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 文]
중학교 ‘역사’ 교육과정 및 교과서에서 ‘교육내용 적정화’ 담론의 수용과 굴절
金 成 子
1. 서언
2. ‘교육내용 적정화’ 담론의 등장
3. 중학교 ‘역사’ 교육과정에서 ‘교육내용 적정화’ 담론의 수용
4.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교육내용 적정화’
5. 결어
우리나라에서 교육과정이 교육 현장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교육과정은 총론과 교과 교육과정(각론)으로 이루어지며, 교과 교육과정에 의거하여 교과서가 개발된다. 이들은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총론은 교과 교육과정 개발에, 교과 교육과정은 교과서 개발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육과정, 교과서에 대한 연구는 이들을 서로 관련지어 파악하기보다는 이 가운데 어느 한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교과 교육과정은 총론에서 정한 방향 및 지침을 따라야 하며, 각 교과의 편제 및 시수는 총론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교육과정 총론에 대한 논의를 배제한 역사 교육과정 논의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현행 검정제 하에서 교육과정은 교과서의 단원 구성 및 내용 요소 선정에 기본적인 틀을 제공한다. 교과서 개발은 교과 교육과정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교과서가 갖는 문제점은 교과서 그 자체에서 발생한 것이기도 하지만 교육과정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 교육과정 총론, 교과 교육과정, 교과서 편찬 과정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그런데 총론, 교과 교육과정, 교과서로 이어지는 개발 작업의 순서는 각 개발 단계를 계서화시키고 각 개발 단계에서 구현되는 전문성을 위계화시키는 경향을 갖는다. 따라서 하위 개발 작업은 어떠한 형태로든 상위 작업 단계의 영향 또는 규제를 받게 되며, 교육과정 총론은 교과 교육과정을, 교과 교육과정은 교과서 개발을 구속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교육과정 개발 과정 및 이에 의거하여 편찬된 교과서를 살펴보면 상위 단계에서 의도한 바가 하위 단계에 그대로 반영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왜곡되며 때로 무시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교육과정 개발에 있어 상위 단계에서 제기된 문제가 하위 단계에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되는지를 ‘교육내용 적정화’ 담론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교육내용 적정화’ 문제는 제4차 교육과정부터 제7차 교육과정, 2007·2009 개정 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교육과정 총론 개발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었고, 지침의 형태로 교과 교육과정에 반영될 것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총론 개발 단계에서 교육내용 적정화 문제가 제기된 배경과 맥락을 살펴보고, 3장에서는 역사 교육과정 개발 단계에서 이 담론이 어떠한 형태로 수용되었는지 그 방식과 특징을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 2011 교육과정까지 중학교 ‘역사’ 교육과정을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2010 ‘역사’ 교육과정에 따라 개발된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교육내용 적정화 정도를 분석할 것이다.
논증적 역사 글쓰기가 비판적 사고력에 미치는 효과 :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의 논술교과 운영을 중심으로
金 美 先
1. 서론
2. 논증의 의미와 논증 모형
3. 논증적 글쓰기와 비판적 사고
4. 연구 설계
5. 연구 결과
6. 논의 및 결론
전통적으로 역사를 학습한다는 것은 역사가가 생산한 역사지식을 그대로 재생하는 것을 의미하였으나 최근에는 역사지식이 생성되는 조건이나 과정을 익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이것은 역사가가 역사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드러내는 역사 연구의 조건이나 생산 절차 등을 인식하는 문제를 역사학습에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러한 학습방법은 비판적 탐구력을 통해 역사 텍스트의 다양한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교수·학습의 맥락에서 볼 때, 역사 글쓰기는 언급한 역사지식이 지니고 있는 학문적 특성을 학습하는 데 적절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글쓰기는 사고하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쟁점을 다루는 역사 글쓰기는 역사적 사고력을 함양하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과거 사건이나 현상을 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증거 자료를 수집·분석하고 그 진위를 판단한 후 쟁점이 되는 과거 문제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글쓰기는 학생들에게 역사가가 과거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강선주는 역사 글쓰기 수업을 위해서는 역사문제 제기 방법, 문제제기의 타당성 설명 방법, 제기한 문제해결이나 자료설명 방법, 제기한 문제해결과 서술방법 등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역사가가 역사지식을 생산하는 절차로서의 ‘논증하기’에 해당한다. 논증이 특정 주제에 대한 주장을 근거를 통해 타당하게 밝히는 방식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역사 글쓰기는 과거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문제제기를 주장을 통해 드러내고 검증된 역사적 자료를 주장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로 활용함으로써 제기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논증’의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때 제기한 문제가 주장을 통해 분명하고 정확하게 드러났는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중요하고 적절한지, 근거로서 제시한 정보나 자료들은 객관적이고 충분한지, 근거로서 주장을 입증하는 과정은 심층적이고 논리적이며 다각적인지에 대한 반성적 사고가 개입하게 되며, 이것은 곧 논증 과정에 비판적 사고력이 작동함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논증적 역사 글쓰기를 통해 비판적 사고가 더욱 분명해지고 정교해질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으며, 논증을 기반으로 하는 역사 글쓰기가 교수·학습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영역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2009년도부터 역사교육 전공을 비롯하여 사범대학과 교육대학원 교과교육에서는 ‘교과 논리 및 논술’과목이라는글쓰기 관련 강의를 필수로 지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 과목이 신설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범대학에서 양성하고 있는 예비교사들의 중등학교 학생들에 대한 논술(=논증적 글쓰기)지도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다. 논술교육과 관련하여 공교육에서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논술지도 교사수급의 문제이다. 일선 학교현장의 논술교육이 강조되고 있는 현실 상황에서 예비교사들의 논리·논술에 대한 지식과 기술교육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과 논리 및 논술’ 과목의 신설은 중등학교 현장의 논술지도에 대해 긍정적인 변화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역사전공을 비롯하여 전공분야의 논증적 글쓰기를 통해 학생 개개인의 논리적 사고를 기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학교육의 중요한 본질 중 하나가 지적 창조능력을 높이려는 것이라면, 논증적 글쓰기를 통해 논리적 사고를 기르려는 것은 대학교육의 목적을 잘 구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논증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교육과에서의 글쓰기 방식은 학생들에게 역사 전공지식에 대한 종합적인 성찰을 요구하며 지적 능력 배양을 목표로 하는 대학교육에 가장 적합한 형식의 교육이다. 또한 역사교사가 될 사범대학 학생들 스스로 논증적 글쓰기 능력을 갖추게 되면 그 결과는 중등학교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역사 글쓰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학계의 합의가 이루어졌고, 학교현장에서도 글쓰기 교육이 시도 되고있으나, 논술교육이나 글쓰기 교육에 많은 혼선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 글쓰기에서 논증적 글쓰기 교육에 대한 연구는 전혀 시도되고 있지 않다. 또한 ‘역사교과 논리 및 논술’ 교육에 대한 효과적인 실천 방안이나 학생들의 글쓰기 능력 검증을 위한 방법적 차원의 논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하여, 연구자는 교원양성기관에서 역사교육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 스스로가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비 역사교사로서 논증적 글쓰기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논술교육 관련 교과목을 수강한 예비 역사교사들의 비판적 사고력이 논증적 역사 글쓰기를 통해 얼마나 향상되는지를 검증하는 데 있다.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다음 세 가지를 활용하였다. 첫째, 논증의 의미와 논증구조에 대해 문헌연구를 통해 탐색한 후 이를 역사 논증행위와 논증적 글쓰기에 적용해 보았다. 둘째, 예비 역사교사들이 논증적 역사 글쓰기를 통해 어떻게 논증하는지 그 과정과 구조를 분석하였다. 셋째, 예비 역사교사들의 논증 글쓰기에 나타난 비판적 사고력 정도를 분석하였다.
高麗時代 佛事 담당 ‘都監’의 조직과 특징
朴 胤 珍
1. 머리말
2. 佛事 담당 都監의 사례와 유형
3. 佛事 담당 都監의 조직과 특징
4. 지방의 독자적인 都監의 조직과 특징
5. 맺음말
본 논문은 고려시대에 佛事를 담당하기 위한 관서로 여러 명칭의 都監이 설치된 사실과 그 조직의 특징을 분석하여 고려시대가 불교적 성격을 다분히 가지고 있음을 재확인하였다. 본 논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에 중앙 관서로 설치된 도감은 해당 사원의 건물, 불상을 만들기 위한 불사이거나 대장경과 교장의 판각, 불교 서적의 간행을 위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해당 사원의 경제적 지원이나 관리를 담당하였다. 또한 왕사․국사의 책봉이나 장례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도감은 현종대부터 고려 말까지 다양한 형태로 설치되었다. 불사를 위해 조직된 도감은 일반적인 다른 도감과 같이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과 함께 그 일의 사안에 따라 수상인 侍中부터 3품 이상의 고위 관료가 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또한 불사가 진행되는 사원이나 불교계의 협조를 받기 위해 僧官이 함께 임명되었다. 高麗史와 같은 관찬 사서에는 관료에 한정된 기록만 남겨져 있지만, 금석문같은 당대 자료에서는 승관을 기록하고 있어 대부분의 불사 관련 도감에는 승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와 더불어 도감이라는 명칭이 없다고 해도 불사를 수행하기 위해 관원이 임명되고, 繕理官이나 ‘有司’같은 관청이 있었고 승관도 활동했다. 이는 앞서 도감의 조직이나 특징과 유사하므로 불사 수행 기구의 전형적인 형태로 도감을 상정하고 그와 비교 검토할 수 있었다. 또한 신라에서 불사를 담당한 대표적 기구인 成典도 해당 불사의 위상에 따라 고위 관료가 책임자로 임명되고, 관료와 함께 승관이 하대에 성전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었던 점은 고려시대의 도감과 거의 같았다. 또한 지방의 개별적인 불사에서도 都監이라는 조직이 운영되었다. 중앙의 지원없이 이루어지는 불사임에도 불구하고 중앙 관서인 都監의 명칭을 사용한 것은 그것이 ‘해당 사무의 총괄 관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중앙의 관서와 동일한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일으킨 불사의 위상을 높이려 한 것이었다. 이러한 지방의 都監은 중앙 관청과 달리 불사 전체를 통할하기보다는 글자를 새기는 것과 같이 특정한 임무를 담당한 역할을 지칭하였다. 그리고 중앙의 불사에 ‘專知’라는 직함이 있었던 것과 유사하게 지방 불사에는 ‘次知’가 있어 역시 중앙의 조직을 모방하고 있었다.
한말 ‘민권’ 용례와 분기 양상
金 鍾 俊
1. 머리말
2. ‘민권’의 전통 유학적 해석과 ‘公私’ 구분
3. 일진회, 대한협회의 ‘관권 저항형 민권론’
4. 대한매일신보의 ‘국권 종속형 민권론’
5. 맺음말
한말 ‘민권’ 개념과 ‘민권론’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크게 보면 ‘근대국민국가’의 건설을 당대 지식인들의 과제로 설정해 놓고, 첫째, 민권론이 그러한 과제에 충실했다고 보는 초기 연구, 둘째, 부르주아적 한계를 갖는다는 수정주의적 연구, 셋째, ‘근대성’ 재검토를 목표로 한 개념사, 담론사 연구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연구는 관점의 차이가 있는 만큼, ‘민권론’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밝히고자 하는 주제 의식도 동일하지 않다. 본 논문은 기본적으로 초기 연구가 한계를 갖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학계 내에서는 상당히 극복되었지만 이 시기 시대상을 바라보는 일반적 시선에는 아직도 문제가 있다. 이러한 괴리가 생기는 이유는 두 번째 단계 이후의 연구들 역시 친일 단체의 민권론에 대해서는 언급을 최소화하는 등 이 시기 역사상을 총체적으로 복원하는 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여전히 총체적 역사상의 복원을 통해 상식적 수준에서의 민권론 이해를 교정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이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1907년을 전후하여 국수론이 민권론을 대체해 간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러면 남는 문제는 국수론 안에서 민권의 의미는 무엇인지와 반대로 1907년 이전 민권론에서 국권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이 될 것이다. 그런데 기존 연구들은 몇몇 언론이나 논자들을 중심으로 단편적이며, 추상적인 분석을 행하는 데 집중해 왔다. 즉 1896년부터 1910년까지 전 시기를 통틀어 다양한 언론의 민권 용례에 대한 기초적인 분석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흐름 속에서 경향성을 파악해 내는 작업조차 온전하게 수행되지 못했던 것이다. 본 논문은 민권 용례에서 전통과 근대의 문제, 공사의 문제 등을 포착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분기의 양상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을 1차적인 목적으로 한다. 그렇게 해서 도출된 것이 ‘관권 저항형 민권론’과 ‘국권 종속형 민권론’이라는 두 가지 흐름이다. 1896년부터 1910년까지 주요 신문, 학회지 등의 ‘민권’ 용례를 검토하면 강조점이 다른 두 가지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관권 저항형 민권론’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권 종속형 민권론’이다. 전자는 일진회,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 정치·사회단체와 독립신문(이하 표시 생략),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언론에서 주창했고, 후자는 친목회회보,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로 표기)에서 확인된다. 양 세력 중 일진회, 대한협회와 신보의 주장이 가장 극단적이며, 그래서 가장 선명하게 대비된다. 그렇기 때문에 두 세력의 주장을 중심으로 해서 양자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위 두 흐름의 존재를 증명하고,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기존 연구들에 비해 완전히 혁신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차별성을 갖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단지 개념 정립의 과정을 추론하거나 거시적인 틀 아래 고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대인들이 민권에 대해 발언함으로써 의도했던 바가 무엇인지, 또한 그 실제 효과는 무엇이었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민권 개념은 대단히 유동적이고, 자의적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한말 민권 인식을 온전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는, 논의 자체가 다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당대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세계관과 정치적 목적 아래 민권 개념을 전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동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후대의 연구자들 역시 그러한 민권론을 또 다른 방식으로 전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민권’이 당대인들과 후대 연구자들에 의해 다층적으로 개념화되었다는 점에 유의하고자 한다. 민권론이 근대국민국가 건설 과제에 충실했으며, 그러한 차원에서 국권론과도 조화를 이루었다는 초기 연구로는 유영렬, 김숙자, 김효전, 최기영을 들 수 있다. 유영렬은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사상을, 전통적 민본사상이 자주국권사상과 결합 심화되어 정립된 것으로 규정한다. 김숙자는 여러 언론의 민권 논설을 열거하면서, 대한제국 말기의 민권의식은 투철한 항일의식을 기저로 하고 있었다며, ‘항일민권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말 민권론을 보면 명백하게 존재했던 국권론과의 긴장·갈등 관계를 전혀 인지할 수 없게 된다. 김효전, 최기영의 경우, 주로 실증적 차원에서 민권론을 다루고 있지만, 내부적 민권투쟁이 외부적 국권회복 투쟁으로 변화하는 것을 역사적 과제로 파악하거나 입헌군주제에 대한 관심을 국권 회복 방안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초기 연구로 분류할 수 있다. 다음으로 위의 연구 경향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수정주의적 연구를 살펴보자. 여기에는 김도형, 정숭교, 김소영과 일군의 정치학자들을 들 수 있다. 김도형은 민권론이 사회진화론, 국가유기체론, 유교적 명분론과 결합하여 애국지상주의나 국가주의로 전락하였다고 비판적으로 이해하였다. 정숭교는 민권운동과 국권회복운동에는 서로 이질적이며 적대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정숭교의 연구는 한말 민권론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초기 연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출발했다는 점에서 본 논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민권론자들의 출신 배경, 정치적 입장 등에 치중하여, 언론에 등장하는 민권 용례를 직접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김소영도 필자와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한말 민권 논의를 폭넓게 다루었으나, 새로운 입론을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군의 정치학자들은 초기 민권사상가로 박영효와 유길준을 주목하였는데 이들에게 민권은 국권 함양을 위한 정치적 동원의 성격을 띤 것이었고, 전통 유교사상이나 군주권과도 배타적이지 않았다. 또한 인민의 정치참여는 제한되었는데 이는 ‘한계’라기보다는 본질적인 문제였으며 독립협회 단계에도 마찬가지였다. 개념사, 담론사 연구로는 이화연대 한국문화연구원에서 출간한 연작물 3권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본고와 관련하여 ‘개인’ 개념을 다룬 박주원, ‘국민’ 개념을 다룬 김동택의 연구가 주목된다. 박주원은 독립신문에서 개인의 권리와 민권이 매우 배타적인 성격을 띠었고, 신보에서도 개인의 권리와 민권이 별도의 차원에서 파악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김동택은 계몽기 지식인들이 국민국가건설을 의도했다고 할 수 없다면서 기존 연구자들의 구도 설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개념사, 담론사적 접근법에서는 또한 번역의 문제를 중시했고, 자연스럽게 일본의 자유민권론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애초 일본의 개화지식인들에게 ‘권’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개념이었다는 점이다. right의 번역어로서 ‘權’은 권리, 권력의 이중적 의미를 가졌고 민이 ‘권’을 갖는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또한 민권은 서구에서와 달리 집합개념으로서 등장했다. 일본에서의 민권과 국권의 관계에 대해서도 ‘민권신장을 국권의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거나 ‘민권=국권’형 내셔널리즘의 틀 속에 있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본의 자유민권론, 번역과정 상의 문제에 대한 견해들을 한말 ‘민권론’ 연구에도 적극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민권’ 용례에 있어서도 이같은 번역의 문제가 중요하다. 이는 최근 부각되고 있는 동아시아적 관점에서의 접근과도 관련된다. 그러나 일단 논의가 방만해질 우려가 있어 번역의 문제는 깊게 다루지 않고 언론 용례에 집중하였다. 또한 언론의 논조가 시기별, 집필자별로 다양할 수 있다는 점과 특정 정치·사회단체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있는가 등의 부분에서 이 글의 유형화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이는 필자 또한 염려하는 바이다. 즉 과도한 일반화의 가능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풍부한 사례 도출에 방점을 두고 최소한의 유형화만 시도하였음을 밝혀둔다.
해방 후 재일본조선인연맹의 민족교육과 정체성
-『조선역사교재초안』과 『어린이 국사』를 통해 -
金 仁 德
1. 서론
2. 재일본조선인연맹의 민족교육 정책
3. 재일본조선인연맹의 민족교육의 양상
4. 재일본조선인연맹의 한국사 서술
5. 결론
1945년 재일조선인은 해방과 함께 민족교육을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역사교육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재일조선인의 역사교육에 대해서는 민족교육에 대해 주목하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현재 일본에서의 민족학교라고 불릴 수 있는 학교에는 크게 총련의통제를 받는 조선학교와 한국계 학교로 나눌 수 있다. 2010년 8월 현재 조선학교는 총 99개교로 초급학교는 55개교, 중급학교 33개교, 고급학교 10개교, 대학교 1개교였다. 그리고 한국계 학교는 총 5개교로 백두학원(건국학교 유·소·중·고등학교), 금강학원(유·소·중·고등학교), 교토국제학원(국제중학교·고등학교), 도쿄한국학교(초등부·중고등부), 코리아국제학원(중등부·고등부)이 운영되고 있다. 이 민족학교 중에서 한국계 학교는 대부분 일본의 학교 교육법 제1조에서 규정한 ‘1조학교’로서 일본의 문부과학성에서 인정하는 검정 교과서를 사용한다. 교과과정에서 이들 학교와 일본의 다른 학교 사이의 차이점은 한국계 학교에서는 ‘국어(한국어)’와 ‘국사(한국사)’ 수업 시간이 들어 있는 점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의 중심에는 재일본조선인연맹이있었다. 조련은 초기부터 교재 편찬에 적극적이었는데, 1948년 10월까지 편찬, 출판한 각종 교재는 93종, 120만여 부이고 그밖에도 24종, 30만부가 제작 보급되었다. 실제로 확인 가능한 교재를 보면 제1기(1945년 10월~1946년 2월)는 7종, 제2기(1946년 2월~1947년 1월)는 21종, 제3기(1947년 1월~1947년 10월)는 28종, 제4기(1947년 11월~1949년 9월)는 35종이었다. 여기에서는 한국사 관련 도서로 『조선역사교재초안』(상)(중)(하), 『어린이 국사』(상)(하), 『조선역사』, 『조선사입문』(상)이 확인된다. 본고는 초기 재일조선인 민족교육에서 조련이 정체성과 관련하여 한국사를 어떻게 서술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조련의 초기 민족교육의 실체를 선행 연구를 통해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조련이 간행한 공식적인 역사교재 중 『조선역사교재초안』(상)(중)(하)와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간행한 『어린이 국사』(상)(하)(초등교재편찬위원회 編, 조련문화부판, 1946)를 검토할 것이다. 이를 통해 교과서를 통한 재일조선인 역사교육의 모습을 밝혀 한국사 교육에서 주목하지 않고 있는 재외 한인 역사교육에 기여하고자 한다.
체제전환기에 나타난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독립세대의 정체성 문제와 대응방안 고찰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 확립을 위한 교육정책을 중심으로 -
成 東 基
1. 문제제기
2. 고려인 독립세대의 국가정체성 분석
3. 고려인 독립세대를 위한 민족정체성 교육의 방안
4. 결론
1991년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면서 해당국의 고려인 사회는 체제전환이라는 당면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소비에트체제에 익숙해져 있던 고려인이 완전히 새로운 체제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1937년 강제이주보다 더 큰 충격으로 인식하였다. 이주 1세대 고려인은 소비에트체제하에서 한민족 특유의 인내력과 근면함으로 중앙아시아라는 낯선 곳에서 고려인 사회가 안정되게 정착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러시아어를 익히고 소비에트교육을 철저히 받아 소비에트시민이 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들의 후손들은 소비에트체제하에서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고 점차적으로 고려인은 거주국에서 우수한 소수민족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체제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소비에트체제에 익숙해져 있던 고려인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공식어가 우즈베크어로 명문화되었으며,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인식하였던 우즈베크인이 1등 시민으로 탈바꿈하는 사회를 맞아야만 했다. 우즈베크인 중심의 민족주의 정책으로 인해 고려인 사회는 차별을 경험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거주국이 발전하지 못하면서 고려인 사회의 가정경제마저도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인 사회의 일부는 연해주로 재이주를 하였으며 일부는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이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사회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기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희망은 남아있다. 그것은 고려인 독립세대가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비에트체제를 모른 채 자본주의체제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영어, 컴퓨터, 인터넷 등에 익숙한 전혀 다른 세대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거주국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점으로 인해 국가정체성에 갈등을 겪고 있으며,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민족정체성에도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이들은 체제전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려인 사회를 재도약시켜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거주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들의 성공은 보장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한국 정부와 NGO는 기존에 한국어교육 중심의 단편적인 교육정책에서 벗어나 다면적인 정책을 세워야만 한다. 이들에게 국가정체성을 확립시키기 위해서는 거주국이 자신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준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며, 자신이 거주국에서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교육적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 정부와 한국 기업들이 충분히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여력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들이 필요로 하는 요구를 수용하여 적절하게 정책을 수립한다면 고려인 사회의 미래는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여겨진다. 고려인 독립세대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과 한국이 실크로드를 통해 끊임없이 역사를 만들어왔고, 특히 고려인이 거주국에서 정착하는데 우즈베크인의 도움이 많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들은 지금까지 양국의 교류사를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한국교육원에서는 한국사만을 교육시킬 것이 아니라 양국의 교류사를 교육하는 과정을 만들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관련 교과서도 준비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고려인 독립세대가 지금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고려인 사회를 책임질 수 있는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현실적인 정책과 더불어 역사교육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織田정권의 ‘武家神格化’와 天皇
朴 秀 哲
1. 머리말
2 ‘武家神格化’와 ‘御威光’의 의미
3 織田정권의 천황 인식과 祭祀權
4. 맺음말
오다 정권에 관한 선행 연구는 근세권력인가, 중세권력인가, 그 성격을 규명하는데 주된 관심을 두어왔다. 통설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천황(조정)을 제압하고 사사(寺社)세력을 공격한 사례를 거론하면서 오다 정권은 전통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근세)를 지향한 혁신 권력이라고 이해한다. 나아가 노부나가는 궁극적으로 천황 권위를 ‘초월’하여 지상의 절대자로 군림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쇼군(將軍)권력이 창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다 정권의 경제 정책, 특히 장원 정책을 살펴보면, 노부나가는 천황·사사 세력을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을 보호·온존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오다 정권은 전국 다이묘와 같은 중세권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도 제시되었다. 이처럼 중세권력인가, 근세권력인가라는 오다 정권의 성격 규명에 치중된 연구는 1970년대까지 주류를 이루었는데, 199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관점의 오다 정권 연구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하극상을 통해 성장한 전국 다이묘는 영국(領國)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천황 등 전통적 권위가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쇠미한 상태에 놓여 있던 천황 권위가 다시 부상했다는 전국시대 천황권위부상설이 주목된다. 종래 무사 세력의 통제 아래 놓인 무기력하고 약체화된 이미지의 천황·조정은 이제 분열된 무사 세력을 중재하고 제어할 수 있는 중요 역할자로 부각되고 재해석되었다. 나아가 전국시대 오기마치(正親町) 천황을 노회한 정치가로 평가하고 무가 세력의 수장 오다 노부나가의 지향을 사실상 좌절시킨 인물로까지 묘사한 연구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전국시대 천황 연구는 당시 조정정치의 실상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며 이 시기 천황의 실체를 지나치게 과도하게 평가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또 기존 선행 연구가 무사와 천황(조정) 사이를 지나치게 대립 구조로 파악한다고 비판하고 양자의 협조 관계에 주목한 연구도 나타났다. 호리 신(堀新)은 ‘공무결합왕권(公武結合王權)’이란 개념을 제시하면서 노부나가와 천황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제압하기 위해 대립했던 존재가 아니라 서로 협조하고 상호결합한 ‘운명공동체’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오다 정권과 천황(조정)의 관계를 대립인가, 협조인가의 구조로 선행 연구를 파악하는 연구시각은 오다 정권을 근세권력인가, 중세권력인가로 파악했던 1970년대의 연구 관점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대립·협조와 중세·근세 중 어느 쪽이 본질인가라고 하여 어느 한 측면(요소)만을 강조하는 연구 관점은 이분론적 시각에 입각한 것으로 향후 극복되어야 할 관점이다. 오다 정권 내에는 중세와 근세, 대립과 협조라는 일견 상반되게 보이는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존재한다. 중요한 점은 각각의 두 요소(측면)가 어떻게 상호 작용(작동)하고 있으며, 오다 정권의 추이와 관련하여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하는 점이 휠씬 중요하다. 이 중 어느 한 측면만이 강조되고 결과적으로 다른 한 측면이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을 규명하고자 한다. 첫째, 필자는 오다 정권이 어떤 불변의 입장(대립 또는 협조)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며 시기별로 편차가 있다는 입장이다. 초기 오다 정권 성립기와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권 후기의 천황 대응에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고 이해한다. 이처럼 오다 정권의 시기적 차이점에 주목한 선행 연구로는 노부나가가 1580년 이후 ‘스스로 신격화’를 통해 천황 권위를 초월했다고 하는 아사오 나오히로(朝尾直弘)설이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아사오 설과 달리 오다 노부나가가 스스로 신격화를 통해 천황 등 전통적 권위를 초월(극복)하거나 배제하지 않았다고 이해한다. 노부나가가 ‘무위(武威)’의 강화를 통해 권력의 집중을 이루어 나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다 정권이 천황 권위를 제거하거나 배제하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은 아니었다. 무가(오다정권)가 신격화를 추구했다고 해서 이것을 곧 천황 권위의 부정과 연결시켜 파악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내용의 오다 노부나가 신격화를, 필자는 ‘무가신격화’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자 하다. 둘째, 대립·협조라는 두 측면이 오다 정권과 천황의 관계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노부나가가 천황 권력을 압박하면서도(‘대립’) 마지막까지 이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협조’) 이유를 규명한다. 이 점은 달리 말하면 오다 정권 아래에서 천황이 왜 존속했는가의 문제이다. 필자는 그 핵심 요소를 천황이 가진 제사권 등 신불적 요소로 파악하고 민중을 통치하기 위해 오다 정권이 이러한 천황의 권위를 활용한 사례와 의미를 고찰한다.
[書 評]
유용태·박진우·박태균 著,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창비, 2010(제1권), 2011(제2권)
李 丙 仁
[彙 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