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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敎育 150輯 (2019. 6. 30.)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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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文

 

 

외른 뤼젠(J?rn R?sen)의 역사의식 이론 朴 美 香… 1

 

뤼젠은 역사를 서사행위를 통해 시간경험을 해석하여 만들어진 의미형성물이라고 이해했고, 역사학도 일종의 역사적 서사로 간주했다. 역사학을 역사적 서사로 이해함으로써 뤼젠은 역사학이 인간 실생활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드러냈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특히 역사가 실생활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물어야 하는 역사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관점에서 역사는 삶과 동떨어져 전문가들만이 다루는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도, 습득하고 수용해야만 하는 객관적인 지식도 아니다. 그의 관점에서 역사는 현재와 미래의 방향설정을 위해 경험을 해석하고 의사소통하면서 의미를 형성하는 주체의 구성적 작업으로 실생활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뤼젠의 역사의식 이론이 국내 역사교육계의 역사적 사고력 및 역사의식 논의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을 찾아본다면, 역사적 사고력과 역사의식은 상호 대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고는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요소, 즉 논증적인 요소와 내러티브적 요소 둘 다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뤼젠의 이론은 역사적 사고의 객관적 요소에만 치중하는 한계를 극복하여 역사적 사고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가 발행제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근대 서사 프레임의 구조와 특징 柳 承 烈… 29

 

이 글은 국가 발행제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근대 서사를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특히 제3~7차 교육과정기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성행한 ‘근세-근대 태동-근대 전개’라는 근대 서사 프레임의 설정 경위, 내용과 특징 및 그 의미에 대하여 살필 것이다. 우선 근대의 시작을 염두에 둔 근세론과 근대 태동(기)론의 출현 경위와 변천 과정을 짚어보고, 이어서 근대 전개는 ‘근대’ 용례에 대한 검토를 토대로 근대성의 배치 및 상호 연관성을 살필 것이다. 아울러 국가 발행제하 국사 교과서의 유일본이라는 위상을 보증한 서사와 표현의 방식 및 기제에 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국정’의 국가 발행제가 지속된 시기에 국사 교과서에는 근세를 시작으로 근대 태동[움직임]?근대 전개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네 단원에 걸쳐 근대가 다루어졌다. 문제는 이들의 표면 형식이나 제목과는 상관없이 구성의 체계와 논리가 제각각이었고, 전후 연결도 조직적?체계적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국사 교과서에 제시된 근대상은 연결성의 결여와 제목과 내용의 불일치로 인한 혼미가 정형화되었다. 특히 근대 단원에서 앞선 근세 또는 태동(기)를 계승하는 서술의 부재라는 단절성은 치명적 문제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근대 단원은 홀로 동떨어진 채 근대적 요소를 단순 나열하는 식의 편의적이고 미봉적인 서술만으로 채워져, 근대성은 상호 연관성과 구심력을 잃고 파편화?주변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국정 국사 교과서의 중요한 특징으로 서구 중심적 시대 구분법을 고수하고 서구적 근대화를 전형화함으로써 근대화 지상주의 관점을 고수한 점, 근세 및 근대 태동기를 독립적 시대로 설정한 점, 근대의 전개에서 이전 및 이후 시기와는 단절된 채 파편화?분산화된 사실 나열적 양상을 보인 점, 구성 방식에서 통사식 구성과 독본형 체재를 취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국가가 사실상 저자의 구실을 하는 국가 발행제하에서 절대 배타적 특권을 지니면서 독점적 지위를 누렸던 국사 교과서는 ‘국가 공식 역사’로 여겨졌고, 교사와 학생은 이를 성전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이 때문에 설익은 또는 황당한 주장이라도 일단 국사 교과서에 실린 후에는 국가 권력을 배경으로 ‘정설’로 확대 재생산되었다.‘정설’화의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역사 교과서를 생산하는 국가 발행제하에서 만들어진 ‘정설의 역사 신화’가 더 이상 반복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연관과 비교의 관점에서 본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鄭 東 然… 75

 

고등학교 동아시아사는 한국사와 세계사를 연결하는 과목이다. 이는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동아시아에 산적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리라 기대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동아시아사 학교 현장에 정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본고는 연관과 비교의 관점에 입각하여 2015 동아시아사 교육과정과 집필기준, 교과서를 분석하고, 교수 학습 방안을 모색해 보았다.

 

대주제 ‘동아시아의 근대화 운동과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은 서양의 충격과 동아시아의 반응이라는 이분법적 구조 속에서 설명되었다. 교육과정과 집필기준, 교과서에서는 비교의 원리가 주로 적용되었지만,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살피지 못하거나 단편적인 비교가 시도된 경우가 많았다. 연관의 원리가 적용된 사례는 극히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이는 동아시아사라는 광역 단위를 토대로 한 연구 성과가 부재한 데서도 기인하는 바이다.

 

연관과 비교의 원리는 동아시아사 교수 학습 방안에도 적용될 수 있다. 먼저 연관은 연관 대상 선정, 연관 관계 분석, 연관 제시 방법 선택, 연관 실행의 순서로 진행할 수 있다. 그리고 비교는 비교 단위 결정, 비교 대상 선정, 비교 제시 방법 선택, 비교 실행의 순서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연관과 비교를 통해 얻은 결론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으로서 언제든지 수정되거나 재해석될 수 있고, 때로는 연관과 비교를 넘나들며 더욱 풍부한 사고 실험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연관과 비교의 원리를 활용한 교수 학습 상황에서는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욱 중시되어야 한다.

 

 

중학교 역사수업에서 과정 중심 평가의 인식과 실천 가능성 모색 金 秀 美… 111

 

과정 중심 평가는 결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기존의 학생 평가 방식을 학습 과정과 결과를 함께 고려하는 방식으로 개선하여 학생의 성장을 지원하는 평가 본연의 목적을 되살리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역사교사들은 과정 중심 평가에 대한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과정 중심 평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 교사에게 있다면 역사수업에서 구체적인 실천은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또한 학생들의 학습 요구에 맞추어 피드백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역사교사들은 과정 중심 평가에서 객관성 확보를 어려워하고 있으므로 채점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인 채점기준표 개발도 필요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교사의 평가 전문성 확보를 위해 역사교사들의 전문적 학습 공동체 운영과 교사 간 협의 및 상호 지원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군산지역의 교육운동 具 姬 眞… 153

 

1924년을 전후해 군산지역의 사립학교들은 대부분 존립의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위기에 대응해 각계각층의 군산사람들은 대체로 4가지 방식으로 대처해 갔다. 첫째, 교회와 지역민의 지원으로 설립된 영신여학원과 신흥학원은 여자중등교육기관에서 여자보통교육기관으로 전환하거나, 신흥동교육회의 설립과 같이 지역의 후원체제를 강화했다. 둘째, 군산여자청년회 산하 군산부인교육회에서는 군산유아원을 설립하여 유년학당 폐교이후 중단된 유아교육을 이어갔는데, 군산유아원 운영에는 군산부인교육회를 중심으로 자산유지층, 유지청년, 혁신청년 등 군산지역 내 다양한 세력들이 협력했다. 셋째, 군산지역 노동조합들의 대표기관인 군산노동연맹은 광동의숙과 한송학당이 1926년 폐교 위기에 직면하자 운영을 담당한 뒤, 군산학원으로 통합하여 무산아동과 무산청년 교육을 이어가려 했다. 넷째, 1926년부터 군산지역 유지층을 중심으로 군산 제2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는 방안이 모색되기 시작했고, 여기에 다양한 세력이 협력했다.

 

1920년대 말 군산지역은 일본제국주의의 경제공황과 미곡과잉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군산지역 사용자단체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일제는 노동·사회운동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대다수 사립학교들은 교원들의 희생적인 봉사와 권번예기들의 공연을 통한 지원활동 등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유지되어갔다. 하지만 1931년 들어 일제는 한국인들이 설립한 사립학교들에 대한 폐교정책을 취해갔다. 군산 제2공립보통학교 설립을 명분으로 대성학원을 폐교했고, 영신여학원은 폐교의 위기 속에서 영신유치원으로 전환하였으며 군산유아원 또한 폐교되었다.

 

 

 

일제 강점기 사방사업의 전개와 그 문제점 崔 柄 澤… 189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하천 범람과 토사 유출로 인한 농경지 유실을 예방하고자 사방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에는 제대로 된 공법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경성 주변 산의 황폐지를 가리기 위한 공사를 하는 데 그치는 수준이었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산에서 내려오는 토사가 농경지 매몰 등의 피해를 입히지 말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반드시 사방사업을 해야 한다고 파악된 산지 117,000정보를 대상으로 국비를 투입해 사방공사를 시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에 대해 일본 정부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에 따라 예산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계획을 변경해 사방사업 시행 대상지의 10% 정도에만 공사를 시행하였다. 또 조선사방사업령을 공포하여 사방공사에 투입되는 비용의 일부는 지역 주민이 내도록 강요하였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는 사방사업을 道 사업으로 하고, 그 횟수를 크게 늘렸다. 그러나 이 역시 일부 지역에만 제한된 사업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의 사방사업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목청부업자들은 사방사업을 중지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이 사업을 통해 노무관리비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영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批評論文

 

 

高宗政府의 獨逸帝國 인식과 近代政治體制 모색 金 泰 雄… 221

 

오늘날 한국인의 독일 國家像은 富國强兵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어느 시점 일순간에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다. 특히 ‘강병’ 이미지는 ‘라인강의 기적’에서 도출될 수 없다. 물론 제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군사대국의 이미지가 현대 한국인에게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 역시 이전 시기 한국인의 독일 인식과 무관할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 근대 한국인이 맞닥뜨린 대내외 위기 국면을 돌파하여 주권국가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신흥 주권국가로서 모범으로 삼아야 할 독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고종 정부와 개신 식자층은 프로이센이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으로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사회주도층의 부국강병 기획과 독일 민족의 단결을 통해 보불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 주목하였다. 고종 정부와 개신 식자층이 普法戰紀를 비롯한 독일 관련 저작물을 유포하고자 하였음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고종 정부와 개신 식자층은 독일에 대한 이런 이미지를 민인들에게 전달하며 主權國家像을 구체적으로 공유하고자 하였다.

 

독일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1910년 국망 후에도 한국인의 뇌리 속에 남았다. ‘강병’ 이미지가 1950·60년대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이미지와 착종되어 다소 약화되었음에도, 현대 한국인에게 독일이 ‘강병’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부국강병을 통한 주권국가의 수립에 대한 근현대 한국인의 오랜 염원과 떼려야 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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