으며, 서구 공민교육의 특성들도 의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1930년대 중반 일본 본국의 공민교육에서 자유주의적 요소가 결락되면서 애초에 기형적 국민교육의 형태였던 식민지 조선의 공민교육과 함께 ‘국민교육’으로 결합될 수 있었다. 

즉,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전반, 일본 본국과 식민지 조선에서 일정한 시차를 두고 실시된 국민학교 제도와 국민과 교과는 파시즘 체제를 수립해가던 일본의 교육 방침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때 식민당국은 조선인들도 ‘국민’으로 포섭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내선공학’이 실현되면서 ‘국민이 평등하게 받아야할 교육’ 제도가 수립되었다고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남아있는 민족적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원주의적 평등관’을 넘어 ‘일체관’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일본 본국과 식민지 조선에서 시기별, 지역별 간격을 둔 채 자유주의 교육의 대립항으로서 국가주의 교육이 절대화되고 있었다. 여기서 국가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무조건적 희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파시즘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 체제로의 회귀가 아니라 근대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었고, 동시에 혈연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해방 이후 ‘근대적, 개방적 민족주의’ 교육이라는 인식틀로 계승될 수 있는 논리 구조를 내포한 것이었다.


 

書 評


김민정·이미미·백은진·김성자, 『역사교육 첫걸음』, 책과함께, 2022

역사교육 이론과 실행의 조화를 바라며 ‒ 역사교육 첫걸음을 읽고 ‒ 

崔  祥  勳 - 265

 


附 錄


≪역사 만들기 프로젝트(Making Histories Project)≫의 문을 열며

- 역사교육연구회와 국제학계와의 4년간의 공식적 협업, 그 첫 번째 회의 -

李  美  薇 -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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