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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46輯 (2018. 6. 30.)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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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논문

 

○ 역사 교사, 교재, 그리고 역사수업 : 역사 교수학습 향상을 위한 교사와 교재의 관계에 대한 성찰 (이미미) 

 

본 연구는 역사 교과서 관련 연구가 왜 교과서 내용 분석에 치중하고 있는지의 연유를 교재를 바라보는 이론적 관점 측면에서 분석하고,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에 기초하여 새로운 교재관을 정립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전통적인 교과서 내용 분석 연구를 뒷받침하고 있는 “교재→교사” 교재관이 아닌, “교사↔교재” 관계 속에서 교재 개발과 연구를 수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볼 때, 어떤 교사가 가르치건 상관없이 동일한 내용 또는 훌륭한 역사 수업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 교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사 요인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내용과 체제의 교재인지에 상관없이 훌륭한 역사 수업을 설계하고 수행하도록 교사를 교육·양성하는 방법 또한 알려진 바 없다. 본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새로운 교재관에 입각한 사례 연구를 제시하고, 연구 분석 결과에 기초하여 교사가 역사 수업을 향상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역사 교재 개발과 연구가 나아갈 방향을 제언하였다.

 

 

논문

 

○ 역사 텍스트 독해에서 맥락화 교수학습의 문제 (양호환, 천세빈)

 

이 글에서는 그동안 역사교육에서 맥락화의 논의가 간과하여 온 부분을 검토하여 학교 역사 과목에서 맥락화 교수학습의 가능성과 한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보려 한다. 학생들의 역사 텍스트 독해와 관련하여 맥락화의 과제에 좀 더 면밀하게 접근하려면 맥락화 자체의 문제 및 교수학습 상황의 특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역사 텍스트 해석의 방법으로서 맥락화는 무엇인지, 이를 통해 무엇을 하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 봄으로써 역사 교실에서 수행되는 맥락화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또한 학생들에게 읽기 전략을 가르치는 일이 교사의 시범과 같은 명시적인 교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역사 영역에 고유한 문해력에 관한 선행 연구를 토대로 역사 교실에서 역사 텍스트의 맥락적 읽기를 다룰 수 있게 하는 교수 방안을 제안한다.

 

 

○ 역사 교육과정 개발 방법: 역사교육 개선의 방향 설정과 역사교육 연구 성과 활용 방안을 중심으로 (강선주)

 

국가 교육과정에서 교과 교육과정은 총론에서 제시하는 개정의 필요성과 비전, 바탕이 되는 교육과정 및 학습 이론, 그리고 교육과정 문서 체제의 통제를 받는다. 그러므로 총론의 문제의식, 비전, 그리고 여러 교과의 특성을 함께 고려한 문서 체제 및 교육과정 이론 적용 방안 등에 대해 총론에서 전달받는 식이 아니라 쌍방향적 소통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교과에서는 총론이 제시하는 개정 방향과 이론에 대해 토론하면서 교과의 개정 방향에 대해 숙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논의와 숙의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첫 번째 논의는 역사과 교육과정 개발과정에서는 총론의 교육과정 이론이나 학습 이론을 역사과는 어떻게 해석하고 변형, 적용, 혹은 교과 특수 이론을 강조하면서 변형이나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를 위해서는 종래 교육과정과 관련된 역사교육계의 이론적 연구와 경험적 연구를 검토하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기초연구 과정에서 이러한 논의와 숙의 절차를 생략하지 않고 오히려 철저히 밟을 필요가 있다.

교육과정 개정의 의미 중 하나는 교육 ‘개선’이다. 역사과 교육과정의 개선의 방향을 설정하고 개정의 기본 원칙을 제안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교육과정 이론, 사회 변화와 국가 정책, 역사학계의 역사의식, 역사인식, 주요 연구 질문의 변화, 역사교육 이론, 학생의 역사의식, 역사인식, 선지식 등에 대한 연구 검토, 역사과 수업의 문제에 대한 현장 조사 및 수업 사례 연구에 대한 비판적 분석 등이 필요하다.

 

 

○ 제1차 교육과정기 발행 『중등국사』(역사교육연구회 엮음) 교과서의 특성과 의의 (류승렬)

 

제1차 교육과정에 따라 역사교육연구회가 편찬한 중등국사 교과서는 ‘역사로서’와 ‘역사로써’의 관계맺기 식으로 제기된 역사교육의 방향 설정 및 역사 교과서 구성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를 준다. 역사교육적 특성을 분명히 한 이 교과서는 출판사가 집필 분담을 정하고 역사교육계의 발전을 위한 집필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합숙 독회 등을 거쳐 발행되었다.

이 책은 역사교육적 방향성을 분명히 하고 그에 적합하도록 교과서의 형식과 내용을 구체화하려는 첫 작업이었다. 당대에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역사 교과서의 귀감이 될 만한 다양한 시도들은 큰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훌륭한 시도는 이후 제대로 계승되어 발전하지 못했다.

이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시도된 교육과정의 탄력적 적용, 통상적인 설문식을 탈피한 알아두기 형식의 핵심 개념 제시, 학습 활동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식의 도입 등은 모두 ‘역사적 사고력’이라는 역사교육의 본질적 목표 달성을 위한 구체적 형식이었다. 당시 전개된 역사교육의 새로운 전개를 위한 다양한 모색과 실천 활동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 힘을 잃었고, 역사 교과서 내용의 획일화와 교육 통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 支配層 編制에 나타난 新羅의 國家形成 構圖 (서의식)

 

 

신라의 骨品制와 官等制는 모두 피정복 지배층을 그 세력의 크기에 따라 등급을 두어 편제한 형태가 아니라,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지배체제 확립의 필요에서 설정된 사회신분제도고 정치제도였다. 骨品制는 신라의 지배층을 骨層과 頭品層으로 나눠 이원화하고, 骨層에게는 對等性을, 頭品層에게는 그 능력과 공로에 상응하는 대우를 각기 보장한 제도였고, 官等制는 國政을 관리하고 실무에 참여하는 지배층 인사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한 제도였다. 그러므로 官等制는 骨品制와의 긴밀한 상관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그 운영의 초점이 지배기구에서 頭品層이 차지할 수 있는 정치적 지위의 上限을 정하고, 취득한 관위에 따라 대우를 달리하는 데 놓였다. 重位의 규정이 그 핵심이다.

신라의 지배신분층이 骨層과 頭品層으로 이원화되어 있었고 그 내부에서 따로 신분이 나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신라가 국가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신라에 편입된 소국의 지배층이 각각의 처지나 세력 규모에 따라 차등 대우를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정복을 통해 형성된 국가가 아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골품제는 진한의 여러 小國들이 대등한 처지에서 연맹하여 신라를 건국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성립하기 어려운 신분 질서라 하겠기 때문이다.

 

 

○ 신라 하대 唐 국자감의 신라 유학생 증가 배경과 유학의 경제적 여건 (이제혁, 박현숙)

 

신라는 唐과의 외교와 선진문물 수용을 목적으로 中代부터 당의 국자감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따라서 신라 왕실은 唐 국자감으로의 유학을 장려하였고, 특히 원성왕 788년에 시행된 독서삼품과는 渡唐留學을 장려하는 적극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唐에서는 안사의 난(755~783년) 이후 국자감 건물이 허물어지고 재정이 피폐해지면서, 당 국자감은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821년에는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빈공과를 실시하였다. 빈공과의 실시는 도당유학생 증가에 기여하였으며, 특히 6두품 학생들이 당 국자감 유학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당에서 821년부터 국자감 활성화를 위해 외국인 유학생을 본격적으로 유치하면서, 많은 수의 신라 학생들이 당 국자감으로 유학하게 되었다.

신라 下代에 당 국자감으로 유학 간 신라 학생들의 경제적 여건은 열악하였다. 비록 신라와 당 조정이 국비로 유학을 보조해 주었지만, 안사의 난 이후 당과 신라에서의 경제적 지원이 부족함에 따라 신라 학생들은 유학 비용의 일부를 사비로 감당하여야 했다. 유학 비용은 일본의 ????延喜式????을 통해 추론해 보았다. 이와 같이 신라 하대에는 당 국자감의 외국인 학생 유치 정책과 신라의 도당유학 장려책, 그리고 신라 유학생들의 入仕 욕구가 배경이 되어 당 국자감으로의 유학이 증가하였던 것이다.

 

 

○ 16世紀 對中貿易의 盛況과 國內商業 (박평식)

 

본고는 16세기 조선의 對中貿易에서 나타나고 있던 盛況의 양상을 15세기 후반 이래 전개되고 있던 朝鮮 商業界의 내적 변화에 유의하면서, 새롭게 그 주체성과 역동성의 측면에서 재음미하여 보고자 한다. 특히 16세기 대중무역을 비롯한 대외무역의 발달이 국내 상업과 맺고 있던 연관에 주목하고, 또 이 시기 중국과 일본을 연계하는 中繼貿易에서 나타나던 조선 상인의 역할과 위상을 규명함으로써, 국내외 교역을 망라하는 조선전기 商業史에 대한 전면적인 再構成 시도의 한 軸으로 삼고자 한다.

 

 

○ 1930년대 일제의 향토교육론과 향토교육 시책 (문지은)

 

일제는 ‘동화’를 명분으로 한국을 강점하고 교육을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그 가운데 1920년대 말 세계 대공황과 사회주의 전파를 계기로 일제는 농촌경제진흥을 목적으로 향토교육론을 제기하였다. 이는 1930년대 각 도 교육회를 통해 향토조사, 향토지 편찬, 향토관 설립 등의 향토교육 시책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대체로 근로 의식을 강화하고 향토에 대한 애향심을 고취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1935년 이후 일제가 군국주의 경향을 강화해가면서 향토교육은 ‘일본정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무조건적인 애국심과 천황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고 교육 내용은 관념적이고 이데올로기적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1930년대 말 황민화 교육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동안 일제 시기 향토교육은 본격적인 연구가 없는 형편이었다. 최근 1950, 60년대 향토학교 운동을 분석하는 연구들이 있으나 미군정기 이래 미국에서 유입된 지역사회학교의 영향 하에서만 분석하는데 그치고 있다. 필자는 1950, 60년대 향토학교 운동이 일제 강점기 향토교육 시책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글은 1930년대 향토교육론과 일제의 향토교육 시책을 통해 일제 교육의 특질과 그 변화 양상을 밝히려고 하였다.

 

 

○ 19세기 전반기 明 遺民의 정체성과 구별짓기: 濟南 王氏 王德一, 德九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승현)

 

조선의 병자호란 패배로 심양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鳳林大君이 1645년 귀국했을 때 대군을 따라 함께 조선으로 들어온 이들 가운데에는 명나라 유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효종의 잠저가 위치했던 서울 於義洞 漢人村 (훗날 皇朝人村)에 정착하여 효종의 北伐大計를 은밀히 도왔으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결국 조선에서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고 훗날 九義士로 통칭되었다. 본고에서는 구의사 후손 가운데 제남 왕씨 가문의 王德一, 德九가 남긴 문집을 활용하여 19세기 전반기 명 유민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조선 사회에서 무엇을 지향했는지를 그들의 담론을 통해 분석해 보려하였다. 명 유민들은 ‘혈통적 중화’임은 분명하였지만 당시 중화 문화의 계승자로 자처하던 조선 사회 내에서 그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자신들을 진정한 중화 문화 계승자로 위치지우는 ‘문화적 중화’ 정체성 형성 작업이 필요했다. 본고에서는 특히 명 유민의 조선 문화 인식을 검토하여 그들의 ‘혈통적 중화’ 인식이란 결국 ‘문화적 중화’라는 자아 인식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음을 밝히려 하였다.

명 유민들은 청에 대한 복수설치의 난망함에 실망하고 당시 명 유민이 직면했던 곤궁과 조선 사회의 냉담함에 좌절하였지만, 청의 궁극적 종말을 확신하였고 그 때가 되어 평가받을 중화문화 보존자로서의 자식들의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명 유민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친족조직의 강화, 명 유민과의 통혼, 가문 역사의 정리, 명 태조 및 구의사에 대한 제사활동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조선의 의례와 풍습에 대한 비판을 통해 스스로를 조선 사대부들과 구별짓고 자신들이 명 황제 신하의 후손들로서 명 문화의 진정한 구현자이자 수호자임을 부각시켰다. 보다 구체적으로, 왕덕구는 사대부 가문 제사에서 사용하는 拜禮 및 과일에 대해 명태조의 時王之制에 따른 禮制의 수립을 주장하며 때로 時王之制보다『朱子家禮』를 우선시하는 조선의 관행을 문제시하였다. 명 황제 신하의 후손들이자 명나라 문화의 진정한 계승자를 자처하는 그들이었기에 時王之制의 철저한 준수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그는 時祭보다 墓祭를 중시하는 조선의 풍습, 조선의 부녀자에 대한 호칭, 족두리를 포함한 부녀자의 머리 장식 역시 中華의 禮制를 벗어나는 것으로 비판하였고, 이와 달리 자신의 가문에서는 중화의 법도에 부합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영력 연호의 사용 역시 그들을 조선의 지식인들과 구별지우는 중요한 특징이었다. 그들은 숭정 연호가 아닌 영력 연호의 사용이 춘추대의에 가장 부합하는 기원 방식이라 주장하였다. 명 유민들은 1667년 제주에 표착한 중국 복건 출신 漢人 임인관 등이 가져온 영력 21년 대통력의 진위를 의심하기보다는 남명을 향한 명 유민 충성의 소산으로 긍정하였고, 이 대통력이 조선에 전래되어 보존되어 왔음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이 영력 정삭을 받들지 못했기에 그 연호 사용이 불가하다는 주장을 불식시키려 한 것이었다. 조선인과 달리 책봉-조공 관계 속에서 권력 정당성의 근원으로서 작용하는 ‘奉朔’ 여부에 구애될 필요가 없는 명나라 유민들로서는 춘추대의에 가장 부합하여 유민의 대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기원방식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서평

 

 

김태웅, 『신식 소학교의 탄생과 학생의 삶』, 서해문집, 2017. (김광규) 

강선주 엮음, 『세계는 역사를 어떻게 교육하는가: 9개국의 역사 교육과정 분석』, 한울, 2018 (백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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