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 文
학생의 다양성과 역사교육: 학생의 역사 정체성 및 역사의식,
‘다원적 역사’에 대한 해외 연구 검토 姜 鮮 珠… 1
역사교육의 변화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는 학생이 어떤 역사를 자신과 관련된 역사로 인식하며 왜 그렇게 인식하는지의 문제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고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다양한 민족적 배경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역사 정체성(historical identities) 및 그들이 생각하는 ‘중요한 역사(historical significance)’에 대해 분석한 경험적 연구들을 검토하면서 역사교육에서 학생의 다양성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본고에서는 종래 학생의 다양성을 민족, 종교, 계급 등의 범주로 구별하면서 정의했으나. 최신 연구는 학생들이 자신을 둘러싼 여러 문화와 상호작용하면서, 또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사회문제들에 대한 비판 의식에 기초하여 자신의 정체성 및 역사 정체성을 복합적으로 구축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러한 해외 연구 성과에 기초하여 본고는 역사교육에서 학생의 다양성을 학생의 인종, 민족, 종교, 젠더 등 주어진 조건에만이 아니라 그러한 조건들의 인위적인 구획을 가로질러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국정 역사교과서의 박정희 신화 만들기 池 秀 傑… 35
문재인 정부는 집권과 동시에 역사교과서 발행제도를 국·검정 혼용제에서 검정제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 현장에 배포된 교과서마저도 완전히 폐기하였다. 이로써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책동은 종식되었으나, 그렇다고해서 국정 역사 교과서에 담긴 역사인식이나 역사상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박정희 시대의 성취와 한계를 어떻게 가르쳐야할 것인가? 이런 질문과 관련한 논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해야 옳다.
이 글의 목적은 국정 역사교과서가 ‘박정희 신화’를 조작하기 위해 어떤 서사책략을 활용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1장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과 박정희 신화 만들기의 상관성을 설명한 뒤 2장에서는 박정희 신화 만들기에 활용된 다양한 서사책략과 역사조작 실태를 구명하고자 한다. 2장에서 주목하고자 한 것은 첫째, 책략적인 장절 체계나 제목, 둘째, ‘공을 앞세워 과를 가리는 조악한 功過論’과 ‘산업화(세력) ↔ 민주화(세력)’이라는 이항대립적인 서사틀, 셋째 역사 사실 자체에 대한 왜곡과 조작 사례 등이다.이 글에서 활용한 주요 자료는 역사교과서 진상조사위원회가 발행한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백서(2018년 5월)와 앞의 용역보고서, 그리고 필자가 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접한 각종 내부 문서와 국정 역사교과서의 초고자료(원고본, 재고본, 현장검토본) 및 최종본 등이다.
국정제로 회귀한 중국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분석 金 裕 利… 75
중국은 2000년대 초반 ‘多標多本’의 과정표준 및 교과서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2012년 이후 시진핑정부는 ‘교재편찬은 국가의 권한’이라고 주장하며, 2017년 국가교재위원회를 설립하여 전국의 교재업무를 총괄하도록 했다. 또 2017년 9월부터는 道德與政治, 어문, 역사 3과에서 통편교재를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一標一本’ 국정제로 회귀했다. 이처럼 국정제와 심정제가 병존하는 상황은 신중국의 건국 이래 처음이다.
중국당국이 역사 등 3과 교재를 통편화 한 것은, 통편교재가 당의 교육방침을 관철시켜 사회주의핵심가치관을 심어주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통편교재를 이데올로기 교육의 도구로 삼아, 당의 정치주장을 그대로 주입하겠다는 심산이다.통편본 『중국역사』는 ‘炎黃’의 신화를 역사처럼 서술하여 중국고대사의 기원을 소급시키고, 기존의 ‘통일다민족국가’론과 ‘중화민족’의 단결을 더욱 강조했다. 특히 ‘사회주의핵심가치관’을 함양하기 위해, 중화우수전통문화교육, 혁명전통교육, 민족단결교육, 국가주권과 해양의식교육 등을 추가했다. 중국공산당의 지도력을 강조하기 위해, ‘8년 항일’을 ‘14년 항일’로 급히 수정했는데 이는 2011년판 역사과정표준에는 없던 개념이었다. 통편본이 이처럼 당과 국가의 의지를 체현하는 ‘類似法定敎材’가 되면서, 종래 역사교재 편찬 및 심정심사의 기준이 되었던 역사과정표준과의 괴리가 나타나고 있다. 정치사상과 이념을 최우선시 하는 통편교재의 통일적인 編審체제가 기존의 역사과정표준체제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행 중등 역사 교과서의 한국 고대사 부분 서술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 - 고조선~삼국 시대를 중심으로 - 姜 鍾 薰… 113
이 글에서는 현행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고대사 부분, 특히 고조선부터 삼국 시대에 이르는 내용의 서술상의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향후 교과서 집필 때는 어떤 방향으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한지 필자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먼저 고조선의 범금 8조에 관해서는, 그동안 살인죄에 대한 즉시 사형 조항을 고조선 사회의 인명 중시 풍조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였는데, 순장 등의 풍습이 유행한 고대 사회의 특성상 해당 조항을 인명 중시와 연관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여러 나라의 성장 항목에 대해서는, 부여와 삼한을 제외하고는 이 부분에서 다루어질 내용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특히 옥저와 동예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독립된 항목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서기 3세기 전반 상황에서 국가로 존립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굳이 여러 나라의 성장 항목에서 서술할 필요가 없고, 고대 사회의 풍습이라는 별도의 항목을 설정하여 관련 내용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다. 변한의 철 생산은 본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진한의 사정을 전하면서 서술한 것인데, 후대의 일부 판본에서 자의적으로 변한 관련 서술로 갖다 붙이면서 오해가 발생한 것으로, 향후 교과서 집필 때에는 철 생산이 진한과 변한 모두에 해당하는 것으로 서술함이 마땅하다. 삼국 초기의 왕위 계승 방식에 대해서는, 그동안 고구려의 고국천왕 때와 백제의 근초고왕 때에 이전의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다고 기술해 왔지만, 이는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는 잘못된 주장임을 밝혔다. 불교 수용 이전의 토착 신앙과 관련해서는 천신 신앙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것이 고대 사회의 지배 이념으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아울러 고조선과 삼국의 건국 연대 표시 문제 등을 포함하여 몇 가지 생각해 볼 문제들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덧붙였다.
高麗時期 遷都論의 提起와 生態環境 李 炳 熙… 155
필자는 이 글에서 지금까지 고려시기 천도론을 風水圖讖說로 설명한 것에서 벗어나 생태환경의 관점에서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고려시기 천도론이 자주 제기되었는데, 地氣의 쇠약을 천도의 이유로 제시하였다. 지기의 쇠약은 災異의 발생으로 표현되었다. 재이 가운데 하늘이 아닌 지상에서 발생한 것, 그리고 개경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 천도의 원인이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개경 일대에서의 산짐승의 출현, 우물물과 연못물의 異常 현상, 궁궐 및 대형 화재의 발생이 천도와 관련된 재이였다. 이러한 재이는 매우 나쁜 조짐으로 받아들여져 개경의 거주인에게 엄청난 불안감을 느끼게 했고,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도록 했으며, 개경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 그렇기 때문에 천도의 주장에 특정 개인만이 아니라 국왕을 비롯한 많은 관인들이 동조하였다.위의 세 가지 재이는 다른 요인도 없지 않지만, 개경 일대의 임야의 축소, 산림의 훼손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임야 축소, 산림 훼손이라는 생태환경 열악화는 개경이 대도회로 발전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당시인이 제시한 천도 이유는 풍수도참설에 근거한 신비적 ? 주술적인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논리가 전혀 근거가 없는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풍수도참설은 당시 생태환경 변화를 합리적?과학적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결국 고려시기 수도인 개경을 지속가능한 도시로서 관리 운영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에 와서 都城의 운영은 한층 수준이 향상되어 생태환경을 크게 고려하게 되었다.
5·16쿠데타 이후 대학 학생운동과 정부의 대응:
농촌운동과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시위를 중심으로 吳 ? 淵… 199
1961년 5.16쿠데타 직후 학생들의 현실참여는 군사정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분야가 ‘농촌운동’이었다. 4월혁명 당시 운동과 비교했을 때 5.16쿠데타 후 농촌운동은 군사정부의 통제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농촌운동에 참여한 일부 학생들은 정부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러한 통제를 ‘전용’하여 합법적인 공간 안에서 정권에 비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군사정부는 대학생들을 농촌운동에 동원하여 그들의 현실참여 의지를 순치하려 했으나, 역설적으로 농촌운동은 ‘농촌’으로 상징되는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여, 1964~65년 한일협정반대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데 기여하였다.
‘농촌운동’이 군사정부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현실참여의 방식이었다면, 연이은 주한미군의 폭력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1962년 6월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시위’는 군사정부가 허용하는 범위를 뛰어넘어 쿠데타 이후 최초로 전개한 학생 시위였다. 군사정부는 학생 시위가 가진 파급력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래서 학원에 대한 사찰을 대폭 강화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 시위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에 기반한 ‘이념서클’을 만들어 학생운동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었다. 즉, 1962년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시위는 정권의 학원에 대한 사찰이 강화되는 계기이자, 쿠데타 이후 일시 소강상태를 보였던 학생운동이 다시 재개되어 한일협정반대운동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었다.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5.16쿠데타 이후 학생들은 4월혁명기에 고양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대중적 차원에서는 농촌운동을, 또 선도적 차원에서는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학생운동은 군사정부·박정희정부의 관리와 통제, 압박과 사찰 같은 제약조건 하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농촌운동과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시위는 각각 민족주의의 대중적 차원과 선도적 차원에서 학생들의 정치적 경험과 훈련의 場이 되었다. 또한 한미행정체결촉구시위에 앞장선 학생들은 이후 새로운 이념서클을 만들어 결집하였다. 4월혁명기의 학생운동 역량은 이를 통해 5.16쿠데타 이후에도 계속 보존·지속·확대·재생산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일협정 체결이라는 새로운 정세가 닥쳤을 때, 민족주의와 이념서클 중심으로 축적된 학생운동의 역량은 일시에 거대한 한일협정반대운동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본고의 내용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학생운동의 주체적 역량이 계승·발전하는 모습을 확인시켜줌으로써, 한국 민주화의 역사를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교육하는데 도움을 준다.
批評論文
車相瓚의 지방사정조사와 조선문화인식
- ‘朝鮮文化의 基本調査’를 중심으로 - 金 泰 雄… 227
차상찬을 비롯한 개벽사 중추 인물들의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는 일본인 자본가의 경제 침략과 조선총독부의 통치 정책에서 비롯된 민족구성원의 당면 문제를 통계와 구술 방법 등의 근대적 조사방법론을 적용하여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도출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또한 이들의 조사는 개별 지방의 내력과 과거의 전통 유산에 초점을 맞추어 민족적·민중적 정서를 보존·계승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비록 조사 과정에서 빠듯한 경비와 촉박한 일정, 자료 수집의 애로로 말미암아 조사 시기가 지연되었지만 신사회·신문화 건설의 역사적·사회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차상찬 등 개벽사 중추 인물들의 조사 작업은 지식·정보의 민주적 공유와 민족 차원의 확산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수립함과 동시에 일제가 야기한 한국 민중의 총체적 난국에 민족적 대단결을 통해 공동 대응함으로써 주권을 상실했음에도 한국인이 통치 지식의 독점자인 일제에 저항하면서 현실의 당면 과제를 스스로 타결할 수 있는 주체로 성장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하겠다. 이 가운데 통계를 활용한 지역 사정 분석은 민족주의 계열 및 사회주의 계열 식자층과 상호 영향을 미쳤을뿐더러 후일 이여성·김세용의 숫자조선연구(1931~1935)로 귀착되었다. 이러한 조사 결과 연재물 역시 일제가 자국의 이익을 펼쳤던 조선 통치의 실상과 함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차별 시책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書 評
김종수, 숙종시대의 군사체제와 훈련도감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 盧 永 九… 257
彙 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