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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72輯 (2024. 12. 31.)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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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文


역사교육에서 다양성 논의의 확장과 ‘다양성 읽기’

張로사 - 1


이 연구는 다원주의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역사학습에서 어떤 다양성을 다룰 수 있는가에 답하고자 하였다.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으로 협소하게 정의된 교육과정 내용 요소로는 다양성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이렇게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다양성을 보충하는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그럴듯한 주제나 내용으로 다양성을 식별하게 하는 구색 갖추기의 다양성(tokenism)을 제시할 뿐이다. 본 연구는 다양성을 주제 특정적인 개념으로, 혹은 좁은 범주로 식별하는 협의의 다양성으로 다루거나 제한적인 맥락에서 다루는 다양성에서 벗어나 ‘다양성의 세 가지 차원’을 제안하였다. 세 차원의 다양성은 과거 역사에 존재했거나, 존재했지만 침묵당했던 여러 주체와 관점으로 인해 드러나는 과거 행위자의 多聲性(polyphony), 하나의 사건을 보다 넓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역사서술(historical accounts)에 존재하는 다선적인 인과관계의 복잡성(complexity),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서로 다른 역사해석이 서로 대립·보완·경합 가능한 관계를 파악하는 역사해석의 경합성(contestability of historical interpretations)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연구는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세 가지 차원의 다양성이 어떻게 경합해 왔는가를 파악해 내기 위해 ‘다양성 읽기’를 제안한다. ‘다양성 읽기’란 다양성의 세 차원인 다성성과 복잡성 그리고 경합성을 달리하여, 과거에 드러난 혹은 드러나지 못한 여러 주체의 행위와 목소리의 층위를 파악하고, 과거의 서로 다른 역사서술의 다성적 인과와 다양한 원인의 비중을 판단하고, 동일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서로 경합하는 역사해석을 견주어 판단하고 평가하는 작업이다. 학생들은 다양성의 의미를 여러 차원으로 읽어 내고 체화함으로써 이를 자기 삶에서 실천으로 옮길 수 있다.


ChatGPT가 생성한 역사에 관한 텍스트와 학습자의 반응

- 거짓 정보에 대한 학생 인식을 중심으로 -

俞得順 - 67


본 연구는 인공지능 및 디지털 도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를 잘 활용하려면 해당 기술(매체)의 본질과 특성을 검토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ChatGPT가 생성하는 정보에 대한 학생의 반응을 확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우선 ChatGPT가 생성하는 역사 정보의 특징을 파악하였다. ChatGPT가 생성한 역사 정보는 파편화된 정보가 아니라 자료를 검색・가공하여 완성된 형태로 제공되는 이야기나 글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AI 환각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층위의 거짓 정보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학생들이 접하는 역사 정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ChatGPT가 생성하는 정보는 출처가 제시되지 않고, ‘작성자의 의도’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역사 정보와는 차이점을 지닌다.

다음으로 ChatGPT를 통해 역사에 관한 정보가 포함된 문서를 생성한 뒤, 이에 나타난 오류 양상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역사교육을 전공한 대학생, 일반계고 3학년 학생, IBDP를 이수한 고3 학생으로 이뤄진 세 개의 그룹을 대상으로, 이들이 ChatGPT-문서에 담긴 거짓 정보를 어떻게 인식하고 반응하는지 살펴보았다. 그 결과 지식의 구성 과정을 포함하여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 의심하고 비판하려는 문제의식과 이를 기르는 수업 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수업에서 ChatGPT를 활용하려면 ChatGPT의 불완전성과 오류 가능성에 대한 안내, 역사적 사실과 의심하고 비판하려는 태도의 결합, 생성 정보의 역사적 사실 및 지식의 구성 과정 확인, 글의 맥락과 논리 구조에 대한 점검이 필요함을 정리하였다. 덧붙여 역사 수업에서 ChatGPT를 활용할 방안을 개략적이나마 제안하였다.


1910~20년대 원산해수욕회사의 설립과 운영

崔柄澤 - 111


원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1914년 경원선 개통 직후 각지로부터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일환으로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의 신문사와 손잡고 ‘원산시찰단’을 유치했으며, 1921년에는 원산 시내 일본인 거주지 북단에 해수욕장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송도원해수욕장으로 불리게 되는 이 해수욕장의 개발은 원산 지역 일본인들이 만든 원산해수욕회사가 도맡았다. 이 회사는 송도원해수욕장 구역 내에 별장과 호텔을 짓고, 골프장도 만들어 부유한 일본인들을 유치하였다. 이 시설물들은 이용료가 무척 비쌌기 때문에 가난한 조선인이 좀처럼 이용할 수 없었다.

한편 원산해수욕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측은 관광객으로 인한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조선인이 운영하는 자동차 회사의 영업권을 취소하고, 경찰을 통해 조선인 기업가들의 접근도 막았다. 관광객 유치로 인한 이익은 고스란히 일본인들의 몫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批評論文


松月齋 李時善 선생의 學問

李範稷 - 147


이시선의 자는 子修, 호는 松月齋이다. 조선 태종의 왕자 溫寧君이 그의 7대조이다. 아버지 榮基는 임진왜란 때 죽령 남쪽으로 이사한 뒤 그곳에서 안동 권씨 權來의 딸과 혼인하고 酉谷 마을에서 이시선을 낳았다.

송월재는 종실의 후예로서 양반 사림과 교류하면서,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섭렵하며 당 시대의 시대상이 제기한 쟁점에 공감하고 그 치유에 온 힘을 다해 역사서와 문집 「荷華編」 편찬에 경주하였다.

다만 그는 많은 유자 사림과는 시각을 달리하는 역사관으로, 약 한 세기간의 평생을 유교 경전과 제자백가서·역사서를 탐독하고 전국 답사와 저술에 쏟아부은 특이한 학자였다. 호란으로 얼룩진 조선 사회와 전란의 후유증으로 정치상 자존감이 붕괴된 지식층, 농민들의 생활과 생산성 저하 회복 대책 등에 공조하면서도 비판적 자세를 견지한 학자였던 것이다.

송월재가 문집의 이름을 ‘荷華’라고 命名한 것은, 연꽃은 더러운 흙 진창 속에 뿌리를 두고서도 오염이 되지 않으며, 또한 사람이 있건 없건 그 향기를 멈추지 않으니, 이를 상징함을 취한 것이라고 하였다.

『역대사선』 편찬에서도 우리는 당 시대 사림들과는 시각을 달리하는 역사관의 일단을 보게 된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역사를 편찬하며 ‘동국’, 즉 자신들의 역사에 주력하였다. 이에 비해 송월재는 정통성 관점에서 중국 역대 왕조의 계승을 중국 태고의 삼황으로부터 명나라 崇禎에 이르기까지 명나라를 종순하고 당시의 청나라를 배제하던 당대 유자들과 인식을 같이하면서도,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에서 폭넓은 역사상을 주목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었다. 송월재는 역사란 고금의 일을 통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로 권징을 통해 자신의 덕을 키우는 데 필요한 것이라 하였다.

성호 이익은 송월재의 묘지명에서 “선생은 처음에 박사가 되어서 가업을 보살피고자 하였으나, ‘이것은 장부가 할 일이 아니다.’ 하고는 드디어 여러 곳을 답사 유람하게 되었는데 … 즐기고 싶은 욕망을 모두 멀리하고 오로지 참된 모습만으로 그 내면에 전념하여 田地의 경작은 멀리하고 독서만을 추구하였다.”라고 적었다. 이시선은 평생토록 생계에 대해서는 의젓하고 財利에 대해서는 욕심이 없었으며 오직 독서만을 생업으로 여겼으며 치세에 관한 언사들을 중요시하였다. “이는 내 스스로 힘쓰기 위함이요, 자신을 드러내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송월재의 겸손한 자세는, 거의 한 세기에 가깝게 길었으며 조선 역사 속 격변의 시기였던 그의 평생 동안 그가 항상 유지한 학문에 대한 열정과 타인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를 보인 유학자이자 조선의 선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 시대에 대해 과거제를 통해 관료제를 유지한 왕정이라는 역사상을 지니고 있다. 송월재는 비록 과거제와는 거리를 두었으나, 그런 가운데 유교 경전과 경학에 심취하고 제자백가서 및 역사서를 읽으며 사서 편찬에 전념하는 전형적인 유자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송월재의 학문 궤적을 통해, 중용과 대학에서 추구하는 정의·정심의 윤리를 통한 수기치인을 강조하는 조선 선비가 관료층 중에서만이 아니라 재야 유학자로 대변되는 학자들 가운데서도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양’ 속에 한국사를 위치짓기 -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의 논의를 중심으로 -

鄭尙雨 - 169


이 논문은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의 한국 정치사에 대한 연구를 분석하여, 소위 식민주의 역사학이라 불리는 과거 일본인 역사가들이 한국을 한·중·일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에 어떻게 위치지었는가를 고찰한 것이다. 한국사에 나타나는 정치 체제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통시적으로 접근한 이나바의 연구는 당시 다른 일본인 역사가들이 시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政體에 따라 한국사를 이른바 ‘중세’, ‘근세’와 같은 보편적 용어를 구사하며 시대구분까지 시도하였다. 그런데 이는 그의 스승인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의 ‘당송변혁론’을 한국사에 적용한 것이었다. 나이토의 구상은 귀족정치를 중세, 군주독재정치를 근세, 인민이 정치 주체가 되는 것을 근대의 정치체제로 설정하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이후 근대 정체를 달성한 반면 중국은 신해혁명을 통해 군주독재정치에서 공화주의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이러한 분석틀에 입각한 이나바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중세 사회의 특징인 가족주의에 매몰된 채 19세기까지도 귀족정치에 머물러 있었다. 이는 한국 사회를 정체된 것으로 정리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국을 동양에서 가장 후진적인 국가로 바라본 것이기도 했다. 즉 19세기 후반에 근대를 달성한 일본, 과거에는 아시아를 주도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도 근세에 머물러 있는 중국, 10세기 이래 귀족정치라는 중세에 머물러 있는 한국이라는 ‘동양’의 청사진을 그린 것이었다.



書評


김보림, 국민과의 창설과 ‘국사’교육,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3

일제의 ‘국민만들기’와 탈식민 역사교육의 과제

文知恩 - 205



附錄


≪역사 만들기 프로젝트(Making Histories Project)≫

- 2차년도 활동 보고 -

李美薇 - 211



彙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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